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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진안에서 생태마을공동체 운영을 10년간 하고, 지금은 군산 조촌동 성당에서 사목하고 있는 최종수 신부님이 25일 별세한 고 김종철 선생과의 사연을 보내와 싣습니다. [편집자말]

내 영혼의 별이 떨어진 것일까요? 종종 전화로 안부를 물었던 선생님, 아니 제 인생의 아버지 생태운동가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님이 하늘의 별똥별처럼 떨어졌습니다.
 
 우리나라 대표 생태운동가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이 25일 별세했다. 1947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난 고인은 1970년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1980년부터 영남대 교수로 재직했다. 1972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거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대표 생태운동가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이 25일 별세했다. 1947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난 고인은 1970년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1980년부터 영남대 교수로 재직했다. 1972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거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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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과의 인연은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때 제가 대구녹색평론 사무실을 찾아가 처음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 후로 선생님은 제 삶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2008년 진안 산골짜기로 들어가 만나 생태마을 공동체를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은 그 생태마을공동체의 사상적인 뿌리와 제 삶의 버팀목이 되어주셨습니다. 교구의 도움 없이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막막한 시기였습니다. 함께 농사 지을 땅을 매입하고 함께 살 목조주택 집을 짓고 똥돼지 생태화장실을 만들고 자급자족 농사를 위해 비닐하우스 등을 설치해야 했습니다.

자금이 여의치 않아 모든 것을 직접 해결해야 했습니다. 집짓기도 처음이고 농사도 처음이었습니다. 밤이면 함께 사는 형제가 부항을 해줘야 겨우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그런 날은 새벽에 눈을 떠도 몸을 일으킬 수 없어 다시 부항을 맞아야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은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면 회복이 되었지만 공동체 식구와의 갈등과 외부의 소문은 생태마을공동체를 포기하고 싶은 절망으로 증폭되었습니다. 너무 힘들고 지칠 때, 하소연이라도 해야 살 수 있을 것 같을 때 떠오르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에게 힘과 용기를 주신 분이 김종철 선생님이셨습니다.

생태마을공동체를 포기하지 않았던 버팀목

10년의 생태마을 자급자족 공동체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두 가지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는 프란치스코 교종님 알현이었고, 다른 하나는 김종철 선생님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송금해 주신 후원금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저의 버팀목이 되어주지 않았다면 2~3년 만에 생태마을공동체를 포기하고 성당 신부 생활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힘과 용기를 주신 선생님이 계셨기에 프란치스코 교종님을 알현할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 힘드시죠. 우리 신부님이 큰일을 하고 계십니다. 농촌이 희망입니다. 생태적인 삶, 자급자족 생태공동체가 대안입니다. 흙과 함께 단순소박하게 사는 것이죠. 내가 도울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통장 번호 문자로 주이소."

며칠 뒤 핸드폰에 송금 문자가 떴습니다. 블루베리 모종을 손질하고 새참을 먹을 때였습니다. 문자를 확인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금액이 너무 많았습니다. 두 눈을 믿을 수 없어 손가락으로 숫자를 하나씩 짚어가며 확인했습니다. 일십백천만십만백만천만... 다시 믿을 수 없어, 일십백천만십만백만천만... 이렇게 세 번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아버님 감사합니다. 왜 그렇게 많은 후원을 하셨어요. 녹색평론 발행도 쉽지 않는데요. 너무 큰 금액이라 손가락을 짚어가며 세 번이나 확인했어요. 아버님 큰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아버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아이고 그리 많지 않아요. 생태마을 초창기에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하겠나. 밑 빠진 독에 물 붇기 아닌가요. 종자돈 알지요. 힘내고 용기 내라고 보낸 겁니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바치시는 부모님, 그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을 아는 자식이 부모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그 어떤 어려움도 고난도 이겨냅니다. 김종철 선생님은 저에게 그런 아버지셨습니다.

남은 제 삶, 선생님의 유언으로 지탱하겠습니다
 
김종철 선생님과 함께  서울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눌 때
▲ 김종철 선생님과 함께  서울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눌 때
ⓒ 최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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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정국 때 전북지역 4대 종단 성직자들이 광화문 집회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며칠 전 선생님께 안부전화를 드렸습니다.

"아버님, 건강은 어떠세요. 이번 토요일 광화문 집회에 갑니다. 근데 아버님, 4대 종단 성직자들이 연단에 올라 남행열차 개사곡인 박근혜 호송열차를 노래하기로 했어요. 아버지, 저희들 저녁밥 맛난 것 사주세요. 막걸리도 한 잔 사주시고요."

프레스 센터 뒷골목에서 김치찌개에 막걸리까지 마시게 되었습니다. 식사 후 연단에 올라 남행열차 개사곡 호송열차를 신명나게 불렀습니다. 그 후로도 몇 차례 광화문 집회현장에서 만났습니다. 초겨울 쌀쌀한 날씨 선생님과 팔짱을 끼고 거리행진을 했습니다. 

선생님 성격에 쑥스러우실 법한데 아무렇지 않게 구호를 외치며 시위대를 함께 따라 갔습니다. 선생님과 팔짱을 끼다니, 20년 가까이 소통한 정이 만든 아름다운 동행이었습니다.

간디가 비폭력 평화주의자라면, 선생님은 생태평화주의자 간디였습니다. 제 삶의 진로를 결정해야 할 때, 절망하고 포기하고 싶을 때, 이정표가 보이지 않고 시대의 빛을 읽을 수 없을 때, 하소연이라도 해야 할 때, 선생님은 제 인생의 스승이자 아버지이셨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앞으로는 어찌해야 합니까.

코로나 사태를 진단하신 말씀이 유언으로 제 삶을 지탱할 것입니다.

"생태계 훼손을 막고, 맑은 대기와 물, 건강한 먹을거리를 위한 토양의 보존과 생태적 농법 그리고 무엇보다 단순·소박한 삶을 적극 껴안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공생의 윤리를 부정하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면역력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탐욕이라는 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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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 기자는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일꾼으로, 불평등한 소파개정 국민행동 공동집행위원장으로 2000년 6월 20일 폭격중인 매향리 농섬에 태극기를 휘날린 투사 신부, 현재 전주 팔복동성당 주임신부로 사목하고 있습니다. '첫눈 같은 당신'(빛두레) 시사 수필집을 출간했고, 최근 첫 시집 '지독한 갈증'(문학과경계사)을 출간했습니다. 홈피 http://www.sarang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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