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2 09:09최종 업데이트 20.06.16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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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 사진은 2004년 1월,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시절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 ⓒ 이종호

 
어린 시절 노회찬의 '소박한 꿈'은 유신 독재 시절을 거쳐 1980년대 초 '인간해방·노동해방'의 신념을 지닌 노동운동가의 삶을 살게 되면서 '세상 속의 꿈'으로 바뀐다. 앞서 본 것처럼 2004년 어느날 정운영과 노회찬은 이런 문답을 주고받는다(정운영,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4, 71쪽).

정운영 : "노 의원이 여태껏 살아온 길을 돌아볼 때 과거에 비해 지금 변한 것은 무엇이고, 또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노회찬 : "변하지 않은 것은 목표이고, 변한 것은 방법입니다. 인간해방·노동해방의 신념은 변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실현시키는 방법은 현실에 다가설수록, 구체화될수록 변하고 있습니다. 학습을 계속하는 이유는 이 변화를 올바르게 끌어내기 위해서지요."

노회찬이 인간해방·노동해방의 신념과 독재 타도의 '혁명'을 꿈꾸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80년 5월의 광주'였다.


"광주민중항쟁을 거치면서 학생·지식인들의 저항만으로는 저 폭압적인 독재정권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대중의 힘에 기반을 둔 혁명 말고는 독재 타도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57~58쪽).

"광주에서 두 가지를 본 거예요. 하나는 이제 극악한 독재세력들한테 그냥 데모하듯이 덤벼들어 가지고는 전망이 없다, 또 하나는 시민들이 패배는 했지만 무장,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총만 들면 되는 것이 아니라 각성한 많은 대중들의 위력, 이게 뒷받침되지 않으면 일부가 총 몇 자루 든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제 80년 5월이 우리에게 주는 게 많죠.

그 이전에 다양한 학생운동의 경험에 대해서 그걸 부정한다기보다는, 그걸 다시 지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강하게 갖게 된 게, 80년 5월이었죠." (유경순, '노회찬의 구술생애사', <1980년대, 변혁의 시간 전환의 기록>, 봄날의 박씨, 2015, 111~112쪽)


'80년 5월 광주', 1년 뒤 전북 고창 선운사 참당암에서의 한 달

서울의 봄과 5월 광주를 계기로 시작된 1980년대 한국 사회는 가히 '혁명의 시대'라 일컬어질만 했다. '80년 5월 광주'. 그 참혹한 역사의 현장은 유신독재의 계기가 된 1972년의 10월유신과 마찬가지로 노회찬에게 두 번째 전쟁 같은 충격을 던졌다.

군사독재에 항거하여 거리로 나온 민중들을 보면서, 그리고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희망을 무참히 꺾어버린 참상"을 본 노회찬. 그는 한 인터뷰에서 '가장 뜨겁게 눈물을 흘렸던 때는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눈물을 많이 흘린 것이 5.18 때의 광주이다. 5.18 광주가 벌어졌을 때 부산에서 일본 TV를 통해 그 참상을 그대로 봤다. 그때 부산에는 일본 전파가 나와서 일본 TV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참상들을 보면서 정말 뜨겁게 울었던 것 같다."('自由人 인터뷰', 2011.8.18.)

1년여 뒤인 1981년 8월, 스물다섯 살의 청년 노회찬은 사회과학서적을 잔뜩 배낭에 지고 전북 고창 선운사(禪雲寺)의 참당암(懺堂庵)으로 걸음을 옮긴다. '연못에 살던 이무기를 내쫓고 연못을 메워 절을 세웠다'는 선운사의 창건 설화도 바로 참당암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사실 경기고를 졸업하고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다닌 노회찬의 미래는 장밋빛 청사진이 펼쳐질 가능성이 많았다. 계속 공부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고 한다.

"광주시민들의 외침이 무참하게 짓밟히는 것을 보고, 올바르고 참된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불교신문> 2008.1.26.)
 

