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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쿠데타 4주년인 1965년 5월 16일에 군사정변을 일으키려 했던 장교가 있었다. 박정희에 대항해 '제2의 5.16'을 계획했던 군인이다. 거사 명분은 민정이양 공약 불이행과 굴욕적 한일협정 추진을 응징한다는 것이었다. 1961년 5.16쿠데타 당일 오전부터 군사혁명위원회 보도국장(대변인)이 돼 박정희의 '스피커' 역할을 했던 원충연(1921~2004) 대령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하지만 원충연은 모의단계에서 발각됐다. 이 때문에 1·2·3심 똑같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반국가단체를 결성해 반란을 예비·음모하고 정권 전복과 정부 참칭을 시도했다는 게 유죄 이유였다. 사형선고 뒤 그는 대통령 결정에 의해 1967년에 무기징역으로 감경되고 1969년에 15년형으로 감형됐다.

박정희 정권이 붕괴한 뒤이자 15년형 만기 4개월 전인 1981년 3월 3일, 원충연은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그 후 캐나다로 이민을 갔지만 그의 삶은 순탄하지 못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하반신이 마비됐기 때문이다. 2004년에 83세로 눈을 감았고, 지금은 국립 대전현충원에 모셔져 있다.

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박근혜 정권 때인 2014년부터 본격화됐다. 셋째아들 원동일씨가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던 것. 청구 이유는 원충연이 결성한 조직이 위계질서나 지휘체계를 갖춘 반국가단체 수준까지 가지 못했으며, 반란을 계획한 것은 정부를 참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독재정권에 의해 억압된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는 점 등이다.

하지만, 재심 재판부는 원심의 판결 이유를 유지했다. 재심 1심(서울중앙지법)은 17년 형을 선고했고, 재심 2심(서울고법)은 15년 형을 선고했다. 이 상태에서 지난 6월 30일, 대법원은 15년 형을 선고한 2심 판결을 확정했다.

재심 재판부들이 원심의 유죄 판결을 유지한 이유는, 재심 1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4형사부의 판결 이유에 나타난다. 이 재판부는 "비록 피고인 등이 당시 정권을 반민주적 세력으로 간주하고 이를 바라잡겠다는 의도에서 저지른 것이라고 하더라도, 헌법상 허용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군사상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지휘 하에 있는 병력을 동원하는 방법으로 이루고자 했다면, 그 역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훼손하는 반민주적 세력에 의한 쿠데타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판시했다. 의도는 좋을지 모르지만 방법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원충연을 아십니까
 
 원충연의 쿠데타 음모를 보도한 1965년 5월 10일자 <동아일보>.
 원충연의 쿠데타 음모를 보도한 1965년 5월 10일자 <동아일보>.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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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출신으로 1945년에 일본 주오대학를 졸업한 원충연은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한 뒤 이 학교 정치학과 전임강사가 됐다. 그러나 학자의 길을 오래 걷지 못했다. 군인이 되기에는 다소 뒤늦은 27세(1948년) 때 그는 군 입대를 결심했다. 그가 인생 경로를 바꾼 것은 그해 10월에 벌어진 여순항쟁(여순사건·여순반란) 때문이었다.

그가 여순사건 때문에 입대하게 됐다는 점은 출소 직후에 가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 때 언급됐다. 1981년 3월 4일 치 <중앙일보> 기사 '15년 전의 반혁명을 말하는 원충연씨'에 따르면, 그는 서울대에서 근무하던 중에 생긴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러던 중 여순반란사건이 터져 군의 정신무장이 필요하다고 생각, 당시 서울대 강사 2명, 졸업생 10명과 함께 정훈 1기로 군에 투신했다."

제주 4.3항쟁과 마찬가지로 여순항쟁은 분단정부 수립과 미국 패권을 반대하는 당시의 시대 정서를 담고 있다. 그런 정서를 공유하는 육군 14연대의 2000여 장병들이 이 항쟁을 일으켰다.

