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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다. 그 전쟁을 주도했던 많은 주역들은 이미 사라졌다. 그 전쟁을 경험하고 기억하는 수많은 이들 또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있다.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식민지배보다 큰 비극이었던 분단과 전쟁. 이 이야기는 그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온 한 소년의 경험과 성장기다. 이 사건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증언을 해준 이철옥의 이야기는 소박하지만 진솔하다. 높고 고창한 관념의 말이 아니라, 개인의 경험에서 길어 올린 구체적 삶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다. - 기자 말
 
 2019년 6월 24일, 문재인 대통령의 오른편에 있는 이가 이철옥이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47년 함경남도에서 출발, 한탄강의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그의 길은 분단의 길, 전쟁의 길이기도 했다.
 2019년 6월 24일, 문재인 대통령의 오른편에 있는 이가 이철옥이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47년 함경남도에서 출발, 한탄강의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그의 길은 분단의 길, 전쟁의 길이기도 했다.
ⓒ 청와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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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장의 사진을 건네받았다. 내가 사는 동네(서울 성동구) 보훈회관에서 만났던 6.25참전유공자회(성동구) 회장 이철옥 선생(아래 이철옥 회장)으로부터다. 참전 유공자인 그는 지난 2019년 6월 2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국군 및 유엔군 참전유공자 초청 오찬'에 참석했다. 그는 당시 문재인 대통령 바로 오른편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문 대통령은 1953년 1월 24일, 경남 거제 명진리 출생이다. 그의 부모는 함경남도 사람들. 1950년 12월 15일부터 24일까지 열흘간 진행된 흥남철수작전 때, 거제도로 탈출했던 피난민들이었다. 문 대통령은 2017년 6월 28일 미국 국빈 방문 당시, 첫 방문지로 버지니아주 콴티코 국립 해병대 박물관의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찾은 바 있다.

대통령은 그곳에서 1950년 미 해병1사단이 장진호 전투를 통해 적(중공군·북한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면서 흥남철수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음을 상기했다. 당시 남으로 향하는 배를 향해 한겨울 차디찬 바다로 뛰어든 수많은 피난민들의 존재는 참전 유엔군들이 피할 수 없는 질문, 즉 '왜 이국땅에서 우리가 피 흘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명백한 답변이기도 했다.

그 시기인 1950년 12월 말, '소년 이철옥'은 인천항에 있었다. 1951년 서울 1.4후퇴가 있기 전이었다.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피난민이 흥남부두의 그들처럼 필사적으로 배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가 탄 배가 떠나고, 부두는 화염과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후퇴한 자리엔 적들이 채워지거나, 또는 적들이 가져가선 안 될 물자나 시설이 있기 때문일 터였다. 소년 이철옥이 탄 배가 닻을 내린 곳은 제주였다.
 
"우리는 높고 거창한 관념들로 나아감으로써 진실을 나눠 가질 수 있을 거라고 믿지만, 생명수가 우리 삶을 채우는 건 자신의 경험의 샘으로 깊이 내려가서 이야기를 길어 올릴 때뿐입니다." - 파커 파머 

그와 대화를 나누며 이 문구가 떠오른 것은 아마도 절박해서였을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의 함의는 그 시대를 겪어 경험한 이들의 기력과 기억이 쇠해 곧 소멸할 것이라는 점에도 있었다. 우리가 아무리 높게 '항구적 평화와 남북 공동의 번영'을 지향할지라도, 그 발밑에는 '경험의 샘에서 길어 올린 생명수'같은 이야기를 디디고 있어야 한다. 그게 내가 이철옥 선생을 다시 찾아간 이유였다.   

강화도에서 맞은 6.25, "전쟁 났으니 피하라"고들 했지만... 
 
