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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식민지시대가 끝난 지 5년도 안돼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 혹은 '6.25전쟁'은 이후 한국사회의 모든 구조를 주조했다. 그 전쟁이 발발한 지 무려 70년이 흘렀다. <오마이뉴스>는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전쟁의 또다른 상흔인 화교부대병 2세와 소년병, 월남민 2세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편집자말]
처음으로 징집됐던 경산초등학교 앞에 선 '소년병' 박태승 전 소년병전우회 회장
 처음으로 징집됐던 경산초등학교 앞에 선 "소년병" 박태승 전 소년병전우회 회장
ⓒ 구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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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하늘이 푸르던 지난 15일 오후, 백발의 '소년병'(child soldier)은 70년 전 자신이 징집된 장소에 처음 섰다. 109년 역사의 경산초등학교(경북 경산시).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두 달이 지난 1950년 8월, 그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징집됐다. 그의 나이는 이날 하늘만큼이나 푸르렀던 만 17세였다.

"내가 1950년 8월에 여기에 왔지. 70년 만에 왔네."

학교를 둘러보던 중에 '이승복 동상'이 눈에 띄었다. 1968년 울진·삼척무장공비침투사건 당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다 입이 찢겨지며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반공소년'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동상이다. 그 동상 앞에서 소년병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공산당이 싫어요' 그 한마디에 이렇게 동상이 세워졌는데, 15살, 16살, 17살 아동들이 전쟁을 치렀는데 이것을 덮는 게 말이 되나?"

1950년 8월 28일
  
박태승 전 소년병전우회 회장은 지난 1996년 소년병전우회를 창립했다.
 박태승 전 소년병전우회 회장은 지난 1996년 소년병전우회를 창립했다.
ⓒ 구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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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신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박태승(88, 현 영풍불교법우회 상임법사) 전 소년병전우회 회장은 1933년 중국에서 태어났다. 해방이 되던 1945년 8월 만주국 하얼빈 사도(師道)중학교 1년을 중퇴하고 귀국했다. 늦게 들어간 하양중학교(경북 경산 소재) 2학년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경북에서도 인민군이 들어오지 못한 곳이 경산과 청도, 대구밖에 없었어. 경산은 피란민들이 청도를 거쳐 밀양으로 내려가는 길목이 됐지. 그래서 피란민들이 경산으로 몰려 들었어. 여름이니까 마당에 보리짚 깔아놓고 자고, 먹을 게 없으니까 호박잎까지 다 뜯어 먹었어. 전쟁이 일어난 걸 실감했지."

한국 나이로 18세(만 17세)였던 그에게 입영 통지서가 날아왔다. 소집일은 8월 28일. 스물한 살의 둘째형이 입대하고 열흘이 지난 때였다. 당시 '한국전쟁 최후의 방어선'이라는 낙동강방어선전투(1950년 8월~9월)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일단 면사무소에 모였다가 트럭을 타고 경산국민학교에 집결했어. 거기 가니까 300, 400명이 모여 있더라고. 당시 징병관리를 현역군인이 아닌 국민방위군이 했어. 국민방위군 소령이 '여기 만 18세 미만은 나오라'고 하니까 7~8명이 나왔어. 그런데 '나이가 안돼서 집으로 가라'고 하더라고. 그 소령이 면사무소 직원을 꾸짖었어. '아이를 잡아 오면 어떡하냐?'고. 면사무소에서는 숫자(병력)를 채워야 하니까 그랬던 것 같아."

당시 국제법상 전쟁 중이라도 18세 미만 소년병의 징집은 금지돼 있었다. 한국전쟁 시기에도 징집대상은 18세 이상이었다. 하지만 국가는 한국전쟁 초기 병력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15∼17세(1933년∼1935년생) 소년들을 징집했다. '자원입대'도 있었지만 상당수는 '강제징집'이었다.

"그때는 가두에서도 모병을 했어. 신분증을 보고 (정확한 나이를 판단해) 징집하는 경우는 없었어. 그냥 덩치 보고 했어."
 
