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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에  참전한 고 노재관 이병의 이복동생 노재완씨가 24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슈퍼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신체 건강했던 형이 군에 입대한 지 54일 만에 돌아가셨는데 병사처리된 것에 대해 억울함을 토로했다.
 6.25 전쟁에 참전한 고 노재관 이병의 이복동생 노재완씨가 24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슈퍼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신체 건강했던 형이 군에 입대한 지 54일 만에 돌아가셨는데 병사처리된 것에 대해 억울함을 토로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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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27일 오전 10시 28분]

전쟁터에 내던져진 스물두 살의 이등병. 그는 사진 한 장조차 남기지 못한 채 입대 54일 만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6.25전쟁 발발 한 달 후인 1950년 7월 15일, 청년 노재관(1929년생)은 군에 징집됐다. 제1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 그는 '이병 노재관'이 되어 제6사단 제7연대에 속해 여러 전투를 치렀다. 하지만 최말단 이등병은 전쟁터의 소모품이 되고 말았다. 노 이병은 같은 해 9월 7일 낙동강 방어선이었던 신녕전투 도중 세상을 떠났다.

노 이병이 소속된 제6사단은 6.25전쟁 초기 춘천 방어 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냈다. 한국전쟁문학협의회장인 박경석 장군(예비역 준장)의 설명이다.

"북한 남침전략의 기본은 제1군단이 수도 서울을 공격하고 제2군단이 동해안 공략과 함께 춘천을 점령한 뒤 이천을 경유해 수원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후 두 개 군단이 서울을 포위해 국군을 섬멸하고 남진을 계속해 적화통일을 달성하려고 했다. 제1군단의 수도권 공략은 조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국군 김종오 대령이 지휘하는 제6사단의 조직적인 방어작전으로 제2군단의 춘천 공략이 지연됐다. 제1군단은 제2군단과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공격속도를 늦췄는데 이것은 북한의 결정적 실책이었다. 제1군단의 공격이 계속 이어졌더라면 우리의 후방 3개 사단이 전선에 투입되기 전에 한강 이남 지역의 조기 장악이 가능했을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
  
▲ 고 노재관 이병 유가족 “6.25 전쟁 입대 54일 만에 전사했는데 병사로 처리”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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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무서운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목숨이 무엇과도 바꿀 수 있는 부품이 돼버리기 때문이다. 역사는 노 이병보다 제6사단을 기억한다. 제6사단보다 국군을 기억하고, 국군보다 대한민국을 기억한다. 전장 위의 노 이병은 몇 십만 분의 1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노 이병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있는 '노재관' 그 자체였다. 사람 하나, 하나가 우주라고 하지 않나. 노 이병의 가족은 노 이병을 잃으며 우주를 잃었다.

노 이병의 유골은 작은 항아리에 담겨 청주 고향집에 전해졌다. 어머니는 정신병을 앓다 4년 만에 목숨을 잃었고, 아버지 역시 삶을 포기한 채 술로 세월을 보냈다. 현재 노 이병의 유족은 그의 이복동생 노재완(64)씨가 유일하다. 24일 오전, 노씨가 운영하는 서울 영등포구의 작은 슈퍼에서 그를 만났다.

"큰어머니(이복동생인 노씨는 노 이병의 생모를 큰어머니라고 불렀다)는 그때 말로 미쳐서 돌아가셨다고 그러더라고요. 스물두 살 자식을 떠나보냈는데 나 같아도 미쳐버리죠. 형님이 삼대독자였는데 그땐 또 그런 게 엄청 중요했던 구닥다리 시대였잖아요.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환장하는 거죠."

그럼에도 국가는 그의 죽음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노 이병의 사연이 더 안타까운 것은 이 때문이다.

"큰어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우리 어머니와 재혼을 하셨죠. 그리고 저를 낳았고요. 아들이 생겨서인지 아버지가 힘을 좀 내셨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때부터 청주에 있던 병무청을 쫓아다닌 거예요. 그런데 형님이 '병사(병으로 죽음)'한 것으로 나와 있다는 거예요. 아니 입대한 지 두 달도 안 된 분이 병사라니요. 억울해하던 아버지가 병무청에 몇 번을 드나들어도 똑같았어요. 결국 전사가 아닌 병사라며 어떤 보상도 못 받으셨죠. 그러다가 제가 열다섯살 때 돌아가시고 말았어요."

죽음의 고통은 남은 자에게 전이됐다. 아버지의 삶도, 노씨의 삶도 참 기구했다.

