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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을 시작한 지 올해로 20년이다. 비건(Vegan)은 아니고, 소나 돼지, 닭 등 육류를 먹지 않은 페스코(Pesco)로, 남들 앞에선 그냥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둘러대며 살아왔다. 괜히 채식주의자라는 말을 꺼냈다가 만남이 불편해진 경험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래전 여기에 채식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채식이 가져다준 몸의 건강한 변화를 소개하고, 채식을 권하는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채식이라는 말조차 낯설어하던 당시,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운 대로 실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적었다.

채식 인구가 분명 늘어나고는 있지만, '다른 삶'을 위한 불편함은 지난 20년 동안 별반 나아진 게 없다. 그저 '유별난 식습관'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인식도 달라지지 않았고, 육식 위주의 직장 회식 문화도 여전하다. 공교롭게도, 집 근처 채식 식당이 얼마 전 문을 닫았다.

지난 16일은 초복이었다. 복날은 전국 대부분의 초중고등학교가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점심 급식 메뉴가 삼계탕이다. 작년, 재작년에도 그랬고, 내년에도 아마 그럴 거다. 며칠 뒤인 7월 26일 중복에도, 8월 15일 말복에도 아이들의 식판에는 육류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아이들도 그런 복날을 좋아한다. 사실 에어컨이 보편화하면서 여름이 오히려 쾌적하고 시원한 계절이다. 복날은 이미 그 의미를 잃었다는 이야기다. 아이들은 복날의 유래도 모른 채 그저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날로 여길 뿐이다. 그날 채소 반찬은 김치 외엔 없다.

초복 날 점심시간,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소비된 삼계탕만 어림잡아 600그릇이 넘는다. 그나마 올해는 코로나로 등교하는 학생 수가 줄어 예년에 비해 크게 줄어든 숫자다. 중고등학교 학생과 교직원 모두가 등교했다면, 두 배도 훌쩍 뛰어넘었을 것이다.

물론, 난 그날 급식소에 가질 못했다. 김치만 우걱우걱 씹을 게 아니라면, 가봐야 먹을 수 있는 게 없어서다. 냉면 그릇에 담긴 닭 한 마리에다 밥은 닭살을 넣어 끓인 죽이 전부니, 채식하는 사람에게 복날은 부활을 앞둔 사순 시기의 성직자들처럼 금식해야 하는 날이다.

채식을 시작한 지 몇 년 뒤부터 지금껏 채식주의자를 위한 메뉴를 제공해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했다.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고 여겨서다. 국이나 탕까진 바라지도 않고, 밥에다 김치, 거기에 단백질을 보충할 수 있는 두부나 콩자반, 버섯 정도만 있으면 족하다.

채식이 지구 환경 지키는 생활 속 실천

하지만, 현실에선 이것마저 쉽지 않다. 채식하는 사람이 몇 안 되는 마당에 그들을 위한 메뉴를 따로 준비하는 건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별도로 도시락을 챙기라는 조언까지 덧붙인다. 하긴 교직원 중엔 내가 유일하고, 아이들 중에도 다섯 손가락에 꼽을 만큼 극소수다.

채식이 지구 환경을 지키는 생활 속 실천이라고 설득해보지만, 소 닭 보듯 하는 그들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다. 식단이 마련되면 채식하는 아이들이 시나브로 늘어날 거라며 아무리 '선순환'을 이야기해도 귓등으로 흘려듣기 일쑤다. 어느새 낡은 레코드판이 됐다.

"오늘 점심은 선생님께서 드실 게 아무것도 없네요. 이를 어쩌죠?"

복날이 아니래도 이런 '위로'의 말을 동료 교사들로부터 듣는 날이 많다. 등뼈 감자탕이나 육개장, 돼지고기 김치찌개 등이 나오는 날이면, 밥에 김치, 운 좋으면 김 정도를 먹게 된다. 좋아하는 카레에도, 미역국에도 어김없이 고기가 들어가니, 1년 중 태반은 복날인 셈이다.

"진정 걱정이 된다면, 채식 식단이 함께 제공되도록 힘을 모아주시죠."