박태승 전 소년병전우회 회장의 유일한 군 시절 사진. 1952년 12월 미8군 45보병사단에 파견 나가 찍은 것이다.
 박태승 전 소년병전우회 회장의 유일한 군 시절 사진. 1952년 12월 미8군 45보병사단에 파견 나가 찍은 것이다.
ⓒ 박태승 전 회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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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번 0350115

그는 첫 징집에서 용케 빠져나왔지만 전쟁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경북 경산군 진량면에 제3야전병원이 주둔하고 있었다. 휴학하고 그 야전병원에서 심부름을 해주다가 군번도 없이 다부동전투에도 참전했다. 이후 위생병 모집에 응시해 '소년병'이 됐다.

"(제3야전병원에 있을 때) 매일 앰뷸런스에 사상자가 실려 왔어. 거기서 단까('들것'의 일본말)로 사상자도 운반하고 피묻은 붕대도 씻고. 육군본부 현역 대위가 팔을 부상 당해 이곳에 와서 치료를 받았는데 나더러 어디로 가자고 하더라고. 영천에 제1야전병원 의무단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3개의 병원이 있었어. 거기서 위생병을 모집해서 시험을 보고 합격했지."

자원입대와 강제징집의 묘한 경계선에 있었다. 그도 "애매하다"라고 했다. 하지만 전쟁의 특수성을 생각해야 한다. 개인을 가장 강력하게 국가에 종속시킬 수 있는 것이 전쟁이다.

"'백척간두에 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책가방을 내던지고 전쟁터에 갔다'는 것은 거짓말이야. 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어? 당시 입대는 곧 죽음이었어. 자원입대니 강제징집이니 따질 때가 아니야. 거의 다 강제징집이야.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은 군대에 안갔어. 전부 도망가 버려. 7월 17일엔가 정훈국장이 부유층의 해외도피나 방관적 태도를 경고하는 담화까지 발표했어. (전쟁이 일어난 지) 22일 만에 도망간 거지. 머슴이나 품팔이 하는 놈이나 군에 갔어. 형이 입대하고 10일 만에 나이도 안찬 동생이 다시 소집돼 갔다는 것만으로 짐작이 갈 거야."


그에게는 '035015'라는 정식 군번이 부여됐다. 이렇게 소년은 '진짜 군인'이 됐다. 전쟁이 만들어낸 예기치 않은 운명이었다.

청춘의 미래
 
박태승 전 회장은 한국사회에서 소년병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소년병전우회를 지난 1996년에 창립했다.
 박태승 전 회장은 한국사회에서 소년병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소년병전우회를 지난 1996년에 창립했다.
ⓒ 구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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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승 전 회장은 약 20일 간의 위생교육을 받은 뒤 제1야전병원 의무단에 배치됐다. 이후 전세가 역전돼 북으로 진격하고 있을 때 마음 아픈 일을 겪었다. 북한 소년병 포로를 잡아 즉결처분한 장면을 직접 본 것이다.

"원주 근처를 지날 때 치안대에서 북한군 포로 셋을 잡아왔어. 피신해 있다가 붙들린 거지. 나보다 더 어린 애들이었어. 치안대가 포로를 처리할 수 없어 우리 부대에 넘긴 거야. 북으로 진격해야 하고 차량도 없어서 포로를 후송시킬 수가 없었어. 결국 즉결처분하기로 한 거야. 마지막으로 '할 말 있으면 하라'고 하니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라고 외치더라."

원주-서울-동두천-강원도 평강 등을 거쳐 1950년 10월 말께 평양에까지 입성했다. 이제 전쟁이 끝나서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기대가 생겼다.

"보병 제1사단이 10월 19일엔가 평양에 입성하고 일주일 뒤엔가 평양에 들어갔어. 김일성종합대에 발판을 설치하고 건물을 보수하고 있더라고. 어린 나이에도 '이제 전쟁이 끝났다'고 상당히 안도했어. '이제는 고향 엄마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생각했어. 철부지 속이었지. 아직 어렸으니까."

