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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야학에서는 백일장 시상식 준비가 한창이다.
 지금 우리 야학에서는 백일장 시상식 준비가 한창이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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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우(가명)는 지난 2월에 내가 봉사하고 있는 야학에 새로 들어온 국어교사다. 그가 함께하면서 나의 큰 걱정거리가 사라졌다. 작년까지 함께했던 교사가 개인 사정으로 그만두는 바람에 올해는 나 혼자서 1, 2학년을 다 맡게 되었고, 시간표도 어쩔 수 없이 다 그렇게 짰다. 바로 그때, 그가 성당 신부님의 소개로 야학 문을 두드리게 된 것이다.

작년에 했던 국어과 행사가 백일장과 독서대회인데, 둘이 의논해서 그가 1학기 때에 백일장을, 내가 2학기 때 독서대회를 맡기로 했다. 그 백일장이 10여 일 전에 있었고, 그는 지금 시상 준비에 한창이다. 그런데 그가 나에게 수상자 이외의 학생들에게 참가상을 줬으면 어떻겠냐고 물어왔다.

2년 동안 내가 백일장을 주관하면서 그런 적은 없었다. 등급을 장원과 차상, 차하 등 셋으로 나눠 뽑힌 학생들에게만 상장과 상품을 주었다. 그런데 그가 내가 생각해보지 못한 제안한 것이었다.

태우는 확실히 나와는 달랐다. 1, 2학년 합쳐서 17명에 불과한데도 그는 수상자를 8명으로 정했다. 나는 6명으로 했었다. 그리고 그는 상을 못 받는 학생들에게 참가상을 주자고 했다. 나는 아예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학생이 다 합쳐서 17명이지만 백일장 하는 날 여러 사정으로 인해서 12명만 학교에 나왔다. 그렇다면 이번에 참가상은 4명이 받게 되는 셈이다.

그뿐만 아니었다. 12월에 발간하는 교지에 8명의 수상자만이 아니라 한 자리에서 열심히 글을 쓴, 상을 받지 못하는 4명의 글도 다 실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보다 2년 먼저 와서 행사를 진행했던 나로서는, 그의 이같은 행보가 엄청난 변화나 다름없었다.

그랬다. 나는 학생들의 글을 엄격하게 심사해서 수상자를 뽑은 다음에 그에 걸맞은 상품을 줬다. 그것으로 내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시상할 때는 1, 2학년 학생들을 한곳에 모이게 해서 수상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고, 상장과 상품을 주며 축하해 주었다. 그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우는 아니었다. 상장은 수상자에게 주되, 상품만큼은 상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에게도 '참가상'이라는 명목으로 주자는 것이었다. 교지에 글을 싣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교지를 받아서 거기에 자기의 글이 없다면 실망할 것이다. 비록 질은 조금 떨어질지라도 정성 들여 쓴 글을 교지에서 본다면 아주 기분이 좋을 것이다.

'참가상'이라는 그의 따뜻한 시상 계획에 한 가지 사건이 떠올랐다. 48년 전인 1972년, 중학교에 들어가서 교내 반공 웅변대회에 나갔다. 원고를 써서 몇 번씩 큰누나의 코치를 받아 가며 억양과 손동작을 익혔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다. 2000명이 넘는 학생들 앞에서 나는 완전히 얼어붙어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한 채 연단에서 내려오고 말았다. 14세 소년의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웅변대회 시상식이 있었다. 놀랍게도 나에게 '장려상'이 주어졌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비밀은 금방 밝혀졌다. 최우수상, 우수상, 특선 등 정식 수상자 이외에 대회에 나온 모든 참가자에게 '장려상'을 준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상은 태우가 지금 백일장에서 계획하고 있는 '참가상'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 상장을 들고 나는 그 당시 얼마나 좋아했던가. 남에게 그것을 꺼내 많이 자랑했다. 상장에 얽힌 그 비밀(?)은 거의 숨겼다. 순전히 내 실력으로 장려상을 받은 것이라고 뽐내곤 했다.

이번 태우의 백일장 시상 계획을 보면서 '내로남불'이라는 말을 생각했다. 그랬다. 나의 태도는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다. 중학교 1학년 때는 정식 수상자가 아니더라도 학교의 배려로 장려상을 받아서 그렇게 좋아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생각하지 못했다. 잘한 것은 상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못 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곧 있을 백일장 시상식을 그려본다. 그가 올해 함께하면서 크게 변할 시상식 장면을 떠올리며 빙그레 미소를 지어본다. 수상자도 예전보다 늘어났다. 수상을 하지 못한 학생들도 이름이 불리고, 참가상이라는 상품을 받게 될 것이다. 예전처럼 상을 못 받는 학생들이 풀이 죽어 고개 숙이는 장면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모두가 손에 상장이나 상품을 들고 환하게 웃으며 태우와 나랑 함께 손가락 하트 포즈를 취해 사진을 찍을 것이다.

태그:#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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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즈음 큰 기쁨 한 가지가 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마이뉴스'를 보는 것입니다. 때때로 독자 의견란에 글을 올리다보니 저도 기자가 되어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들의 다양한 삶을 솔직하게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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