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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지 72년이 되는 해입니다. 보이지 않는 테두리로 말과 신념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보안법을, 이제는 역사 속에 존재하는 법으로 만들기 위한 행동이 필요할 때입니다.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프로젝트를 통해 국가보안법의 피해를 겪었던 이들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국가보안법의 과거, 현재를 짚어보며 사회적으로 환기하고자 합니다. 일상 속의 국가보안법, 나와 국가보안법을 연결하는 경험과 문제의식을 사회적으로 알리는 연속 기고를 진행합니다.[기자말]
잠결에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잠결에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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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불쑥 찾아온 국가보안법
 

1996년 7월 6일 아침 6시였다. 학생운동을 하던 25살의 나는, 큰 행사를 앞두고 충무로 어느 사무실에서 새벽까지 자료집 정리를 하다가 새벽잠에 막 빠져들었다. 잠결에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화장실에 물이 새요"라고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얘기하는 듯했다. 나는 그렇게 들었다. 문을 열자마자 아주머니는 없고 건장한 몇 명의 남자들이 서 있었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 그들이 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양쪽 팔을 두 사람에게 잡힌 채로 차 뒷자석에 실렸다. 차에 실려, 눈이 가려져 밖을 볼 수 없는 채로 어디론가 갔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도착한 어느 건물의 한 방에는 철제 책상과 침대, 세면대와 변기가 있었다. 철제 책상에 앉은 내 앞으로 3, 4명이 번갈아가며 방에 들어와 앉았다. 그들은 새벽까지 돌아가며 잠을 재우지 않고 자술서를 쓰라고 했다. 몇 개월 동안 나를 쫓아다녔다며 내가 어디서 무얼 했는지를 다 알고 있다는 말을 그들에게 들어야 했다. 고물상인 것처럼 숨기고 단체에서 내놓은 책이나 문서를 챙겨간 얘기를 자랑스럽게 내 앞에서 했다.

이미 옆방에는 몇 명의 선배, 동료들이 같은날 새벽 잡혀와 있는 듯했다. 옆방에 다녀온 듯한 형사는 앉자마자, "옆방에 누구는 이렇게 얘기하는데 말야..." 하면서, 내가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옆방에 있는 그 동료도 힘들어질 것이니 진술을 맞춰야 한다고 으르고 달랬다. 이게 전형적인 자백을 끌어내는 수사 수법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이십대의 나는 지쳐갔고, 무엇보다 인생에 드리워지는 어둠에 두려웠다. 그들은 우리가 이적단체이고 우리의 활동이 반국가단체를 찬양·고무했다고 단정하며 이를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실은 내가 속한 단체는 그 즈음 학생운동 내에서 '새로운 학생운동'을 주창하고 있던 터라 우리의 고민과 활동을 설득하고자 했으나, 그들은 관심이 없었다. 어느 문서에서 '사회주의'라는 말이 나오는 문구 같은 것만을 모아서 내 앞에 들이댔다. 심지어 같은 대학 91학번들끼리 졸업하면서 종종 모이자며 만든 '계모임' 제안서를 들이대며, 이적단체 시도라고 몰아세웠다.

이적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

그들은 홍제동 대공분실의 수사관들이었다. 공안수사의 베테랑이었다. 그들은 세상을 '이적이냐 아니냐'로 보는 이적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 완강함과 일관성에 어느 즈음엔 그들이 계모임조차 이적단체로 몰아세우는 것이 농담을 하는 것인지 아닌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김 상무'처럼 회사 직책으로 불렀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수시로 아이들 교육, 집값 문제로 잡담을 나눴다. 그럴 때는 영락없는 어느 중소기업의 회사원들이었다. 구속영장을 발부받고 서울구치소로 넘기기 전에는 통닭을 시켜주며 나를 위로하기도 했다.

모든 것이 참담하고 혼란스러웠다. 의문이 들었다. 공안수사관들은 어떤 사람인가? 그들의 대표로 이근안 같은 사람이 있을 터였다. 왜 이들은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자기들만의 틀로 재단하여 끼워맞추는가. 이들은 왜 유독 다른 수사기관과 비교해도 위법수사에 둔감한가.

재판을 받을 때에도 실체 없는 무엇과 싸우는 것 같았다. 검사는 우리 대학생활 몇 년의 활동을 오로지 '이적'으로만 해석했고, 재판부도 우리가 무얼 생각하고 고민하는지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 공간은 그런 설득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막연하지만 국가보안법은 경찰, 검사, 판사에게도 단순한 법 이상의 어떤 무엇인 것 같다고 느꼈다.

변호인으로 마주한 국가보안법  
 
국가보안법을 다룬 영화 <변호인> 중 한 장면.
 국가보안법을 다룬 영화 <변호인> 중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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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건으로 2년의 집행유예 형을 받았고, 그 사이 군대에 다녀왔다. 그 뒤 나는 변호사가 되었고, 변호사로서 국가보안법을 변론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인터넷방송국 사업을 하던 윤아무개씨는, 홈페이지 홍보차 북한 가요들을 대량으로 긁어 mp3 파일로 올렸다. 그런데 2010년 어느날 국가보안법 '찬양·고무죄'의 피고인이 되었다. 북한 노래를 공공연하게 올렸으니 당연히 처벌받아야 하는 일인가?