그런데 중공군이 참전해 후퇴하는 과정에서 오른팔이 부서지는 부상을 당했다. 그 부상으로 인해 지금도 오른팔이 왼팔에 비해 1cm 정도 짧다. 퇴원한 뒤에는 대구제1보충대에 있었는데 육군본부에서 행정요원을 모집하러 왔다.

"대구제1보충대에 수용된 인원이 500명 정도 됐을 거야. '행정경험이 있는 사람은 나오라'고 하더라고.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나갔지. 16절지 갱지에 연필 하나를 주고는 '청춘의 미래'라는 제목을 주면서 작문하라고 해. 1시간 정도 썼지. 내 능력으로는 합격할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박태승' 하고 세 번째로 나를 불렀어. 합격이야."

그렇게 해서 육군 본부 미군인사과에 근무하게 됐다. 그의 말로는 카츄사(KATUSA, 한국에 주둔한 미 육군에 파견근무하는 한국 군인)의 인사업무 등을 맡던 부서라고 한다. 현재의 서울 구로구에 해당하는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 구로리'에 위치한 미 8군 45사단에도 파견을 나갔고, 그곳에서 '종전'(1953년 7월 27일)을 맞이했다.

1955년 2월 10일
 
'소년병' 박태승 전 소년병전우회 회장의 군복무기록.
 "소년병" 박태승 전 소년병전우회 회장의 군복무기록.
ⓒ 박태승 전 회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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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한 뒤에는 전투무기와 차량, 군수물자, 피복 등을 관리하는 미 60병기단과 59병기단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1955년 2월 10일, 소년병으로 입대한 지 4년 6개월 만에 '일등중사'로 제대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19개월'이나 더 군복무가 연장된 것이다. 그렇게 '18살 소년'은 '22살 청년'이 됐다.

"집으로 바로 왔지. 둘째 형님은 1951년 2월 10일 소양강지구전투에서 전사했어. 그 형님은 군대 가기 반 년 전에 세 살 위 형수랑 결혼했어. 큰형님은 중국어 통역관으로 종군하다가 부상을 당해 집에 왔고. 어머니는 아들 셋을 모두 군대에 보낸 거야. 둘째 형님 전사통지를 받았던 어머니는 형님에 대한 얘기를 일체 안했어. 마음 상할까봐."

제대는 했어도 변한 것은 없었다. 가난은 그대로였다. 전쟁으로 중단된 학업도 이어갈 수 없었다. 몸을 팔아야 겨우 입에 풀칠 할 수 있는 시대였다. '품팔이' '노가다' 등이 또다른 그의 이름이었다. 하도 힘들어 "지옥 문앞에도 몇 번 갔다왔다".

"5.16 나기 전까지는 일하고 싶어도 일할 자리가 없었어. 그때 장정이 하루종일 일해도 쌀 두 되밖에 못받아. 내 마음 속에는 '인간사회는 왜 이렇게 불평등한가?' '나는 몹쓸 짓 한 게 없는데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가?' 하는 생각이 있었어. 그 답을 찾다보니 종교에 기울어졌고, 결국 일찍 종교에 귀의했어."

불교에 귀의한 그는 원주 등을 떠돌다가 지금의 경북 풍기에 정착했다. 사회정화위원회나 국민정신교육위원회 등에서 위원이나 감사로 활동했고, 안동·청송교도소 종교위원을 맡아 재소자들을 교화하기도 했다. 대한불교조계종전국신도회 부회장과 육군 70사단과 50사단 지도법사로도 활동했다. 

1996년 소년지원병전우회
 
소년병전우회의 2006년도 정기총회 장면.
 소년병전우회의 2006년도 정기총회 장면.
ⓒ 박태승 전 회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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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8년 열린 소년병위령제.
 지난 1998년 열린 소년병위령제.
ⓒ 박태승 전 회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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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제3야전병원에서 심부름을 하다가 다부동전투에도 참전한 적이 있다. 다부동전투는 국군 제1사단이 낙동강선 다부동(경북 칠곡) 일대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전투로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꼽힌다. 그 경험으로 다부동전투전우회 경북지부장을 맡았고, 지난 1996년에는 '6.25참전 소년지원병전우회'를 결성했다.

