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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이라는 이름으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책더미 속에서 사심을 담아 알리고 싶은 책, 그냥 지나치긴 아까운 책을 오마이뉴스 라이프플러스 에디터가 골라 소개합니다.[편집자말]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서른 여덟인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열광적으로 좋아하며, 채식을 고수하고, 일요일이면 단정한 정장을 차려입고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린다. 낮엔 아이들에게 수학과 역사를 가르치고, 저녁엔 자신의 공부에 매진한다. 신실한 기독교인에게 적절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다소 '수도승' 같은 타입이다.

여기, 한 가족이 있다. 구성원 중 한 사람은 글을 쓰고 강연하며 사는 프리랜서다. 또 다른 사람은 철학 공부를 즐기는 직장인이며, 나머지 한 사람은 노무사 시험 준비로 매일 도서관에 출석 도장을 찍는 수험생이다. 이들은 가끔 투닥거리고, 때론 불같이 싸우기도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야식과 맥주를 앞두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밤을 지새운다.

앞에서 언급한 남자의 이름은 알폰소. 그는 저 멀리, 서아프리카 가나의 부두부람 캠프에 살고 있는 라이베리아 난민이다. 뒤에서 설명한 가족은 '달걀부리 식구들'이다. 이 가족은 <당신이 계속 불편했으면 좋겠습니다> 등의 책을 쓴 홍승은 작가와 '폴리아모리'(비독점 다자 간 연애) 관계를 맺고 있는 두 애인 우주와 지민, 마지막으로 네 마리의 반려견이 그 구성원이다.

'난민'과 '폴리아모리'라는 낯선 정체성을 한 겹 걷어내면, 지극히 평범한 이웃이 보인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이 '보통의 얼굴'을 대면하기도 전에 두려움과 경계심을 내보였다. 지난 2018년 6월, 예멘 난민들이 내전을 피해 제주도에 당도했을 때, 이들이 마주한 건 '잠재적 성범죄자'라거나 'IS 테러범'이라는 의심의 눈초리였다.

같은 해 3월, 기독교 재단의 대학을 다니던 지민은 페미니즘 강연을 열고, 폴리아모리 관계를 밝혔다는 이유로 무기정학 징계를 받았다. '소돔과 고모라', '타락의 끝'과 같은 무시무시한 말들이 꼬리표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무지가 낳은 혐오다. 만약, 아무런 편견 없이 이들의 삶을 먼저 들여다봤다면 어땠을까. 아마 이들의 첫인상은 많이 달라졌을 테고, 이런 고초를 겪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앎이 늘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 없이 사랑은 불가능하다. 제멋대로 상상한 '난민', '폴리아모리'의 상을 거부하고 N개의 구체적인 서사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소 입체적인 얼굴을 가진 이웃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자신의 경험을 기꺼이 내어준 두 책을 소개한다.

[하나] <아프리카인, 신실한 기독교인, 채식주의자, 맨유 열혈 팬, 그리고 난민>
:논문에 담지 못한 어느 인류학자의 난민 캠프 401일 체류기, 오마타 나오히코 저
 
책 <아프리카인, 신실한 기독교인, 채식주의자, 맨유 열혈 팬, 그리고 난민>
 책 <아프리카인, 신실한 기독교인, 채식주의자, 맨유 열혈 팬, 그리고 난민>
ⓒ 원더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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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7월, 난민들의 경제활동과 생활상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가나의 부두부람 난민캠프를 찾은 오마타 나오히코 옥스퍼드 대학 난민연구센터 부교수(아래 나오)는 특별한 당부를 듣는다. 이곳에서 만난 알폰소가 "Look into our life deeply with your own eyes and listen to our voices.(네 눈으로 직접 우리의 삶을 깊이 들여다봐 줘. 그리고 우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줘)"라고 말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난민은 늘 도움이 필요한 무력한 존재, 혹은 타국의 치안과 일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라는 양 극단을 오갔다. 하지만 나오가 약 401일 동안 연구자와 이웃이라는 경계에 서서 들여다본 난민들의 모습은 달랐다.

그는 말한다. "물질적인 면에서의 부족함과 난민이라는 불안정한 지위에서 생겨나는 권리적인 면의 제약을 제외한다면, 난민 캠프의 사회 구조와 그곳에서 꾸려 나가는 난민들의 삶은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나오가 논문에 채 담지 못한 후일담을 책으로 엮어낸 이유다.

부두부람 난민캠프에는 1989년 발발한 라이베리아 내전을 피해 탈출한 2만 명 이상의 난민이 살고 있다. 수 년 전 라이베리아의 국내 분쟁은 끝났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20년 가까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장기화된 난민'이 사는 터전이다.

때문에 이곳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난민캠프의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텐트 등의 간이 주택 대신, 벽돌과 시멘트로 만든 가옥들이 있는 하나의 마을과 같은 형태다. 반란군에게 가족을 잃고, 박해를 받아 도망친 이들에게 이 캠프는 '잠시 머물다 가는 곳'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공간이다.

그런데 2003년 이후, 라이베리아에 정전 협정이 체결되고 캠프 정착이 장기화되면서 난민을 지원하는 유엔난민기구(UNHCR) 등의 지원이 점차 줄게 된다. 여러 경제 활동이 제약된 상황이지만 어떻게든 이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난민들은 자연스레 '돈'을 벌 방법을 찾는다. 나오가 기록한 그 모습들이 퍽 다채롭다.

소소하게는 소독이 된 물을 담은 음용수팩을 판매하는 상인부터 인터넷 카페를 운영해 돈을 버는 젊은이까지, 난민캠프의 비즈니스 모델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심지어는 캠프 안에서 장례를 담당하는 장의사나, 미국·호주나 유럽 국가 등으로 재정착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스폰서'를 전문적으로 연결해주는 IT컨설턴트도 있다.

