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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의 손정우 미국 송환 불허 결정, 고 최숙현 선수에 대한 가혹행위, 안희정 모친 조문 등 7월 둘째 주는 공고한 폭력의 구조를 확인시켜주는 충격적인 뉴스들로 시작되었다.

자칭 페미니스트 대통령과 서울시장까지 공식적으로 안희정 모친상에 조문했는데, 이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가시기도 전에 서울시장 본인이 성폭력 혐의로 피소된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슬픔과 분노, 환멸과 참담함에 눌려 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김지은입니다>를 읽기 시작했다. 가해자에게 경고하고 피해자에게 연대한다는 의미로 이 책을 주문해 두었던 터. <김지은입니다>는 최근 두 달간 팔렸던 것보다 더 많은 부수가 이틀간 팔렸고 일시 품절인 상태였다.
 
 책 <김지은입니다> 겉표지
 책 <김지은입니다> 겉표지
ⓒ 봄알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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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나가기 힘들지 않을까 두려웠던 이 책은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비서 노동에 대한 르포르타주면서, 386 운동권의 권위주의와 '의장 옹립 문화'에 대한 차분한 탐사보도였고, 여러 국면에서 다르게 선택하는 입체적인 인물들이 나오는 서사물이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내게는 박원순이 던져두고 떠난 현재의 혼란을 설명할 수 있는 지침서처럼 보였다.

읽어나가면서 '안희정'의 기표는 하나지만 기의는 최소 세 가지인데 이를 섞어 씀으로써 오해가 생김을 알게 되었다. 우선 자연인, 한 개인으로서의 '안희정'을 '안희정 개인'이라 하자. 또 안희정이 말해오던 민주주의와 인권과 소통 등, 가치와 비전으로서의 안희정이 있다. 이를 '안희정 정신'이라 하자. 마지막으로 안희정계, 라인, 사단, 패거리 등으로 부를 수 있는, 이익 또는 가치를 함께 하는 안희정 사람들을 편의상 '안희정측'이라고 부르겠다.

1. 비서 노동의 특수한 후진성

'안희정 정신'에 동의하여 그와 함께 일하게 된 사람들 중에 <김지은입니다>의 저자 김지은도 있었다. 그런데 그가 전한 수행비서의 노동 현실은 충격적이었다.

비서 업무 매뉴얼 중 형용모순적인 '민주주의 지도자 보필'의 세부 항목이 다음과 같다. '내 몸의 방패화', '악역 맡기', '시키기 쉬운 부하 되기', '좋은 것은 리더 먼저', '항상 리더 편', '철저히 리더만을 위한 판단', '아프지 않기', '개인 약속 지양', '겸손, 인내, 희생', '비밀 엄수(입, 눈, 귀)' 등등.

안희정이 말하던 인권도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저자는 늘 주당 130시간을 넘겨서 일했고 140시간 넘겨 일하기도 했다. 안희정은 거의 모든 전화를 착신전환해두어, 수행비서는 이를 한밤중, 휴가, 샤워 중에도 늘 받아야 했다. 아침에는 안희정이 신을 신발 두 짝 사이의 거리와 각도를 정확하게 맞춰놓고 기다렸고, 밤에는 안희정이 집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뒤 내일 일정을 점검했다.

이만큼 혹독하지 않더라도 업무와 일상이 분리되지 않고 분신처럼 살아야 하는 비서들은 대체로 성폭력 피해를 입기 쉬운 취약한 조건에 놓여 있다. 본인의 피해를 증언하는 것이 곧 '불충'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털어놓기도 어렵다. 젊고 '예쁜' 여성을 비서로 발탁하는 전 사회의 관행 역시 철폐해야 한다.

2. 위력에 의한 성폭력

안희정은 "너는 직언하지 말고 모두가 NO할 때 YES해야 한다", "너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고, 내 그림자다. 나는 눈으로 얘기한다. 너는 나를 지켜야 한다" 같은 말을 비서에게 반복했다.

표현의 자유, 평등권, 프라이버시, 자기결정권 등 여러 기본권이 무시당했다. 김지은은 '순장조'라고 불렸다. 왕의 비밀을 알고 함구하다 왕과 함께 무덤에 묻히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김지은은 충남경찰청장과 지역 검사장들,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 대통령과 수시로 만나고 연락하는 안희정을 24시간 수행하며 그의 거대권력을 실감한다. 반면 충남도청의 성고충 전담 직원은 6급 주무관이었다.

대체 누구에게 피해를 신고할 수 있었을까? 전임 수행비서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더니 "네가 조심하라"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보안을 지켜달라고 신신당부하며 고소했지만 '안희정측'에 실시간으로 고소 사실이 전달되었다.