국제정세에 대해 전문적 식견을 갖고 있었을 정치학자 원충연이 여순사건을 보면서 '군의 정신무장 필요성'을 인식하고 주위 사람들과 함께 동반 입대를 결심했다는 것은 그가 보수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8선을 넘은 당시의 이북 출신들이 진보적 흐름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정서가 원충연에게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박정희와 함께하다

군에 입대한 원충연은 육사 출신은 아니지만 남들 눈에 띌 만한 행보를 걸었다. 미국 참모학교에 유학하고 서독주재 공사관 무관으로 임명됐다. 무관 생활을 마친 직후인 1960년 3월 31일에는 서독 대통령이 수여하는 대십자 무공훈장도 받았다.

그가 박정희와 함께하게 된 것은 이듬해 5월 16일이다. 그는 이날 새벽엔 박정희와 함께하지 않았다. 그가 가담한 것은 쿠데타 주역들이 서울 상황을 장악한 그날 오전이었다. 이때 그는 대변인으로 기용됐다. 1961년 5월 16일 치 <경향신문> 기사 '원충연 대령을 임명'에 다르면, 그가 대변인으로 임명된 사실이 발표된 시각은 5월 16일 오전 10시 30분이다.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바뀐 5월 18일 이후에도 그는 박정희의 '스피커'로 활약했다. 쿠데타에 가담하지도 않은 그가 최고회의의 간판이 된 것은 미국 참모학교 경력과 서독 근무 경력이 참작된 결과일 수도 있다. 쿠데타에 대한 국제사회의 승인이 절실했던 쿠데타 주역들로서는 그의 외국어 실력과 국제 감각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2심 재판을 받고 있는 원충연(X 표).1965년 12월 23일자 <동아일보>.
 2심 재판을 받고 있는 원충연(X 표).1965년 12월 23일자 <동아일보>.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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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원충연은 최고회의에 오래 있지 못했다. 9개월 만에 서울을 떠나 야전부대로 가게 됐다. 1962년 2월 19일 치 <경향신문> 기사 '내외동정'은 "육군본부에서 19일 알려진 바에 의하면 최고회의 공보실장에서 해임된 원충연 대령은 전방 부사단장으로 보직되었다"라고 보도했다.

그 뒤 박정희는 민정이양 약속을 어기고 1963년 10월 15일 대선에 출마했다. 그 뒤에는 국민적 반대를 무릅쓰고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강행했다. 그러는 사이, 원충연은 군부 내 불만세력을 모아 군사정변을 계획했다. 정훈학교 부교장으로 있던 1965년 연초부터 그의 거사 계획이 본격화됐다.

원충연은 상당히 많은 군인들을 규합했다. 이 점은 정변 실패 뒤 함께 구속된 사람들의 면면에서도 드러난다. 1965년 5월 25일 치 <동아일보> 기사 '반정부 음모사건 전모 판명'에 따르면, 제8사단장 장경석 준장, 2군단 포병사령관 박인도 대령, 2군단 작전참모 문원석 대령, 기갑병과 출신의 육군전사(戰史)과장인 이성재 대령, 육군본부 작전상황실장 김문한 중령, 1군 통신가설대장 김득길 중령 등 다수 장교들이 그와 손을 잡았다. 거기다가 민중당 국회의원 김형일을 비롯한 인사들도 다수 가담했다.

원충연은 거사 자금도 어느 정도 마련했다. 1965년 5월 25일 치 <경향신문> 기사 '1월부터 거사 음모'는 "원충연 대령의 주택을 50만 원에 저당, 이를 제1차 비용으로 했으며 나머지는 각자가 분담"했다고 보도했다. 자금을 담당하는 '나머지'는 주로 민간인 참여자들이다. 다른 보도에 따르면, 윤하선 전 내무부 기획조정관 같은 사람은 10만 원을 냈다고 한다.

