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23 14:55최종 업데이트 20.06.23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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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을 다녀왔다. 코로나19 때문에 서울 집과 사무실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오랜만에 동해 바다의 시원한 수평선을 보았다. 여행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단오 축제의 하나로 단오 창포주 품평회 심사차 다녀왔다.

이번 강릉행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품평회 심사를 함께 진행한 김상현씨의 강릉 브루어리에 다녀온 것이었다. 그와 품평회 심사를 여러 해 함께 했지만 긴 얘기를 나눌 겨를이 없었다. 그가 두어 해 전에 양조장을 차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막상 가보지는 못했다. 미안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여 가 보았다.
 

강릉에 있는 양조장펍 강릉브루어리. ⓒ 막걸리학교

 
강릉 브루어리는 강릉원주대학교 앞의 율곡초교길 음식거리 안쪽에 있었다. 양조장과 주점을 함께 운영하는 양조장펍으로 천장 높은 건물의 1층에, 100평 정도 공간에 자리잡고 있었다. 놀랍게도 맥주 제조장과 막걸리 제조장이 함께 들어 있었다.

매장의 천장 밑 벽면에는 막걸리 제조공정과 맥주 제조 공정이 나란히 그림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한쪽 유리벽면 안에는 밑이 뾰쪽한 500ℓ와 1000ℓ 스테인리스 발효통이 보기 좋게 들어서 있었다.
 

발효통을 배경으로 맛보기용 술을 맛보다. ⓒ 막걸리학교

 
주문대에서 맛보기용 술 4잔을 주문하는데 맥주 3잔에 막걸리 1잔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소규모 주류 제조장 안에 맥주와 막걸리 면허를 동시에 낸 곳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내가 말로만 떠들고 있는 것을, 김상현씨는 실제 구현하고 있었다.

막걸리학교를 운영하는 나의 지론은 막걸리 제조장에 맥주 제조장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막걸리가 부족하거나, 맥주를 탐해서가 아니다. 논리를 펴자면 이렇다. 와인은 과일로 만든 술이고 비어는 곡물로 된 술이다. 맥주가 유럽의 보리 막걸리라면, 막걸리는 아시아의 쌀 비어다.


쌀과 보리가 공존하는 것처럼, 막걸리 제조장에 맥주 제조장이 있어야 한다. 마치 양손을 쓰듯이 두 가지 양조 기술을 가지고, 그 문화를 즐기고 경영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땅에도 보리가 나기 때문이고, 홉을 재배할 수 있기 때문이고, 발효의 원리가 상통하기 때문이고, 맥주를 한 해에 4조 원어치나 마시기 때문이다.

강릉 브루어리의 막걸리는 신맛이 돌았는데, 그 신맛이 입안에 오래 남지 않았다. 탁한 화이트 와인같기도 하고, 신맛이 돌고 뿌연 벨기에 밀맥주를 닮아있기도 했다. 메뉴판을 보니, 강릉 막걸리인데 스파클링 라이스 와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강릉 오륜미를 사용하는데, 효모를 사과에서 분리 추출하여 양조하고 있었다.

효모를 사과에서 분리 추출한다니, 이건 또 무슨 이야기인가? 나는 김상현 대표에게 효모를 누가 분리하냐고 물었다. 그는 강릉 브루어리에서 자신이 직접 과일이나 식물에서 분리 배양해서 사용한다고 했다.
 

전통주와 맥주를 함께 제조하고, 함께 맛볼 수 있는 양조장펍. ⓒ 막걸리학교

 
메뉴판을 다시 보니 효모를 분리해서 만든 맥주가 네 종류가 있었다. 대관령 필스라거는 강릉 배에서, 호랑이와 곶감 팜하우스 에일은 강릉 곶감에서, 하트하트 페일에일과 오명월 팜하우스 에일은 강릉의 솔잎과 곶감과 배에서 효모를 분리 배양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그의 부지런함과 치밀함에 다시 한번 놀랐다.

효모를 분리해서 쓰려면 효모 배양기 등을 갖춰야 한다. 적어도 3~4평의 분석실이 필요하고, 2천만 원 정도의 장비 구입비도 들어간다. 연구자가 과학적인 훈련도 되어 있어야 하고, 효모가 부리는 향과 맛의 조화를 잘 감지해야 한다.

