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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한국에서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나온 이래, 마음 편히 어딜 쏘다닌 기억이 없다. 집 근처 산책로를 걸을 때도 몸과 마음이 위축된 상태고, 벼르고 벼르다 몇 개월 만에 조카 얼굴을 보러 갈 때도 한껏 긴장한 채다.

지인과 잡은 약속도 확진자 추이를 따져가며 미루고 미루다 겨우 성사되고, 얼마 전 친구와 전화통화를 할 때도 이렇게 말하며 끝을 맺었다. '암튼, 우리 잘 지내고 있자, 올해가 끝나기 전엔 못 볼 수도 있으니까'. 

자타공인 집순이에다가 혼자 놀기의 달인인 나마저, 마음껏 나가질 못하니 답답증이 심해지고 있다. 갈 수 있지만 가지 않는 것과 갈 수 없어서 가지 못하는 것은 천지차이라는 걸 알았다. 벌써 며칠째 내 소원은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볼 수는 있지만, 내가 원하는 건 '마음 편히' '마스크 벗고' 영화를 보는 것이다. 가볍고도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를 보러 가는 날이 언제쯤 찾아올까. 정말이지, 소소하게 행해오던 일상의 일들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어쩔 수 없이 집순이, 집돌이가 된 사람들이 많아진 터라, 넷플릭스나 유튜브의 가치가 엄청나게 올랐다는 뉴스를 들었다. 이와 함께, 온라인 서점 판매가 늘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출판계에 관심을 가진 이래 '독서 인구가 늘었다'는 희소식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반면, 동네 서점은 극심한 재정난에 빠졌다는 소식 또한 들려왔다. 요즘엔 동네 서점에서도 택배 서비스를 한다. 이왕 책을 구입하는 김에, 오랜만에 집 근처 서점을 한 번 이용해 보는 건 어떨까. 

답답증이 심해진 탓인지 요즘엔 머리를 잔뜩 써야 하는 책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짧은 글에 솔직하고 재치 있는 문체가 실려 있는 에세이나, 역시나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에 손이 많이 갔다. 그중 최근에 읽은 에세이집 두 권과 소설집 한 권을 소개해볼까 한다. 답답한 일상이 좋은 책으로 인해 조금은 수월하게 흘러가길 바라며.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권남희 (지은이), 상상출판

 
 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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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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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는 작가만큼이나 내가 동경하던 직업이었다. 고요히 홀로 고독하게 작업하는 한 명의 인간에 대한 이미지. 제2 외국어를 조금만 더 잘했다면 번역가가 됐을지도 모를 텐데. 하지만 아무리 공부해도 영어에 감을 잡을 수 없던 나는 중국어마저 잘 못했고, 결국 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꿈은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사라져 버렸다. 내가 감히 바라지도 못하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생활을 하며 살까. 

28년 차 일본 문학 번역가 권남희의 에세이집을 읽다 보면, 번역가도 일상인이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에 가닿게 된다. 책에는 '나, 28년이나 번역일을 해온 사람이야'라는 자의식이라곤 찾을 수 없다. 그저 소소한 일상 속에서 혼자 화냈다가 혼자 화를 풀고, 별 것 아닌 일에 웃고 울고, 딸과 쿵작을 맞춰가며 농담 따먹기를 하는 유쾌한 번역가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조금 까칠하지만 그럼에도 관계의 중요성을 아는 번역가가 오롯이 혼자 서면서도 타인의 손을 놓치지 않는 방법을, 진솔한 문체로 이야기하고 있다. 
 
"외출 준비의 귀찮음보다 외로움이 낫지, 나쁜 일로 연락 오는 것보다 휴대전화 조용한 게 낫지, 즐겁고 신나는 일 없지만 심심했던 어제처럼 별일 없는 오늘이 낫지. 내일도 무료한 오늘과 같은 날이면 좋겠고, 다음 달도 맹숭맹숭했던 이번 달과 같은 달이면 좋겠어. 이런 생각으로 하루를 보낸다." 