"다부동전투전우회에 소년병이 상당수가 있더라고. 특히 다부동전투에서 전사한 소년병들이 많았어. 그래서 1996년에 7~8명이 모여서 소년병전우회를 결성했지. 우리는 살아남았지만 그 당시 산화한 꽃봉오리들이 많았으니 그분들을 위해 뭔가 일을 해야 하지 않겠나 해서. 병역의무도 없었는데 참전했으니 그것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예우도 받아야 하고, 희생당한 사람들 위령도 해줘야 하고."

그런데 명칭이 문제였다. '소년병'이라고 부르자니 '학도병 강제징집'이라는 일본군의 흔적이 어른거렸다. 유엔아동권리협약 등에 18세 미만을 '아동'으로 분류하고 있으니 '아동병'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다 '소년지원병'으로 부르기로 최종 결정했다.

"아동병으로 하자는 의견도 일리가 있어. 법적인 신분이 아동이니까. 그런데 아동병으로 하면 국가체면이 말이 아니게 돼. '왜 아동을 군인으로 만들었냐?' 아동병으로 하면 세상이 시끄러울 것 같고, 국가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지원병'을 넣었지. 우리가 국가에 의해 끌려간 것을 드러내지 않고 자진해서 간 것처럼. 정부가 욕을 얻어먹지 않게 말이야."

하지만 나중에는 '지원병'을 빼야 했다. '국가유공자'로 예우해 달라는 소년병전우회의 요구에 국방부나 국가보훈처 등에서는 "왜 '지원'했으면서 예우해 달라는 거냐?" 하는 분위기가 강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랑하려고 '지원병'이라고 한 게 아니야. 나라에 욕을 얻어먹이지 않으려고 정부를 위해 '지원병'이라고 한 거지."

소년병 2만9603명... 전사 2573명
 
지난 2011년 12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펴낸 <6.25전쟁 소년병 연구>와 소년병전우회가 국방부 등을 찾아다니며 정리한 소년병 명부.
 지난 2011년 12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펴낸 <6.25전쟁 소년병 연구>와 소년병전우회가 국방부 등을 찾아다니며 정리한 소년병 명부.
ⓒ 구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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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소년병과 관련해 이명박 정부 시기에 가장 전향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정권 실세였던 이재오 당시 국민권익위원장과 박영준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이 대구에 소재한 소년병전우회 사무실을 직접 방문했다. 국방부는 병적기록표에 '6.25 참전 소년·소녀지원병'이라고 명기하고, "당시 15세 아동을 현역병으로 입대시킨 관련 법령이나 근거는 확인할 수 없다"라고 밝힘으로써 소년병의 실체와 징집의 불법성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특히 지난 2011년 12월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에서는 <6.25전쟁 소년병 연구>(이상호·박영실, 아래 <소년병 연구>)를 펴냈다. 그동안 한국전쟁사에서 완전히 배제됐던 소년병의 실체를 인정하면서 소년병의 범위를 정의하고, 참전 규모와 입대과정, 전투 참전, 전쟁 이후 삶 등을 체계적으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컸다.

<소년병 연구>에 따르면 소년병은 '정식 군번을 부여받아 정규군으로 참전한 17세 이하 군인'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소년병의 규모는 2만9603명에 이른다. 이는 한국전쟁 당시 '3개 사단'에 해당하는 병력이다. 국방부(1만4400여 명)나 국가보훈처(2만8694명)에서 추정했던 규모보다 더 많았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2만9603명 가운데 2573명이 전사했다. 1950년과 1951년, 특히 낙동강방어선전투와 중공군 참전 이후에 소년병의 희생이 집중됐다.

전사자를 제외한 소년병 가운데 2만4263명은 국군 소속, 2765명은 유엔군 소속으로 참전했다. 특히 국군에 배속됐던 소년병 2만4263명 가운데 467명이 '소녀병'(여군)으로 확인됐다. 그동안 국방부가 주장해왔던 '23명'보다 20배나 많은 규모다.