그는 일반 양조장에서 효모를 분리해서 쓰지 않는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꼽았다.

"지역 사회에서 직접 분리 배양한 자연 효모를 사용했다가 술이 망치게 되면,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두세 번 반복하게 되면, 고용된 양조인은 옷을 벗어야 합니다. 판매되는 외국 효모가 많이 있는데, 굳이 새로운 도전까지 하는 양조인은 그래서 찾기 어렵습니다. 두 번째로 자연 효모를 사용하게 되면 초기에 효모가 안정화되기까지 신맛이 도는 것을 감내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효모를 배양하여 쓰는데 2주일이 걸리고, 배양한 효모를 안정화시키고 힘을 키우는데 3개월 정도가 걸린다고 했다. 연구실이 있고 연구원들이 일하는 큰 양조장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주점까지 운영하는 소규모 주류제조장에서, 그것도 맥주와 막걸리를 함께 빚는 양조장에서 진행하다니, 그의 부지런함과 치밀함이 놀랍기만 했다. 부드러운 그의 미소 속에, 둥글게 닳은 손톱과 굵어진 팔뚝이 눈에 들어왔다.
 

강릉브루어리 매장 안의 모습. ⓒ 막걸리학교

 
브루어리 홍보 홈페이지가 있냐고 물었더니, 그는 없다고 했다. 창업하고 2년이 되었지만 홍보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했다. 어떻게 술을 만들면서 자랑하지 않은 배짱은 무엇이란 말인가?

홍보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물었다. 내 술을 만들고서 홍보하고 싶었다고 했다. 내 술이란, 내가 추출한 효모, 강릉 지방의 특성이 반영된 천연 효모를 사용하는 것을 뜻했다. 지금껏 바빠서 효모까지 챙기지 못했는데 이제는 효모를 분리하여 술을 빚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좀 홍보하겠다고 했다.

그는 지역 양조장들이 지역 야생효모를 사용하면, 똑같은 제조법이라 하더라도 다른 맛과 향을 구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독일맥주 회사는 10%가, 미국 맥주회사는 2%가 효모를 직접 분리 배양하여 술을 빚고 있으니, 우리나라도 미국 수준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전통주는 효모를 어떻게 쓰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한동안 허공을 바라보아야 했다. 효모를 분리해서 사용하기 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눈앞을 스쳐갔기 때문이다. 양조장들이 차별화를 위해서는 누룩을 직접 만들어야 하는데, 누룩을 직접 만드는 회사들이 줄어들고 있다. 지역 균주는 제쳐두더라도 지역 농산물을 사용해야 하는데, 가격 경쟁에 나서면서 저렴한 수입 농산물을 당연하게 사용하는 곳도 많다.

강릉 브루어리에 앉아 메뉴판에 있는 술들을 한 잔씩 맛보았다. 술맛들이 싱겁거나 흐트러지지 않고, 개성있게 잘 뭉쳐 있었다. 한 잔 한 잔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만드는 사람이 스스로 검열하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아슬아슬한 맛을 지키고 있었다.

직원 하나를 두고 자신이 직접 감당하고 있으니 그 힘은 또 어디서 나올까 신기했다. 주방과 홀을 분주하게 오가는 그를 바라보며 이상주의자이거나 마르지 않은 금고가 있거나 둘 중의 하나일 거라는 상상을 했다. 잠시 후 돌아온 그는 잔잔한 목소리로 "감미료를 사용하면 술맛이 비슷해져 버리기 때문에, 우리 술들도 감미료만이라도 벗어났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강릉 사람들은 뒤에 대관령을 등지고 앞으로 넓은 바다를 내다보고 사니, 자부심이 크다고들 말한다. 강릉 여자들이 생활력이 강하고, 강릉 사람들이 넉넉하고 통 크게 세상을 보는 눈이 있는 줄 알건만, 강릉 사람도 아닌 김상현 대표가 강릉에 살더니 세상을 통 크게 바라보는 법을 배운 게 아닐까? 내 짐작이 맞는지 틀린지, 다음에 강릉에 오면 그에게 꼭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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