이런 기계적인 답변도 벌써 십수 년째다. 물론, '진정성 없는' 위로에 '영혼 없는' 답변일 뿐이다. 오히려 급식소의 메뉴가 아이들의 입맛에 맞춰지다 보니 날이 갈수록 고기반찬이 늘어나는 실정이다. 자극적인 소스가 덧입혀진 고기의 풍년에 채소 반찬은 놓일 자리조차 잃었다.

급식소의 고충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고기반찬의 양과 빈도가 너무 높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러잖으면 남는 잔반을 주체할 수 없다는 거다. 더욱이 급식이 맛없다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항의가 끊이지 않아 울며 겨자 먹기로 고기반찬을 늘릴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말 그대로, '악순환'이다. 복날 삼계탕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오랫동안 길든 식습관을 바꾸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씹는 식감과 감칠맛은 가깝고, 환경 파괴에 대한 경각심은 멀기만 하다. 아침부터 기름진 삼겹살을 구워 먹고 온다는 아이들이 적지 않은 요즘이다.

전 세계가 코로나의 와중에도 기후 위기가 화두다. 동토의 땅 시베리아 베르호얀스크에서 최근 섭씨 38도를 찍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적도의 열대 지방에서도 잘 볼 수 없는 기록적인 폭염이란다. 북극에 인접한 그곳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광경은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베르호얀스크라면, 영하 71도라는 최한월 기록을 보유한 세계의 극한지 아닌가. 아무리 여름철이라고는 하나, 에어컨은커녕 변변한 냉장 시설조차 드문 그곳에 열대의 폭염이 이어지고 있는 건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언론에서도 연일 시베리아가 '끓고 있다'며 아우성이다.

자신부터 실천한다는 마음가짐 필요

전문가들은 기후 위기를 즉각 경고하며 각국 정치인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나섰다. 당장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인류에게 22세기는 오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기후 위기는 물론,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조차도 전 지구적 환경 파괴를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그들이 내놓는 대책은 딱히 새로울 건 없다. 탄소 배출량을 줄이고, 생태계를 보존하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말한다. 석유 등 화석 연료 사용을 억제하고,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 에너지로의 전환을 유도하며, 자원 재활용 등을 통해 소비를 줄여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다.

공장식 축산의 폐해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공장식 축산은 동물권 침해는 말할 것도 없고, 무분별한 서식지 파괴를 야기하고 있다. 아마존 등 열대우림의 훼손과 직결되어 있으며, 축산업의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이 전 세계 자동차의 그것보다 훨씬 많다는 건 잘 알려진 바다.

이를 모르는 아이들은 없다. 모든 학년, 모든 교과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교내외 시험에도 꼬박꼬박 출제되며, 틀리는 경우도 거의 없다. 문제가 쉬워서라기보다 워낙 익숙한 주제여서다. 이젠 베르호얀스크라는 낯선 도시 이름까지 모두가 알게 된 마당이다.

아이들에게 기후 위기는 '필수 교양'이 됐다. 세계 최고의 방재 국가라는 일본에서 폭우로 수십 명이 사망했다며 놀라워하고, 해수면 상승으로 수몰 위기를 겪고 있는 태평양의 소국들이 아이들끼리의 화제가 되기도 한다. 그들 중에 그레타 툰베리를 모르는 경우는 없다.

원인도 배웠고, 해법도 잘 알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실천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 배움이 겉돌고 있다고나 할까. '하루라도 치킨을 먹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고 너스레를 떠는 한 아이는, 종이컵 대신 머그컵을 사용하도록 권하는 내게 이렇게 반문했다.

"저 혼자 종이컵 안 쓰고, 고기 안 먹는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자신부터 실천한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모범정답을 내놓지만, 그의 심드렁한 표정을 보아하니 괜한 이야기를 꺼낸 성싶다. 편리함과 씹는 맛에 대한 기회비용을 성찰하기에는 아직 어린 걸까. 방금 올여름 우리나라에서도 기록적인 폭염이 예상된다는 뉴스가 떴다.

태그:#채식, #기후 위기, #복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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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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