소년병은 학교 배속장교의 권유, 학교의 소집, 국민방위군 소집령에 의한 입대, 경찰의 불심검문에 의한 입대, 자원입대, 가두 징병모집 등을 통해 입대했다. <소년병 연구>는 "당시 전세의 악화로 인해 입대가 정상적 절차에 의해 이루어지기보다는 임시방편적 수단에 의해 이루어진 사례가 많다"라고 밝혔다. 소년병 징집 과정이 대부분 불법으로 행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백선엽의 침묵
 
박태승 전 소년병전우회 회장은 "백선엽 장군이 소년병문제에 대해 한마디도 안했다"라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사진은 지난 1997년 다부동전투전우회 경북지부에서 마련한 백선엽 장군 환영식.
 박태승 전 소년병전우회 회장은 "백선엽 장군이 소년병문제에 대해 한마디도 안했다"라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사진은 지난 1997년 다부동전투전우회 경북지부에서 마련한 백선엽 장군 환영식.
ⓒ 박태승 전 회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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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병은 김대중 정부 때 제정된 '참전유공자법' 덕분에 '참전유공자'가 됐다. 결성된 이후 소년병 진실 알리기, 위령제 등의 추모사업을 펼쳐온 소년병전우회는 더 나아가 재일학도의용군처럼 '국가유공자'로 예우해 달라고 요구했다. 국가유공자법(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소년병의 희생과 공헌을 인정하고 거기에 합당한 예우와 보상을 해달라는 것이다. 

"재일학도의용군은 비정규군이야. 소년병은 학생 출신이 대부분이지만 군번을 정식으로 받은 현역 군인(정규군)이라고. (전쟁 중에) 군인과 비군인의 생사는 하늘과 땅 차이야. 우리는 국가와 사회, 부모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사람인데 전쟁터로 갔어. 유엔아동권리협약 등에 따르면 전쟁이 일어나면 아동은 우선 보호하도록 돼 있는데 전쟁터로 보냈어. 이건 아동학대문제이고 인권문제야. 그런데 70년이 되도록 국가원수의 사과 한마디도 없고, 우리의 공로나 애국심을 치하하는 한마디도 없어."

그래도 소년병전우회의 적극적인 '입법투쟁' 덕분에 안경률(16대)·장윤석(17대)·김소남(18대)·유승민(19·20대) 의원에 의해 총 다섯 차례 국가유공자법 개정안 발의가 이뤄졌다. 하지만 '소년병의 국가유공자 예우'는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가장 큰 이유는 국가유공자로 인정할 만한 '전공'(戰功)이나 '상의'(傷痍)가 소년병한테는 없다는 것이다.

"다부동전투나 낙동강방어선전투에 소년병이 많이 참전했어. 그때는 그 전투에 들어가면 죽어 나오는 시기야. 잘 싸웠냐, 못 싸웠냐는 둘째 문제고 국가가 요긴하게 써먹은 거지. 우리 입으로 말하기 좀 그렇지만, 사실 '총알받이'였어. 24kg 완전군장을 매고 산에 오르내렸는데 제대로 신체발육이 됐겠어? 자의든 타의든 그 어려운 시기에 참전한 소년병의 희생과 공은 인정해줘야지. 육체적 희생(상의)이 없고, 공로(전공)가 없어서 국가유공자가 안된다고? 말이 안된다. 재일학도의용군은 부상 당해서 국가유공자 됐나?"

앞서 언급한 <소년병 연구>에서는 ▲국가유공자법의 조속한 통과 ▲국가보훈처의 구체적인 정책지침 수립 ▲소년병 참전자 기념사업회 설립과 정부의 재정지원 ▲소년병 참전 기념비 설립과 추모사업 전개 등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뤄진 것은 거의 없다.

특히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불리우는 백선엽 장군에게도 아쉬움이 있다. 1사단장, 2군단장, 육군 참모총장 등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다부동전투를 치른 백선엽 장군이 정작 소년병문제에는 침묵했기 때문이다.

