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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무기징역이 안 됐어?" 베란다 의자에 앉아 시원한 밤바람을 쐬며 놀던 둘째가 대화에 한 마디 얹었다. 

나는 퇴근한 남편에게 성착취 사이트 운영자 손정우의 미국 송환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를 쏟아내던 중이었다. 그 사이트는 아동 성착취물 영상만 취급하는 곳이었고, 손씨는 약 3년간 그렇게 돈을 벌었다고 한다. 

불쑥 들려온 둘째의 말에 '너는 이제 부연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알아듣는 나이가 되었구나'라고 알 수 있었다. 

엄마가 페미니스트 하면 어떤가요? 

나는 두 아이의 엄마인 기혼여성이고, 페미니스트다. 한동안 이 삶이 페미니즘적이지 않은 것 같은 자괴감에 페미니스트라 칭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불완전한 삶을 사는 '아줌마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를 칭한다. 

페미니스트든 뭐든 여자로 사는 삶이 팍팍해서, 아줌마 친구들과는 남편 욕을 곁들인 부부싸움 얘기, 가부장적인 시가 얘기, 육아에 이은 양육의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영화 < 4등 >의 한 장면.
 영화 < 4등 >의 한 장면.
ⓒ (주)프레인글로벌/ CGV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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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아이 성적과 대학 진학에 목숨 거는 집단으로 자리매김한 것 같이 느껴진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4등>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엄마, 아빠, 아들 둘인 가족의 엄마는 둘째 아들을 데리고 절에 가서 기도를 한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는 엄마에게 부처님께 뭐라고 빌었는지 묻는다. 

엄마: "응, 아빠 하는 일 잘 되게 해달라고. 형은 수영 금메달 따게 해달라고 하고. 너는 공부 잘하게 해달라고 빌었지."
아이: "그럼 엄마는?"
엄마: "엄마는... 없어." 


n번방 사건이 언론의 조명을 받아 온 국민이 알게 된 이후 특히 아들을 가진 엄마들이 모임을 조직해서 사교육을 통해 성교육을 받도록 시킨다는 기사를 본 적 있다. 

온 사회에 깔린 좋은 엄마 신화 때문에 어떠한 일에도 엄마들은 반사적으로 아이들을 먼저 챙기게 된다. 물론 n번방 사건은 가해자 중에 10대 남자가 많기 때문에 더 그렇겠지만 화들짝 놀라서 아들 성교육을 시켜야겠다고 두뇌와 행동력이 따라가는 그 엄마 자신의 성은 어떤가. 

엄마들은 대부분 기혼 여성으로서 어릴 때부터 어떤 문화에서 자랐고, 남편과 내가 얼마나 평등한 섹스를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4등> 엄마가 남편과 아이들을 위한 기도만 줄기차게 했지, 정작 자신을 위한 기도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삶이 과연 괜찮은 삶인가. 모든 것을 참고 희생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이상적인 어머니상으로 그려지는 사회에서 우리는 자랐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후로 아이는 당연히 엄마가 돌봐야 하는 문화 속에서 나도 모르게 나를 팽개치고 아이에 헌신하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어릴 때는 유기농 식단과 제대로 된 생활습관 기르기에 열을 올리고, 크면 공부에 열을 올린다. 

장안의 화제였던 드라마 <스카이캐슬>에는 예서 엄마(염정아)가 예서(김혜윤)의 방에서 그동안 예서가 받은 상장들을 죽 늘어놓고 눈물을 글썽이며, "이거 우리가 다 해냈잖아"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스카이캐슬> 중에서.
 <스카이캐슬> 중에서.
ⓒ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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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해내는 일은 아이의 성적과 관련된 일이어야 한다. 엄마 자신의 일이 아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지금 엄마로 사는 우리 각자는 정말로 행복한가.  

단지 딸이라는, 혹은 아들이라는 이유로

스스로 질문해보자. 나는 내 딸이 나와 똑같은 삶을 살면 좋겠는가.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소중한 내 딸을 잘 키워서 좋은 대학에 보냈는데, 동기와 선후배 남학생의 성희롱에 치이고, 성추행하는 교수 때문에 괴로워도 말도 못 하고, 야근하고 돌아오는 밤길에 성폭행당할까 무서워 호신용 무기를 가지고 다녀야 해도 정말 괜찮겠는가. 

이렇게 고이 기른 내 딸이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직장에서 더 적은 월급을 받아도 정말 괜찮겠는가. 내 딸의 남자친구가 둘이 섹스하는 장면을 몰래 촬영해두었다가 헤어지자는 말에 대문짝만하게 사진을 인쇄해서 붙여놓고, 섹스 영상을 퍼뜨리겠다며 딸아이를 협박해도 괜찮겠는가. 

내 딸 대학 동창 남자애가 내 딸의 사진을 텔레그램에 공유해서 신상이 다 털리고 내 딸의 얼굴과 합성한 각종 더러운 사진을 몇만 명의 남자들이 다 같이 돌려보며 낄낄대도 괜찮겠는가. 

나는 내 아들이 마초 남자로 크는 게 정말로 괜찮은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내 어린 아들이 사회가 정해놓은 남성성의 기준에 자신의 가능성을 욱여넣는 게 괜찮은가. 내 아들이 감정을 잘 표현하지도 못하고 폭력적인 남자로 자란다 해도 괜찮은가. 가부장적 가치관을 온몸으로 습득해서, 엄마는 아빠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놀고먹는다고 생각해도 괜찮은가. 죄의식 없이 여자를 섹스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남자로 내 아들이 자라도 정말로 괜찮은가. 

만일 위의 경우에 하나라도 괜찮지 않은 엄마가 있다면, 그 엄마는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페미니즘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벨 훅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18쪽)이다. 성차별주의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위에 열거한 예시들과 저기에 다 늘어놓지 못한 삶의 불편한 점을 모두 포함한다. 
 
영화 <서프러제트>의 포스터.
 영화 <서프러제트>의 포스터.
ⓒ UPI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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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는 과격한 집단이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영국의 여자들은 '제발 여자에게 참정권을 달라'면서 돌로 유리창을 깨고 우체통을 폭파시켰으니까. 십여 년 동안 평화롭게 남자들에게 말해왔는데 바뀌는 게 없어서, 남자들이 알아듣는 언어로 말하자고 결의하고 과격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던 여성들은 결국 그 과격한 행동 끝에 참정권을 획득했다. 

우리가 지금 너무도 당연한 권리로 여기고 살아 생각조차 하지 않는 투표권이 사실은 약 100년 전 다른 나라의 페미니스트가 목숨 걸고 투쟁한 결과라는 사실을 돌아보아야 한다.

물론 세상이 전보다는 좋아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세상이 지금처럼 좋아진 것은 내가 무관심했던 사이에도 끊임없이 온갖 성차별 이슈들에 대해 투쟁해온 페미니스트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지금 여자로 사는 내 삶이, 즉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사는 내 삶이 팍팍하다면, 당신은 반드시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여자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힘들게 살도록 만드는 사회 구조를 바꾸어가도록 노력하는 사람들이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적으로 세상이 바뀌어야 내 아이가 행복하게 자기 인생을 살 수 있다. 엄마로서 아이에게 바라는 게 사실은 그거 아닌가. 그렇다면 엄마들이여 우리는 이제 페미니스트가 되자.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김동진 시민기자의 개인 브런치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손정우, #아들교육, #딸교육, #좋은엄마, #페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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