원충연은 서울 외곽의 군부대를 활용하는 방안을 선택했다. 서울 시내에는 이들의 명령을 따를 야전 부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위 기사에 따르면, 그는 정부 측 응원군의 서울 진입을 막고자 서울 주변 도로를 차단하고 육본 작전상황실장 김문한 중령 등이 허위 상황을 상부에 보고해 정부군을 묶어 놓는 한편, 8사단 등을 서울 시내로 진입시키는 동시에 이성재 대령이 탱크 60대를 이끌고 청와대 앞에서 집중 포격을 가하는 작전을 수립했다. 꽤 대담한 계획을 세운 편이다.

거사 계획 발각... 체포 뒤에도 여유를 보이다 
 
 커피를 마시는 원충연. 1965년 7월 31일자 <동아일보>.
 커피를 마시는 원충연. 1965년 7월 31일자 <동아일보>.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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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와 동지들의 움직임은 사전에 체크됐다. 대화 내용이 녹음되고 있었음은 물론이고 거사 계획서까지 방첩부대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들은 박정희의 미국 방문일인 5월 16일에 맞춰 군사행동을 개시하려 했다. 하지만, 5일 전인 5월 10일 치 신문들에 이들의 체포 소식이 대문짝하게 보도됐을 정도로 일찌감치 거사에 실패했다.

당시 수사기관은 원충연과 그 동지들이 승진 누락 등에 불만을 품고 거사를 계획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1961년 5월부터 9개월간이나 박정희의 '입'으로 있었던 원충연이 1965년까지도 대령 계급장을 떼지 못했으니, 그런 시선을 보낼 만도 했다.

하지만 혁명이나 쿠데타는 기본적으로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벌인다. 중요한 것은 불만을 품었는가 아니라 어떤 명분으로 거사를 준비했는가에 있다. 수사와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원충연은 민정이양 약속을 파기하고 경제까지 파탄 낸 상황에서 박정희가 굴욕적 한일협정을 추진했기 때문에 거사를 일으키게 됐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이런 사실이 당시 언론에도 많이 보도됐다. 시대적 대의를 내세워 군인들을 규합하는 데 성공했으니, 동기 여하에 관계없이 그는 역사학적 조명의 대상이 될 만한 인물이다.

그는 체포된 뒤에 여유와 당당함을 보였다. 공판 중에도 그랬다. 1심 재판 중에 나온 1965년 7월 14일 치 <동아일보> 기사 '웃는 얼굴... 정장(正裝) 피고'는 "원충연 피고도 신문사 카메라맨에게 웃음을 띤 채 손짓하기도 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화장실에 가기도 했다"라고 보도했다. 같은 신문의 7월 31일 치 기사 '태연한 원충연, 커피도 마시고'는 자신보다 적은 형량을 받고도 눈물을 글썽이는 여타 피고인들과 달리 사형선고를 받고도 태연하게 커피를 마시는 원충연의 모습을 소개했다.

실패한 명예회복... 그때도 15년, 지금도 15년
   
원충연은 1948년 당시에는 여순항쟁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그에 대한 반발 심리로 입대했다. 하지만 1961년 5.16 쿠데타 뒤에는 박정희의 민정이양 불이행과 한일협정 강행에 대한 국민적 불만을 배경으로 정변을 준비했다. 그리고 체포된 뒤에도 거사 동기를 당당하게 피력했다. 1948년 이후 남한 땅에서 이만한 장교는 그다지 많이 출현하지 않았다.

1960년대의 원심은 사형을 선고했지만, 위에도 서술했듯이 결국 15년형으로 감형됐다. 51년이 지난 2020년 현재 재심에서 대한민국 사법부 역시 15년형을 선고했다. 법관은 실정법에 입각해 재판해야 하므로 유죄선고가 불가피했더라도, 51년 전과 같은 형을 확정한 부분에 대해서는 한번쯤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촛불혁명을 계기로 박정희 시대에 대한 국민적 재평가가 상당 부분 이뤄진 지금 상태에서, 원충연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이 박정희 시대의 그것을 넘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뜻밖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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