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25 08:07최종 업데이트 20.06.25 08:07
  • 본문듣기
 

ⓒ 연합뉴스

 
지난 주 생면부지 두 병사의 아버지 직업을 알게 되었다. 한 사람의 아버지는 천막 사업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의 아버지는 신용평가사의 임원이라 한다. 나는 두 병사의 이름과 사는 곳을 알지 못하고,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모르며, 말 한마디 섞어 본 바 없지만, 아버지가 무엇 하는 사람인지는 알게 되었다. 괴이한 일이다.

세상에는 남의 부모님 직업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 군대라고 다를 것이 있으랴. 2016년 여름 군인권센터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육군의 한 신병교육대에서 훈련을 마치고 퇴소한 병사였다. 훈련소 입소 첫 날 이상한 질문을 받았다는 것이 제보의 요지였다. 훈련병들이 한데 모여 신상명세를 적고 있는데 조교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훈련병들 중에 아버지가 영관급, 5급 공무원 이상, 언론 또는 대기업 임원으로 있는 병사들은 다 적습니다."

대체 부모의 직업이 훈련과 무슨 상관이 있기에.

조교의 부적절한 질문은 언론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국방부는 공개적으로 장병 부모의 직업을 확인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그러나 이후로도 비슷한 제보는 종종 접수되었다.

사실 이런 식으로 대놓고 VIP 자제를 찾지 않더라도 간부들은 병사들의 생활지도기록부만 열어보면 부모의 직업을 알 수 있다. 기록부에 부모 직업을 쓰는 칸이 있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장병의 부대 적응을 돕기 위해 면담 과정에서 부모 직업을 묻는다고 한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해명인데 그 답을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지금은 도움·배려 병사로 이름이 바뀌었고 선정 기준도 달라졌지만, 2015년까지만 해도 군에는 '관심병사' 제도가 있었다. 부대 적응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어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하는 병사를 별도 관리하는 제도인데 몇 가지 기준을 세워놓고 A, B, C급으로 분류했다. 

당시 B급 관심병사의 선정 기준에 '결손 가정'이 있었다. 한부모 가정이거나 조손 가정에서 자란 병사가 여기에 해당한다. '정상 가정'에서 자라지 못한 아이가 부대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리라 본 것이다. 황당한 편견이 아닐 수 없다. 간부는 주기적으로 관심병사를 관찰하며 면담을 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때마다 불러 앉혀놓고 지나간 가정사라도 되짚어봐야 하는 것인가. 

이 기준은 2014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지적당한 뒤 2015년 관심병사 제도가 도움·배려 병사 제도로 개편될 때 함께 사라졌다.

계급과 신분 혼동하는 군

부대 적응을 돕는다는 미명 하에 부모 직업을 묻고, 가족의 형태를 따지는 인식의 저변에는 직업에 귀천을 두고, 경제력과 존재의 정상성이 사회적 위치를 규정하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계급과 신분을 혼동하는 우리 군의 왜곡된 계급 의식이 뒤섞여 있다. 

우리 군은 임무와 책임에 따라 나눈 장성과 장교, 부사관, 병사의 계급 시스템을 신분 제도로 오인한다. 밥 먹는 식당이 계급에 따라 구분되고, 이용할 수 있는 복지시설이 계급에 따라 다르다. 계급이 오를수록 늘어나는 것은 책임이어야 하는데 그보다 먼저 따라오는 것은 허황된 권위와 의전이다. 

계급뿐인가. 출신이 사관학교인지, 학군단인지, 학사인지를 따져 오를 자리를 미리 정해두는 '골품' 질서 속에 비육사 출신 4성 장군은 21세기에도 뉴스거리가 된다. 육·해·공군사관학교의 수석을 여생도가 하는 세상이지만 대부분의 여군이 보직 제한의 유리 천장 앞에서 좌절한다. 군은 이렇게 거대한 저울을 가져다 놓고 계급·출신·성별 등등의 무게추로 사람의 가치를 달아본다. 

그러니 병사라고 다를 것이 있겠는가. 너도 나도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러 똑같이 군에 왔지만, 입대와 동시에 저울에 달려 사회·경제적 처지에 따라 촘촘하게 짜인 무게추로 인간됨의 무게를 평가 받는 것이다. 

소위 '황제 병사'로 불리며 간부에게 물 심부름, 빨래 심부름을 시키고 1인 생활관을 사용했다는 신용평가사 임원의 아들과 여단장실에 끌려가 불필요한 인격 모독을 당하며 아버지의 직업을 질문 받은 천막업자의 아들.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와 국민의 공분을 자아낸 두 사건의 근원이 모두 여기에 있다. 사람들의 분노는 상황을 뒤집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여단장실에서 혼난 병사가 아팠다면 황제 병사처럼 후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을까?'
'황제 병사가 잘못을 저질렀어도 여단장실에 끌려가 모욕을 당했을까?'

그리고 이 두 질문이 바로 대한민국 국군의 현주소다. 대한민국 헌법은 신분 질서를 부정한다. 그런데 헌법에 따라 국민을 외적으로부터 방비할 군은 대놓고 신분 질서에 터 잡아 조직을 건사한다. 이 구조를 깨지 못하면 비슷한 일은 양상을 바꾸어 반복될 수밖에 없다.

2019년부터 상시 근무자 30인 이상의 사업장에서는 '채용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에 따라 취업 면접과 서류에서 부모님의 직업을 물어볼 수 없다. 2016년 우병우 전 민정수석의 아들과 관련한 보직 특혜가 논란이 되면서 고위공직자 자녀의 병역 이행 여부뿐 아니라 보직 이력도 함께 공개해 병역 특혜의 폐단을 끊어내자는 주장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군은 언제쯤 바뀔 생각인가. 국민들은 더 이상 생면부지 병사들의 부모에 대해 알고 싶지 않다.
덧붙이는 글 김형남 기자는 군인권센터 사무국장입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