"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때 세 번이나 강제징용을 다녀오셨더라고요. 다녀오셔선 그렇게 아들도, 아내도 잃으셨잖아요. 저 태어난 이후에도 정말 어려웠어요. 밥 굶는 건 허다했고, 소금 끓인 물을 겨우 먹기도 하고... 뭐든 주면 먹고, 없으면 배고프다고 울고 그렇게 살았죠. 근데 아버지는 아들 한도 못 풀어주고 보상도 못 받고 돌아가셨잖아요. 그 생각하면 참..."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 유족도 몰랐던 증거 발견
 
6.25 전쟁에  참전한 고 노재관 이병의 이복동생 노재완씨가 지역 소식지에 군에서 발생한 억울한 사망사고에 대해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가 진정서를 받는다는 기사를 보고 진정서를 접수했다.
 6.25 전쟁에 참전한 고 노재관 이병의 이복동생 노재완씨가 지역 소식지에 군에서 발생한 억울한 사망사고에 대해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가 진정서를 받는다는 기사를 보고 진정서를 접수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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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겪었던 한을 가슴 속에 품고 살던 노씨는 지난해 영등포구의 한 지역 신문을 통해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아래 위원회)'의 존재를 알게 됐다. 2018년 특별법 제정으로 만들어진 위원회는 "군에서 발생한 사망사고 중 의문이 제기된 사건에 대해 진상을 명확히 규명하고 그 관련자의 피해와 명예회복, 나아가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회복과 인권증진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노씨가 지난해 12월 진정서를 내자 위원회는 조사에 들어갔다. 그런데 조사 과정에서 노씨는 허탈한 소식을 듣게 됐다. 노 이병의 위패가 이미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져 있었던 것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쓴 호국전몰용사 공훈록에도 그가 신녕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심지어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비에도 노 이병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상황이었다.

위원회는 노 이병의 몇몇 군 기록에 오류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다. 위원회는 결정문을 통해 "망인(노 이병)은 6.25전쟁 기간 북한군과의 전투 중에 전사한 사실이 확인되는데 사망기록의 오류 또는 불명확한 기록으로 그 사실이 누락돼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라며 "군의 잘못으로 인해 (전사한 노 이병의 사인이) 단순 병사로 처리되어 망인 및 유족들은 명예회복 및 어떠한 적절한 보상도 받지 못했다"라고 지적했다.

노 이병의 이름이 현충원과 전쟁기념관에 새겨져 있다는 것은 노씨는 물론, 돌아가신 아버지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노 이병 전사 70년 만에 유족이 그 사실을 알게 된 셈이다. 노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 사실을 아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며 "군대에서 얼마나 허술하게 관리했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나"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벽을 넘었지만 또 벽
 
6.25 전쟁에  참전한 고 노재관 이병의 이복동생 노재완씨가 24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슈퍼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형의 위패가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직접 방문해 찍은 위패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고 노재관 이병은 전몰자명부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상에는 전사로 기재되어 있으나, 기본 병적 사항에는 6.25 전쟁 중 1950년 9월 7일 병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전사자로서의 적정한 보상과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6.25 전쟁에 참전한 고 노재관 이병의 이복동생 노재완씨가 24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슈퍼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형의 위패가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셔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 직접 방문해 찍은 위패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고 노재관 이병은 전몰자명부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상에는 전사로 기재되어 있으나, 기본 병적 사항에는 6.25 전쟁 중 1950년 9월 7일 병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전사자로서의 적정한 보상과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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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노 이병의 죽음이 전사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노씨가 넘어야 할 산은 또 있다. 위원회가 "망인의 사망을 전사로 재심사하라"는 내용의 결정문을 국방부에 넘겼지만, 정작 진정을 넣은 노씨는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할 처지에 놓여 있다. 국방부에서 '전사'로 최종 확정하더라도, 군인연금법에 따라 직계존·비속(조부모, 부모, 자녀, 손자, 증손 등 직계로 이어지는 혈족)만 보상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영수 위원회 조사2과장은 "당초 군인사망급여금규정에 따르면 형제·자매도 보상금을 수령할 수 있었다"라며 "하지만 1973년 6월 이 규정이 군인연금법으로 바뀌며 보상금 수령 대상에서 형제·자매가 빠져버렸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민법상 국가의 책임에 따른 보상받을 권한도 상속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유족의 입장에서) 국방부로부터 보상금 혹은 민사 소송을 통한 국가배상금을 선택할 수 있는데, 후자는 형제·자매를 인정하고 있다"라며 "현행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에서도 형제·자매를 보상 대상으로 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현행 군인연금법은) 위헌 소지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노씨는 한숨을 내쉬며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

"아버지 살아 계실 때 다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였잖아요. 저 어릴 때 아버지가 보상이라도 좀 받았으면 그렇게 어렵게 살진 않았을 거잖아요. 군대의 실수로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네요. 이미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남은 저는 형제라고 보상해주지 않는다고 하면 납득이 되겠어요? 어휴, 다시 진정서를 내보는 거죠."

덧붙이는 글 |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진정 접수 기한은 2020년 9월 13일까지이다


태그:#6.25전쟁,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노재관 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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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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