"그분은 소년병 참전 사실을 잘 알고 있어. 다부동전투에서 아이들이 많이 희생했다는 거 안다고. 그런데 소년병 얘기를 일체 안했어. (소년병 문제를) 좀 멀리하는 것 같더라고. 우리 회원 중에도 '백선엽 장군이 한 마디 안하냐?'고 해. 그래도 말이 없더라고. 자기한테도 책임이 있는데 한마디도 안 해."

2020년 4월 해산
  
한국전쟁에 참전한 소년병의 규모는 2만9603명에 이른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소년병의 규모는 2만9603명에 이른다.
ⓒ 구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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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병전우회는 올해 4월, 24년(1996년~2020년)의 활동을 마감했다. 단체를 해산한 것이다. 한국사회에 처음으로 소년병문제를 제기한 단체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회원들이 1년에 회비 5만 원을 내서 운영해왔어. 지금은 그 5만 원을 낼 사람도 없어.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것은 위령제 할 때마다 주는 500만 원이 전부야. 운영비 지원은 한푼도 안받았어. 임대료 20만 원 등 한 달에 들어가는 운영비가 100만 원 정도야. 운영비도 문제지만 이제는 들리지도 않고 눈도 안보여. 운영할 (재정적) 능력도 없고, 육체적 한계도 온 거지."

그에 따르면 현재 생존해 있는 소년병은 2000명 안팎에 불과하다. 생존 소년병의 나이는 최저 85세부터 최고 90세 정도까지다. 수년 안에 소년병의 존재 자체가 소멸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전에는 보상이다 국가유공자 예우다 했는데, 돈도 명예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국가가 공식적으로 소년병의 희생을 알아주고 거기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있으면 좋겠어. 소년병이 '애국' 한 것 아닌가? 그 애국정신이 후대에 귀감이 될 수 있도록 예우해줘야지. 특히 소년병 전사자들의 대부분은 후손이 없어. 어려서 군에 들어가 장가를 안갔으니까. 전국에 크고 작은 현충시설이 300여 개 있다고 하더라고. 소년병을 위한 단독 현충시절이 필요해. 소년병의 애국정신이 후대에 귀감이 되도록 교육할 수 있게 말이지."

특히 그는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전쟁 70주년 기념사에서 꼭 소년병을 언급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렇게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실이 역사의 뒤안길에 묻히는 것은 국가적 손실이야. 충분히 후세에 활용할 가치가 있다고 봐. 그래서 문 대통령이 (한국전쟁 70주년 기념식에서) 소년병을 언급해주기 바란다. 4.3, 5.18뿐만 아니라 해군 희생자(천안함)와 세월호 희생자도 다 추모하는데, 소년병의 공로와 애국도 그에 뒤지지 않아. 특히 문재인 대통령은 인권운동에 앞장서 왔지 않나? 그래서 어린 아이들의 희생을 알게 되면 그냥 지나치지 않을 거라고 봐."

아이젠하워, 밴 플리트, 클라크, 해리스, 모택동... 이들의 공통점
 
풍기법우회 법당에는 소년병 전사자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풍기법우회 법당에는 소년병 전사자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 구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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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풍불교법우회에서 운영하는 법당에는 전사한 소년병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는 여름에는 새벽 4시, 겨울에는 새벽 5시에 일어나 매일 예불을 드리고 있다. 그는 "6.25가 내 인생을 망쳤다"라면서도 "하지만 인생을 바로 살 수 있게 돼 후회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날마다 소년병들을 위해 예불을 드리고 해마다 위령제를 지내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기 때문이란다.

앞으로는 한국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가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다. 기자는 3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마치면서 "한국전쟁이 그런 세대에게 어떻게 기억됐으면 좋겠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지도자들의 애국심'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후세 지도층의 자세가 바뀌어야 한다고 봐. 지도자들의 애국심이 중요해. 6.25 때 미군은 142명의 장군 아들이 전사했는데 우리는 그런 사람이 없어. 아이젠하워 대통령 아들도,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 아들도,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아들도, 해리스 미 해병 소장 아들도 전사했어. 심지어 모택동의 큰 아들 모안영도 전사했어. 소년병이 제대로 조명돼서 지도자의 생각이 바뀌었으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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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박태승, #소년병전우회, #한국전쟁 70주년,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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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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