<저는 이 정도가 좋아요> 
송은정(지은이), 시공사

 
 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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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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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회사를 그만둘 때 나를 말리는 사람들의 말의 요지는 이거였다. '여기서 나가면 더 힘들 거야, 그냥 참아.' 그때 나는 '만약 여기서 나간다고 해서 먹고살지 못하게 된다면, 삶은 참 가혹한 것이므로, 나는 이 삶을 사랑하지 않겠다'라고 생각했다.

이후 두어 군데 회사를 더 다니다 그만둔 나는 요즘 자주 이 삶을 사랑할 수 없겠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회사를 그만둔 걸 후회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먹고사니즘은 물론 중요하지만, 삶이란 먹고사니즘만으로는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 테다. 

하지만, 역시 먹고사니즘이 충족되지 못할 땐 불안하다. 그렇기에, 프리랜서란 불안을 일상처럼 경험하는 사람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일이 있다고 해서 내일도 일이 있을 것이란 보장이 없다. 열심히 글을 써서 출간을 하지만 여전히 베스트셀러 작가는 내가 아닌 다른 이다.

그럼에도, 오늘도 어제처럼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는 건 이런 의미 아닐까. 불안하긴 하지만 나는 내가 하는 이 일을 참으로 좋아한다는. 불안과 자책과 재능 없음에 짓눌리면서도, 꿋꿋이 앉아 나의 이야기를 글로 부려놓는 일을 꾸준히 해나가는 사람. 이 책은 프리랜서의 삶을 결코 포장하지 많으면서 또 결코 프리랜서를 포기할 생각도 없는 5년 차 프리랜서 작가의 고백록이다. 
 
"프리랜서의 세계는 몸을 부딪치며 스스로 터득하는 것 외엔 마땅히 배울 곳도, 조언을 구할 사람도 흔치 않다. 매일이 자신을 피실험자로 한 예측 불가 실험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내 정체를 특정 조건으로 정의 내리는 대신 상태로 파악하게 됐다. 프리랜서란 자신의 삶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의지가 높은 사람이 아닐까."


<나의 할머니에게>   
윤성희, 백수린, 강화길, 손보미, 최은미, 손원평(지은이), 다산책방

 
 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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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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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들리지 않던 목소리를 들려주는 소설, 쉽게 보이지 않던 누군가를 찾아 보여주는 소설을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여성 소설가 여섯 명이 할머니에 대해 쓴 이 소설이 그런 소설이다. 

그러고 보니 그간 접한 수많은 서사에서 할머니가 주인공인 서사는 거의 없었다. 얼핏 기억나는 건 작년에 방영됐던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와 구병모 소설 <파과> 정도다(하지만 <파과> 속 인물은 할머니라기보다는 노년 여성이라는 게 더 맞다).

우리 모두에겐 할머니가 있었지만, 우리는 할머니를 얼마만큼 알았을까.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사셨을까, 할머니는 어떤 기억을 간직하며 사셨을까. 이 소설집을 읽다 보니 할머니가 살아계시다면 할머니의 인생 이야기를 묻고 싶어졌다. 
 
"오래전, 스스로 너무 늙었다고 느꼈지만 사실은 아직 새파랗게 젊던 시절에 할머니는 늙는다는 게 몸과 마음이 같은 속도로 퇴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굳는 속도에 따라 욕망이나 갈망도 퇴화하는. 하지만 할머니는 이제 알았다. 퇴화하는 것은 육체뿐이라는 사실을.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어김없이 인간이 평생 지은 죄를 벌하기 위해 신이 인간을 늙게 만든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저는 이 정도가 좋아요 - 5년 차 프리랜서의 자리가 아닌 자신을 지키며 일하는 법

송은정 (지은이), 시공사(2020)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 번역가 권남희 에세이집

권남희 (지은이), 상상출판(2020)


나의 할머니에게

윤성희, 백수린, 강화길, 손보미, 최은미, 손원평 (지은이), 다산책방(2020)


태그:#책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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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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