 청년에서 아흔 앞둔 백발의 노인으로. 1947년 소년 이철옥(사진)은 어머니의 손을 붙들고 삼팔선을 넘었다. 그게 모자 간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왜 그를 남에 두고 돌아갔나? 그게 이철옥에겐 평생의 질문이었다.
 청년에서 아흔 앞둔 백발의 노인으로. 1947년 소년 이철옥(사진)은 어머니의 손을 붙들고 삼팔선을 넘었다. 그게 모자 간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왜 그를 남에 두고 돌아갔나? 그게 이철옥에겐 평생의 질문이었다.
ⓒ 이철옥,원동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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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1950년 6.25 전쟁이 발생하던 당시 어디에 계셨어요?
"나는 그때 강화도에 있었어요. 당시에도 최전방이었어요. 북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으니까. 당시 그곳은 17연대가 경비를 서고 있었어요. 개성이 우리 땅이었거든, 거기와 연백군 일부하고... 그날, 일요일이었는데 비가 올 것처럼 아주 캄캄했다고. 그리고 새벽에 무슨 불이 번쩍번쩍 하길래 나는 천둥이 치는 줄 알았어. 나중에 보니까 그게 김포 문수산성쪽에 북한군이 포격을 한 거였어요."

- 그래서 피난을 가셨나요? 
"날이 밝은 뒤에 보니까, 일부는 벌써 피난을 갔어요. 경찰서고 뭐고 다 없어졌어. 왜 그러냐면 지금 강화는 다리가 놓여 있지만, 그때는 없었거든. 배가 없으면 아무 데도 못가요. 그래 갑곶(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서 다시 외포리로도 가봤는데 거기도 마찬가지야. 외포리엔 연평 황해도 (조기)배들이 엄청 많았어요. 근데 다 떠나 버렸어. 일부 몇 척만 바다 복판에 닻을 내리고 앉았어요. 소도 다 태웠더라고.

근데 사람들 접근할까봐 배를 띄운 거지. 강화읍에서 후퇴하는 우리 군인들을 봤어요. 뗏목을 만들어 타고 그 강하고 갯벌을 건너온 거예요. 군복은 다 벗어 버리고, 농촌 핫바지 저고리 입고 온통 뻘 투성이야. 그래도 총을 너댓 자루씩 묶어 걸머쥐고 온 거예요. 저한테 '어서 피난가라, 전쟁이 났다' 그러는데, 갈 도리가 없잖아요. 난 나이도 어렸지."

- 강화도에서 고립된 채 전쟁을 맞으셨군요.
"그랬어요. 근데 날이 또 밝으니까 내 친구 누나들과 형들이 완장을 차고 나온 거예요. 민청(조선민주청년동맹)이라고. 사전에 다 조직이 된 건데 우리한테 해방군이 들어온다고 '피난 가지 말라' 그래요. 좀 있으니까 북한군이 들어와요. 사열종대로 첫줄에 정규군, 바로 뒤에 전투경찰 같은 사람들이 서고... 장비는 비슷한데 모자가 서로 달라요. 강화읍 초등학교에 진을 쳤어요. 강화에 고려산 하고 혈구산이 있기에 나는 거기로 피했어요."

소년 이철옥은 혼자였다. 부모 형제가 없었다. 1947년 4월께, 당시 소련군과 북한군이 경계하던 38선 넘어 월남한 지 3년쯤 되는 때였다. 어머니는 그를 남쪽에 데려다준 뒤 다시 북으로 돌아갔다. 북쪽에 형과 누나들이 남아 있었다. 그 뒤로 전쟁과 휴전, 철책으로 가로막힌 분단의 땅에서 이철옥의 삶이 펼쳐진다.

그런 이 선생을 내가 처음 만난 건 2019년 5월 14일이었다. 성동구에서 발행하는 소식지의 인터뷰 대상자가 6.25 참전유공자회 성동구지회였고, 그가 회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포함해 다섯 명 베테랑들과 대화를 했다. 