박원순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서울시청의 피해자 A씨도 피해 사실을 토로했더니 비서실에서는 묵살했다는 의혹이 있고, 피해자 지원단체에 따르면 경찰에 고소하던 날 알 수 없는 경로를 통해서 곧바로 피소인에게 고소 사실이 전달되었다고 한다. 위력은 다각도로 조직적으로 실행된다.

3. 미투 운동에도 지속되는 성폭력

안희정은 미투운동이 공론화된 후 김지은을 불러서 미투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낸 뒤, 그 입막음의 수단으로 다시 성폭행한다. 가해자로서 미투가 두려웠다면, 자신의 피해자에게 최대한 진심어린 사과를 하고 다시는 폭력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정상적인 대응이 아닐까?

오거돈 전 부산시장은 2019년에 불거진 미투 의혹을 무마하고 지나간 뒤 2020년에 성추행을 저지른다. 2002년 성추행을 저지른 우근민 전 제주도지사도 성추행 피해자가 사과를 요구하는 면담 자리에서 다시 성추행을 저질렀다. 박원순은 2002년 당시 '우근민 제주도지사 성추행사건 민간진상조사위원회'에서 민간 진상조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2018년에 안희정이 사퇴하는 모습도 지켜봤다. 그런데도 피해자 측에 따르면 부서 이동을 한 올 2월에도 텔레그램 비밀 대화방에 초대했다고 했다. 

가진 것도 잃을 것도 많은 지자체장들은 다른 권력자가 성폭력 가해 사실이 밝혀져 낙마하는 모습에 경각심을 가질 만한데 이후에도 가해를 지속했다. 권력이 주는 도취감 때문일지, 특권의식으로 방만해지는 현상(밧세바 증후군) 때문일지, 상명하복이 미덕이라는 공무원 조직의 특성 때문인지, 분명한 진상 조사와 권력구조 연구가 필요하다.

4. 2차 가해와 자살, 그 두 극단을 넘어

안희정의 세 가지 기의의 움직임이 서로 어긋나는 순간이 관찰된다. 예를 들면 '안희정측'이 죄다 모여 앉아 피해자에 대한 음해를 수집하고 있던 그 순간에 '안희정 개인'은 다른 장소에서 '용서를 구한다.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비서실의 입장은 잘못이다'라는 글을 올리고 있었다. '안희정 개인'이 '안희정 정신'에 따른 죄책감을 느끼고 독자행동을 잠깐이나마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안희정측'은 '안희정 개인'의 독자행동을 곧바로 무마하고 다시 '개인'을 '측'으로 재흡수했다. 안희정이라는 거대한 상징자본은 이미 그 자체의 관성 때문에 '개인'과는 무관하게 굴러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가해를 전면 부정하고 피해자에게 2차 가해하는 가해자, 죽음을 택하여 다시 피해자에게 크나큰 죄책감을 안기고 진실을 묻어버리는 가해자, 이러한 두 가지 극단 말고 다른 공간이 가능해야 한다(오거돈의 경우, 사과하고 사퇴하는 해결책을 따랐다).

진심으로 사과하고 죄지은 만큼 다시 벌을 받고 나서 할 일이 남아 있다면 다시 하는 가해자의 모습을 보았으면 한다. 죽음으로 도피해도 진상이 낱낱이 밝혀지고 가족은 고통스러워하며 측근들은 해고될 때, '죽음이 답이 아니구나. 차라리 살아남아서 해명하고 변호하자'라는 메시지가 정치권에 남을 수 있다.

5. 2차 가해의 구조
 
법정구속 안희정, 굳은 표정으로 호송차 탑승 비서 성폭력 혐의 관련 항소심에서 징역 3년 6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고법에서 구치소행 호송차를 타고 있다.
▲ 법정구속 안희정, 굳은 표정으로 호송차 탑승 비서 성폭력 혐의 관련 항소심에서 징역 3년 6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2019년 2월 1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고법에서 구치소행 호송차를 타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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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성폭력의 경우 2차 가해가 매우 방대하고 집요하였다. 재판 과정도 2차 가해의 일부였다. 안희정 무죄가 나왔던 1심에서, 피해자 동의도 구하지 않고 안희정을 얇은 가림막으로만 가린 채 바로 피해자 옆에 앉혔다. 검찰은 재판의 전면 비공개를 신청했는데, 안희정 편에 선 거짓 증언들은 모두 언론에 공개되었다. 16시간 동안 검사, 판사, 안희정의 다섯 변호인이 고소인인 김지은에게 같은 질문과 유도신문을 반복했다.