그런데, 실은 2000년 6·15 공동선언 이후 북한 알기 바람이 불면서 <조선일보> <동아일보> 같은 주요 언론사에서도 홈페이지에 북한 관련 코너를 두고 북한 가요를 누구나 다운받을 수 있도록 게시하였다. 그가 인터넷에 올린 북한 노래들은 주요 언론사들이 운영하는 홈페이지에서 내려받은 것이었다. 게다가 그중 상당수는 가사도 없는 경음악이었다. 이를 호소했으나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똑같은 노래를 홈페이지에 올리는 같은 행동을 해도 윤씨는 '북한을 이롭게 할 목적'이라며 처벌받아야 했다.

검사와 법원은 그 '이적 목적'이라는 것을 그의 과거에서 찾았다. 그가 과거 한총련 학생운동을 했고, 통일운동 단체 활동을 한 경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반면 언론사들이 홈페이지에 북한 가요를 올린 일로 처벌되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2011년에 '해사장교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을 변론할 때에도 의문은 더욱 커졌다.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던 김아무개씨는 해군사관학교 장교가 되어 생도들에게 한국현대사를 가르치게 되었다. 열심히 한 게 죄였다. 강의를 위해 그가 만든 '강의노트'가 문제되었다. 강의노트에서 항일운동 중 김일성과 관련된 동북항일연군이나 조국광복회, 보천보전투와 같은 내용을 소개하여 북한을 찬양·고무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은 김씨가 정리한 강의노트는 국내 대표적인 역사학회인 '한국사연구회'에서 발간한 대중역사서를 요약한 것으로서 역사학계에서 이미 검증된 사실일 뿐이었다. 같은 말을 해도, 그는 기소되고 처벌되었다. 군검찰은 그가 학생회장을 하고 한총련 대의원이었다는 걸 '이적 목적'의 근거로 내세웠다. 게다가 그곳은 군대였다. 수사기관은 시종 '주적이 누구인지',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의 머릿속을 추궁했고, 군검찰관은 '왜 굳이 군에서 보천보전투를 소개하는가'라고 물었다. 다행히 그는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기소휴직된 상태로 4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전역도 하지 못하고 '간첩' 누명을 쓴 채 고통스럽게 지내야 했다.

생각을 처벌하려는 법, 반대자를 처벌하려는 법

피의자와 피고인으로 접한 공안수사관들과 국가보안법, 변호인으로 변론하면서 마주 대한 국가보안법 사이에는 공통된 모습이 있다.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사람의 머릿속 생각을 처벌하려는 법이라는 점.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누가 한 것이냐에 따라 처벌이 전혀 달라진다. 나아가 국가보안법은 '그 생각'을 이유로 정치적 반대자를 처벌한다. 국가보안법은 애초 정치적 반대자를 제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정되었고, 지난 72년간 일관되게 정치적 반대자를 탄압하는 데 쓰였다. 공안수사관들이든 검사나 판사든 결국 국가보안법이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도구에 불과했던 것이 아닐까.

오죽하면 1948년 국가보안법이 제정될 당시에도 국회의원 상당수가 극력 반대했을까. <동아일보> 기자로 일했던 한민당 소속 노일환 의원은 "이 법률이야말로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을 위한 법률이나 진시황의 분서사건이나 일제의 치안유지법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라고 호소했다. 미래를 예견이라도 한 것일까.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자, 국가보안법을 반대했던 의원들이 제일 앞머리에서 희생양이 되었다. 국가보안법을 반대했던 국회의원 13명이 1949년 5월부터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노일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보기에 국가보안법은 사람을 처벌하는 수만 가지 형사법 중에 하나가 아니다. 사람의 생각하는 방식을 통제하는 커다란 체계다. 국가보안법을 수사하는 공안수사관들이 '이적의 세계'에 세상을 끼워맞추고 위법수사도 불사하는 것도 그 체계화의 산물이다. 우리 사회 '종북'이라는 말이 위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종북'이 단지 혐오의 딱지붙이기를 넘어 언제든 국가보안법 처벌로 나갈 수 있는 강력한 경보음을 울리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과 함께 72년을 살아오면서 우리 사회는 자신도 모르게 생각의 경계와 구속을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국가보안법을 붙들고 있다. 20세기와 더불어 과거로 보내고 그 폭력성을 성찰해야 할 것을 아직 곁에 두고서 말이다.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라는 우리의 여정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송상교님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전 사무총장입니다.

이 기고는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보내기 위한 전시회의 일환으로 진행합니다. 전시회는 2020년 8월 25일(화)~9월 26일(토), 장소는 민주인권기념관(구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진행할 예정이며, 입장료는 무료입니다.

자세한 정보는 아래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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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국가보안법,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으로, #찬양 고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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