직업에 따라, 캠프 밖에서 돈을 보내주는 가족의 여부에 따라 난민들 사이에서도 경제적 계층이 갈린다. 이 같은 모습은 바깥 사회와 다르지 않다. 또, 정치적 입장 차로 여러 갈등이 벌어지는 것도, 개개인이 다종다양한 욕망을 품고 있는 것도 캠프 밖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다. 대부분은 그저 '오늘'을 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소시민일 뿐이다. 다시, 나오의 말이다.
 
"부두부람은 그야말로 사회의 축소판이다. '얼굴'과 '목소리'를 갖고 이곳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이 엮어 나가는 '이야기'는 1년이 넘게 지내는 동안 나에게 다양한 표정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는 어떤 의미에선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닌가? 본래 '난민'이라는 특수한 인종이나 민족이 있는 것이 아니다. ... '난민'이라는 개념은... 인류가 만들어 낸 카테고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 287p
 

[둘]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
- 폴리아모리 에세이, 홍승은 저
 
책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
 책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
ⓒ 낮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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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말이 되나요?" 다양한 '사랑'의 형태에 대해 진중하게 이야기하던 강연장, 날선 질문이 날아들었다. 이어 질문자는 "정치적 실험을 하는 게 아니냐"며 쏘아붙였다. 몇 해 전 겨울, 한 강연장에서 폴리아모리 관계에 대해 설명하던 홍승은 작가가 실제로 마주했던 질문이다. 홍 작가는 이 질문을 이렇게 되받아쳤다. "실험이요? 저는 제 삶을 갖고 실험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를 폴리아모리라고 말하지만, 세상은 우리를 이상한(queer) 관계라고 말한다. 인터넷 검색창에 '폴리아모리'를 입력하면 무수한 분노를 마주할 수 있다. 난교, 바람, 악의 세력, 타락의 끝, 소돔과 고모라. 그런 단어들을 마주보고 있으면 불현 듯 나와 내 일상이 낯설게 느껴진다. 다정한 아침 인사와 밤 인사, 하루를 채우는 반짝이는 대화와 고만고만한 갈등,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낯설어지는 순간이다." - 11p
 
"2인분의 사랑이 기본값이라고 규정된 세계"에서 지난 5년간 '3인분의' 비독점적인 다자 간 연애를 추구한 홍승은 작가와 그의 애인인 지민, 우주는 의구심을 가득 담은 눈초리를 맞닥뜨려야만 했다. 때론 의구심에 그치지 않고, 소위 '비정상적인 성생활'을 할 것이라는 식의 무례한 오해나 단정, 비난에 시달리기도 했다.

어찌 보면 이 관계를 오픈하고 낯선 개념을 설명하는 대신, 적당히 둘러대며 조용히 사는 것이 개인의 안위를 위해 더 나을지도 모르는 상황. 그렇지만 홍 작가는 남들과 다를 것 없는, 그러나 그들만의 특별한 연애와 동거 생활을 조심스레 담아냈다. "내 몫의 이야기만큼 사랑과 관계에 대한 개념이 확장"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렇다고 폴리아모리에 대한 '환상'만을 담아내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자신조차도 과거 연애를 할 때 집착하고, 미래를 불안해하던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현재의 관계도 분명 흔들릴 때가 있고, "질투와 혼란과 불안과 우울감이 뒤섞인 '무엇'"이 밀려올 때도 있다고 토로한다. 이 책 속에서 세 사람은 지금의 상태가 완벽하다고, 우리의 관계엔 아무런 흠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이런 불완전함을 제대로 직면하는 것이,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여느 건강한 관계가 그러하듯, 이들은 어긋나는 감정을 회피하고, 모른 채 하지 않는다. 대신, '노력'하고 '공부'하며 서로를 대면한다. 정말, "사랑과 연애는 낭만적 판타지가 아니라 함께하기 위한 끊임없는 협상과 노동이다."(14p)

'폴리아모리 에세이'라는 부제가 달렸지만, 이 책은 모노가미(배타적 독점적 일대일 연애관계), 혹은 기존의 언어로 규정될 수 없는 그 어떤 방식의 관계 맺기를 꿈꾸고 시도하는 모든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폴리아모리라는 개념이 다소 낯설 뿐, 결국 관계의 평등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새롭고도 익숙한 '연애의 기쁨과 슬픔'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한국 사회가 지금껏 '정상'이라고 여겨온 모노가미, 이성애 연애 각본의 문제점도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사랑의 형태를 뛰어넘어 관계의 평등성을 성취하기 위해, 사회도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편견과 낙인을 거둬내고, 새로운 관계를 상상할 수 있어야만 개개인의 안전하고 온전한 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처럼, "사랑은 개인적인 감정일지 몰라도, 그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타자와 사회의 품이 필요하"다.
 
"... 어쩌면 세상의 기준에서 나는 철저하게 불온한 연애와 가족 공동체를 고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와 이 관계가 불온하다고 손가락질 받을 일이라면, 나는 불온한 존재 그대로 남아 그들이 정의하는 아름다움을 해체하는 아름다움이고 싶다." - 서문 중에서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 - 홍승은 폴리아모리 에세이

홍승은 (지은이), 낮은산(2020)


아프리카인, 신실한 기독교인, 채식주의자, 맨유 열혈 팬, 그리고 난민 - 논문에는 담지 못한 어느 인류학자의 난민 캠프 401일 체류기

오마타 나오히코 (지은이), 이수진 (옮긴이), 원더박스(2020)


태그:#난민, #폴리아모리, #난민캠프, #홍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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