증인들은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사실을 말해준 사람들과 없던 일을 거짓으로 말하는 사람들로 양분되었다. 일부 증인들이 처음에는 사실관계를 모른 채 자기도 모르게 2차 가해와 은폐를 하기도 했다가, 나중에 비로소 성폭력에 대해 알게 되고 김지은의 편에 섰다는 대목이 특기할 만하다.

김지은이 힘들다고 할 때 '누나가 그렇게 나약해서 어떻게 지사님을 대통령으로 만들겠느냐. 정신 똑바로 차려라'라고 말했다가 나중에 진상을 알고 충격을 받은 동료도 있었다. 즉 '그가 설마 그럴 리 없다'라고 놀라는 사람들의 존재가 무죄를 증명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상상도 못했다'는 주변인들의 존재는 만만한 사람들과 신경쓰이는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태도를 보이는 가해자의 이중성을 보여줄 뿐이다.

성폭력을 광범위하게 저지르는 가해자의 경우 공론화 이후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 대세지만, 가장 취약한 소수의 여성에게만 은밀하게 폭력을 행사한 경우 대부분의 주변 여성들조차 '믿을 수 없다'라는 반응을 보일 수 있다. 그렇다 한들, 가해자의 도덕성을 굳게 믿었던 주변인들의 존재가 알리바이가 되지는 않는다. 또한 '설마 그럴 리가'라는 반응이 악의에서 나오지 않는다 해도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

6. 거대한 남성연대와 그 균열
 
 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교육관에서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이 열렸다.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가 박원순 시장이 고소인에게 보냈다는 비밀대화방 초대문자를 공개하고 있다.
 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교육관에서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이 열렸다.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가 박원순 시장이 고소인에게 보냈다는 비밀대화방 초대문자를 공개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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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개인'은 혼란과 충격을 던져주고 책임을 회피한 채 떠났지만 피해자 A씨 편에 서고 진상을 규명하는 것이 '박원순 정신'일 것이라 믿는다. 역설적으로 이것이 고인이 남긴 마지막 유산일 것이다.

'박원순 정신'만 기리고 '박원순 개인'만 애도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박원순 개인에게서 그의 혼란스러운 최후만 도려낼 수는 없다. 그리고 그가 권력을 점해갈 때 권력 역시 그를 점해갔으며, 따라서 그가 이루어낸 많은 '공'들도 안희정과 마찬가지로 남성연대 속으로 서서히 편입해가면서 이루어낸 것이다.

순수한 초심을 유지한 채로 오직 시민의 힘으로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믿을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그는 그 공고한 질서에 균열을 낼 수도 있었지만 멈춰버렸다. 그가 원치 않게 드러낸 그 균열을 파고드는 것은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7. 피해자다움의 족쇄

책에 따르면, 김지은은 외출도 불가능하고 길에서 호떡을 사먹을 수도 없고 친구의 경조사에도 가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잠깐이라도 웃거나 약간이라도 밝은 색 옷을 입었다가는 피해자답지 못하다는 비난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곤경은 언론의 관심을 거의 받지 못했다. 안희정이 친구집 컨테이너에서 지낸다는 동정조의 기사가 쏟아졌을 때, 김지은이 옷 한 벌도 없는 채로 당장 갈 곳이 없어 여성단체 활동가의 집에서 며칠 신세를 지다가 쉼터에 입소하여 옷 기증함에서 맞는 사이즈의 옷을 찾아입었다는 이야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는 '불쌍하고 가련한' 피해자다운 모습은 무심히 지나치고, 오직 '피해자답지 않은' 모습이 잠깐 비칠 때면 맹렬하게 그 이미지를 확산시켰다.

피해자 A씨에게도 허상인 '피해자다움'을 강요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비난하는 2차 가해가 쏟아질 것이 자명하다. 이미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다만 이제부터는 그런 2차 가해도 아무런 선처 없이 법의 심판을 받게 되길 바랄 뿐이다.

8. 피해자 A씨에게

열심히 일했던 것이 오히려 '피해자답지 않음'이라는 화살로 돌아오고, 정신적으로 흔들리면 신빙성이 없다고 비난받고, 조리있게 말하면 피해자가 멀쩡한 것이 이상하다고 의심받는 적대적 환경 속에서 이 책 <김지은입니다>가 나왔다.

책 자체가 거대권력에 맞서 자신을 지키고 증언할 수 있다는 산 증거다. 책 속의 작은 영웅들, 힘은 없지만 진실을 말할 용기가 있는 보통 사람들이 이 사회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느꼈다. 피해자 A씨에게 이 책이 주는 위로가 가닿기를 바란다.

김지은입니다 -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김지은 (지은이), 봄알람(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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