전북 고창 선운사 참당암 대웅전과 응진전, 명부전 전경.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노회찬은 "전기불도 없던 응진전에서, 박쥐가 날고 찬 기운이 올라오는 명부전에서 1개월간 보내면서 부모 및 이성 문제 등에 대해 마음을 정리하고, 또 성찰을 거듭한 끝에 1973년 유신독재반대 박정희 타도 유인물 제작, 살포를 시작으로 몸담았던 10여 년에 걸친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노동자들이 조직화, 세력화되어 앞장설 때만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노동자·농민이 주인되는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일에 일생을 투신키로 결단했다."(<매일노동뉴스>, 2004.4.7.; 세계일보 2018.7.29.)

"서른 번의 낮과 밤을 보내며 나는 점차 삶의 나침반을 찾아갔다. '물의 흐름'처럼 역사에 나를 맡겨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명예나 이익을 탐하기보다 시대가 요구하는 일을 하는 것이 도리라고 판단했다.

어릴 때부터 배운 '대의(大義)에 서라'를 떠올렸다. 상식이 통하고 약속이 지켜지는 '정의가 바로 서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기로 마음을 굳혔다. 참당암을 나선 나는 전기용접 기능사 자격증을 따고 민중의 바다로 나아갔다."(노회찬, '[내 마음의 법구] 참당암의 여름에 내린 결심내 마음의 법구', <불광미디어>, 2010.1.29.)


용접공으로 위장취업, 노동현장으로 '존재 이전'하다

대학 시절 노회찬은 노동현장으로의 존재 이전을 차근차근 준비해나간다.

"그는 1980년 5월을 거치면서 노동운동을 할 생각을 굳히고 학생운동을 정리하는 한편 노동현장에 투신할 준비를 했다. (...) 노동현장 이전을 위한 준비로 기술 습득만이 아니라 노동자투쟁의 사례분석, 노동자 교육사례, 대중운동 방법론 등도 공부했다. '80년, 81년, 82년에 이런 준비를 한 거죠.'" (유경순, '노회찬의 구술생애사', <1980년대, 변혁의 시간 전환의 기록>, 봄날의 박씨, 2015, 112~113쪽)

그가 소장해온 책 가운데 고려대 생산기술연구소가 편찬한 공업계 고등학교용 교과서인 <금속 가공 2>(1982.3.1.)도 그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정외과를 다니는 대학생이 굳이 읽을 이유가 없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 교과서는 판금, 프레스 가공, 열처리, 용접, 배관, 분말 야금, 표면 처리 등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고려대 생산기술연구소가 편찬한 공업계 고등학교용 교과서인 <금속 가공 2>(1982.3.1.) ⓒ 고려대 생산기술연구소

  
인천에 있던 현대정공 하청 회사에서 아주 초보적인 운동을 하던 노회찬은 1982년 가을 서울기계공고 부설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현 서울산업정보학교)에 들어가 용접기술을 배운다. 6개월 후인 1983년 2월 26일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을 딴다. 어영부영 다니며 그냥 자격증만 딴 것이 아니라, "근면 성실히 면학"한 상장과 "솔선수범한 학교생활" 표창장에서 알 수 있듯이 대단히 열심히 직업학교를 다닌 것이다.

"선반은 배우는 과정이 용접에 비해 두 배나 길었다. 그래서 결국 용접을 선택"했다는 노회찬.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먹고 살아야 해서 용접을 배웠다. 어떤 직업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맞느냐를 고민했을 때 용접이었다. 그리고 용접을 해도 아주 열심히 독하게 했다. 용접하고 1년 만에 용접 5년 경력의 사람하고 기술이 비슷했다.

왜냐하면 실력이 없으면 현장에서 말이 안 먹혔기 때문이다. 용접 실력은 형편이 없는데 점심시간에 '요즘 세상이 말이야'라고 하면서 떠들어봐야 먹히지 않는다. 일단 실력으로 인정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집에 오면 펜치로 붓을 물어서 연습을 하기도 했다. (...) 직업으로서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自由人 인터뷰', 2011.8.18.)


김어준과의 대화에서는 이렇게 이야기를 나눈다(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 노회찬과의 대화>, 꾸리에, 2010, 84쪽).

