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라진 시간> 포스터

영화 <사라진 시간> 포스터 ⓒ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영화 <사라진 시간>은 배우 출신 감독이 다른 포맷인 연기와 연출을 어떻게 구현했을지가 핵심이다.

연출에 뜻이 있었지만 이창동 감독의 권유로 30여 년을 배우로 산 정진영 감독의 연출 데뷔작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간 여러 영화에서 다뤄진 소재를 자신만의 색깔로 만들어 놓은 참신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30년 차 배우의 관록과 신인 감독의 패기가 섞인 독특한 영화다.

꿈과 현실, 상상, 윤회, 평행세계, 오컬트, 정신 분열 등 어떤 식으로 보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어떠한 클리셰도 따라가지 않고 뚝심을 지킨 흔적도 보인다. 배우로서 살며 가졌던 갈망을 원없이 풀어 놓은 소회, 구멍 없이 촘촘한 시나리오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정해진 결말 말고 나만의 결말을 지어보길...
 
 영화 <사라진 시간> 스틸컷

영화 <사라진 시간> 스틸컷 ⓒ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선생님인 수혁(배수빈)과 어딘지 아파 보이는 아내 이영(차수연)은 시골로 내려와 오순도순 살고 있다. 하지만 의문의 사고로 사망하고, 형사 형구(조진웅)는 수상한 마을 사람들의 낌새를 찾아 범인 추적에 나선다. 그러던 중 마을 어르신의 생일잔치에 참석해 술을 진탕 마시고 깨어난 다음 날. 형사로 살았던 형구의 삶은 송두리째 사라지고 만다. 어제까지의 자신은 그 어디에도 없는 상태, 과연 진짜 삶을 되찾을 수 있을까.

<사라진 시간>은 기존 서사와 클리셰를 과감히 탈피한다. 감독이 일방적인 메시지를 제시하지 않는다. 다음 수를 예측할 수 없어 흥미로우나 자칫 방향을 잃을 수도 있다. 

이 영화는 이렇게 보면 된다고 정해주지 않고 관객을 영화 속으로 떨어트린 후 절대 구해주지 않는다. 형구와 시간 속에서 함께 벗어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영화가 끝나고 관객은 극장을 빠져나왔으나 형구는 영화 안에 갇혀있다. 시간 속에서 부유하는 형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영화를 보고 난 후 의견을 나누는 공론의 장(場)을 제공한다.

어쩌면 이 영화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알지 못해 답답할 것이다. 영화를 통해 자신만의 관점으로 다양한 상상과 고민을 독려하고 있기도 한데, 열린 결말에 유독 버거워 하는 현대인을 향한 일침이라는 생각도 든다. 우리가 그동안 깊게 사유할 시간과 자신만의 해석 없이 정답에만 길들여진 것은 아닌지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과거가 사라진 날벼락 같은 일
 
 영화 <사라진 시간> 스틸컷

영화 <사라진 시간> 스틸컷 ⓒ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한편 한제 '사라진 시간'과 영제 'Me and Me'에 담긴 의미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일종의 소격효과로 작품에 감정이입이나 몰입을 방해하기 위해 객관화해 보여주는 형식이다. 형사라고 믿었던 형구의 입장에서 보면 이전 삶(시간)이 사라졌으나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형구의 삶은 남아 있다. 남이 보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의 차이를 보여주는 '나의 객관화'다.

전반부와 후반부가 이어지는 이야기라 믿으면 의뭉스러운 전개를 이해하기 버거워진다. 범인을 찾는 형구의 시선으로 따라가도록 유도한 맥거핀이 영리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영화는 연극의 1막과 2막처럼 두 부분으로 정확히 나뉜다. 전반부는 부부의 기묘한 이야기를 쫓고 후반부는 이 부부를 살해한 용의자를 찾는 형구의 이상 행동을 쫓는다. 배우로서 다양한 역할을 맡아온 감독의 정체성 탐구라는 생각마저 든다. 진짜 나의 모습을 잃어버리기 전에 찾고자 한 30년 경력의 배우 인생 여정은 자신을 찾아가는 형구로 투영되었다.

꿈이나 현실의 상상도 서사 없이 시작해 갑작스레 깬다는 것을 생각하면 몰입을 방해하는 연출이 다소 해갈된다. 뇌는 낮 동안 보고 들은 불필요한 기억의 파편을 밤에 꾸는 꿈으로 분류한다. 평생 일어난 일 모두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기도 하다. 그래서 무의식의 욕망이 버려지는 쓰레기 소각장은 꿈이고, 의식 쓰레기 소각장은 상상이다. 이 두 가지가 적절히 배분될 때 우리는 정상적인 일상이 가능해지나 형구는 그 부분이 오작동한다.

형구가 겪은 기묘한 사건은 우리의 삶과도 닮았다. 갑자기 예기치 않는 상황에 처한 인간이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아등바등 거리지만 결국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대부분 체념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게 못다 한 꿈이든, 누군가를 사랑했던 과거든 허탈하고 안타깝지만 형구처럼 적응한다.

배우에서 연출가로 변신한 인물 중 성공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클린튼 이스트우드가 대표적이며 여성 감독으로는 그레타 거윅, 소피아 코폴라 정도라 할 수 있다. 정진영 감독의 차기작이 무척 궁금해진다. 정진영 감독은 다음에는 무슨 이야기를 만들까. 차기작이 무척 궁금해진다. 뫼비우스 띠지같이 끝과 시작이 맞닿아 있는 기묘한 연출이 갖는 힘이라고 믿는다.
사라진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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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쓰고, 읽고 쓰고, 듣고 씁니다. https://brunch.co.kr/@doona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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