"우리 동지들은 평균 나이가 여든 살 아홉 살입니다. 내가 제일 어려요. 여기 동지들 모두 스무 살이 채 안 된 앳된 몸으로, 광목천 군복과 철 바가지와 탄띠와 소총만 메고, 함께 전쟁에 나섰어요. 다른 곳에서, 다른 나이에, 다른 병과에 있었지만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싸웠어요. 나라와 국민을 지키겠다고." (이철옥)
  
제일 오른편부터 이철옥, 김형각, 안형근, 이형귀, 김학철.  모두 스무 살 이전에 6.25전쟁에 참여했던 베테랑들이다. 2019년 5월 14일, 성동구 보훈회관.
  제일 오른편부터 이철옥, 김형각, 안형근, 이형귀, 김학철. 모두 스무 살 이전에 6.25전쟁에 참여했던 베테랑들이다. 2019년 5월 14일, 성동구 보훈회관에서 찍은 사진이다.
ⓒ 원동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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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올해 이들의 평균 나이는 아흔이 됐다. 2019년 이전에도 이미 많은 참전유공자가 죽었지만, 앞으로는 더욱 가파른 속도로 사라질 터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들은 절박하게 자신들의 경험과 기억을 전달하고자 애썼다. 하지만 설 자리는 많지 않았다. 어쩌면 지겹도록 들어온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올해엔 코로나19가 결정적으로 만남을 막았다.

한 해가 지난 뒤 올해 다시 이철옥 선생을 찾았다. 그는 하나의 질문을 던지면 언제나 더 오래, 멀리까지 가는 경험을 이야기해줬다. 카메라를 옆에 두고 지난 4월 17일 인터뷰를 진행했다. 지난 5월 8일~10일에는 그가 1947년~1956년까지 발 디딘 곳을 함께 누볐다. 그의 몸과 함께 사라질 경험의 샘이 말라버리기 전에... 이 인터뷰들은 그 모든 이야기들을 다시 누벼 꿰맨 기록이다. 

열네살 아들에게 "너도 남으로 가라"던 어머니... 그게 마지막이었다

- 1945년 북한에서 광복을 맞으신 거죠?  
"나는 1934년생. 고향은 함경남도.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됐잖아요. 얼마간은 좋았어요. 근데 곧 해방군대 지폐라고 돈이 바뀌었어요. 중국의 문화혁명 같은 바람이 불은 거예요. 당시 우리 아버지가 시골 산골짜기서 농사를 지었다고. 그런데 내 땅 가지고 지었기 때문에 지주 딱지가 붙었어요. 아버지가 목수이기도 하셔서 집도 잘 지었다고. 다 초가집인데 우리만 기와집, 그러다 보니 부르주아가 된 거지. 어느 날 나라에서 봉투가 하나 와요. 몇날 며칠까지 짐 싸 놔라. 그럼 그걸 다 갖고 가 버리는 거예요. 내 소유는 아무것도 없어. 집도 내 것이 아니여. (나라 전체를) 집단지도체제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 1947년에 가족들과 이별하셨다고요.
"어머니가 제게 그러셨어요. '이제 여기선 못 산다.' (어머니는) 시골 할머니였는데도 이미 아신 거지. 저한테 '이웃에서 친척이 남으로 간다는데 너도 같이 가라'고."

이철옥은 아홉 살 때 부친을 잃었다. 위로는 형과 누나들이 있었다. 막내였던 그는 1947년 당시 초등학교 4학년. 아홉 살에 입학한 그는 열두 살 때 엄마 손을 잡고 고향을 떠난다.

"당시 이북에 나랑 단짝이 있었어요. 학교 가면 맨날 체제 선전만 하니까 걔도 그 사회를 싫어했다고.  그 친구가 (보기에도) 이제 한심한 거죠. 그 친구보고 내가 그랬어요. '내가 삼일 안에 안 잡혀오면 이남으로 나간 줄 알아라.' 당시도 집들끼리 감시했는데도 제가 그런 얘기를 했던 건, 그 친구를 믿었던 거지. 마음이 어땠을 거라는 건 다 짐작하잖아요."

- 당시 어떤 분들과 내려오셨어요?
 "우리 육촌누이 뻘 되는 사람이, 왜정시대(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 갔다 와서 선생을 했어요. 남쪽에 의사 친척집 하나가 있는데, 거기 만나러 간다니까 어머니가 날 데리고 나섰어요. 우리 집에서 기찻길까지 한 10리 됐어요. 그럼 거기까지 걸어가는데, 가족들이 한 번에는 다 못 와.

그럼 어떻게 오나? 새벽에 한 명, 낮에 한 명 이렇게 와서 역 근처에 여기저기 숨어있는 거야. 역 근처 멀리 나무 그늘 아래 있는 사람, 집 모퉁이에서 얼굴만 내민 사람. 그럼 나는 어떻게 인사하나? (들킬까봐) 손도 못 들고 얼굴도 못 봐. 그냥 선 자리서 이렇게 쭉 한번 얼굴들 훑어만 봤다고. 그리고 나왔다고."

해방과 동시에 한국 땅에는 위도 38도를 기준으로 북에는 소련군이, 남에는 미군이 들어와 군정체제가 됐다. 그 이전까지 이 땅엔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막는 분계선은 없었다. 1번 국도는 목포-나주-광주-정읍-익산-논산-천안-오산-신촌-파주-개성을 거쳐 신의주까지 연결되는 895km의 길이었다. 3번 국도는 남해-사천-진주-함양-상주-문경-충주-이천-광주-송파-중랑-도봉-양주-동두천-전곡-연천-철원을 거쳐 평안북도 초선에 이르는 1096km의 길.

거제로부터 창녕-대구-군위-의성-안동-영주-제천-원주-홍천-춘천-화천-구 김화군을 지나 평안북도 자성에 이르는 장장 1252km의 길이 5번 국도이고, 부산서 출발 동해안을 따라 양산-기장-울주-울산-경주-포항-영덕-울진-삼척-동해-강릉-양양-속초-고성-통천-원산-함흥(근처에 흥남이 있다)-북천-청진-나진-경흥-을 거쳐 최북단인 온성군에 이르는 1196km의 길이 7번국도다. '삼천리 금수강산'의 그 삼천리가 킬로미터로 환산하면 1200km다. 남으로부터 북으로 이르는 1, 3, 5, 7의 국도길이 대략 이쯤 된다.

그 길들은 모두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잘리어 막힌다. 나라의 동맥과 정맥이 일시에 끊기게 된 것이다.    
 
이철옥 선생이 73년 전인 1947년 월남 당시를 설명하고 있다.  왼편이 경원선, 오른쪽에 보이는 다리가 그가 건넌 한탄강교다. 길과 다리가 끊기고 전쟁이 왔다.
 이철옥 선생이 73년 전인 1947년 월남 당시를 설명하고 있다. 왼편이 경원선, 오른쪽에 보이는 다리가 그가 건넌 한탄강교다. 길과 다리가 끊기고 전쟁이 왔다.
ⓒ 원동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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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경로를 통해 남쪽으로 오셨는지요.
 "기차(경원선)를 얻어 타고 연천에서 내렸어요. 연천 전곡, 한탄강 그쪽이 삼팔선이야.  전곡은 중립지대라 기차가 끊겼고. 내리니까 4시쯤 됐는데 우린 다시 북쪽으로 걸었어요. 남으로 가면 (군인들이) 우릴 이상하게 생각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북으로 가다 다시 산으로, 산에 가서 앉아 있다가 해질 때를 기다려 다시 걷기 시작한 거예요. 전곡 옆에 한탄강 다리가 있는데, 멀리서 보니까 사람이 없어. 원래 소련군과 북한군이 경비를 서고 있었거든. 근데 다리에 다 오니까 아래서 경비병이 탁 올라오는 거예요. 그 경비병이 우리를 보고 '어디 가냐?'고 그래."
                                                                
(* 다음 편에서 계속)

덧붙이는 글 | 이 내용은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DMZ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출품한 상태이고, 영화는 아직 어느 곳에서도 상영된 적이 없습니다. 영화제는 9월에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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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읽고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사진 찍고, 흙길을 걷는다. 글자 없는 책을 읽고, 모양 없는 형상을 보는 꿈을 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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