김어준 : "왜 하필 용접을 택해서 자격증 따려고 하신 거예요?"
노회찬 :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우선 기능 익히기가 다른 기능보다 쉬었어요. 선반, 밀링보다는 익히기가 쉬었어요. 두 번째는 더 흔해요, 이게. 그래서 쉽게 취직할 수 있는. 그때는 도망 다니다가도 취직할 수 있는 걸 연구 많이 했어요. 누구처럼 보일러 기사할 거냐. 그거 아니다. 토론도 많이 했고. 내린 결론이 용접이다, 해서 용접했고."
김어준 : "실제 용접공 생활은 몇 년 하셨습니까?"
노회찬 : "길진 않았죠. 3년. 하다가 집 털리고 이러니까 짐 다 놔두고 도망가고. 직장도 옮겨야 되고."
 

노회찬은 1982년 가을 서울기계공고 부설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현 서울산업정보학교)에 들어가 용접기술을 배운다. 6개월 뒤 그가 받은 각종 증서들. ⓒ 노회찬재단

 
노회찬이 제대로 처음 들어간 노동현장은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 있던 산업용 보일러회사(대림보일러)였다. 30~40mm짜리 두꺼운 철판을 써서 목욕탕 보일러나 합판공장용 보일러 등 산업용 보일러를 만드는 곳이었다. 첫 일당은 5000원이었다. 키친아트로 유명한 경동산업 초임이 1700~1800원이던 시절이었다. 보일러회사에서 6개월 일한 뒤에 산업재해를 당해 석 달을 치료받고 회사를 옮겼다.

옮긴 회사는 철도 차량에 들어가는 부품과 지하철 아치 등을 만드는 곳이었다. 아치형으로 빔을 만들기 위해 용접하는 일을 했다. 그가 만든 H빔은 당시 공사 중이던 지하철 2호선 강남 구간에 들어갈 철골구조물이었다. 일당은 한 6500원 정도 받았다고 한다.

노회찬이 말하는 그 시절의 일화 하나.

"어느 겨울이었는데, 밤에 갑자기 추워진 거예요. 마침 이사를 해서 이불도 없었고 연탄도 미처 준비하지 못했고... 내가 가르치던 노동자와 함께 자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죠. 혹시 덮고 잘 것이 있을까 하고 가방을 뒤졌더니 속옷과 양말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 내 양말 덮고 잔 적도 있어요.

야~ 그 밤은 정말 추운 밤이었는데... 그렇게 자고 아침에 일어나 고추장이랑 마가린에 밥을 비벼 먹고 출근했어요. 반찬 하나 없이."('<당원이 라디오>, 진보신당 대표 노회찬을 만나다 제1부: 지하철 2호선 H빔 용접한 노회찬, 서울시장 출마하다', 2009.12.28.)


하루 세 끼, 라면으로 한 달을 산 적도 있었는데 그때도 인생을 슬퍼하지 않았다. 돈이 없다고 해서 함부로 먹거나 안 먹는 것을 경멸했기 때문에 라면에는 꼭 파를 넣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최대한 맛있게 먹어야 하는 법. 재래시장 아저씨는 선지를 1000원어치 사면 주먹만큼 소기름을 줬다. 거기에 콩나물 팍팍 넣고 고춧가루를 넣으면 기름이 둥둥 떠있는 것이 아주 맛있단다. 대여섯 명이 둘러앉으면 대단한 소주 안주가 된다(임지은, '[인물탐험]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노회찬-노동자들의 슈바이처, 그 사랑의 줏대', <월간중앙> 2004년 10월호).

공장 노동자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가 공장에 다니는 동안, '운동권' 대학생들 사이에는 '존재 이전'이라는 이름 아래 현장 취업의 열풍이 불어 1985년쯤에는 전국에 위장 취업자가 1만 명은 되리라는 말까지 돌았다.
 

2005년 4월 24일 방송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특집 '한국의 진보' 3부작 제1부 '공장으로 간 지식인들'에 출연한 노회찬. ⓒ MBC 갈무리

 
출신 학교에 따라 소그룹을 만들거나 개별적으로 공장에 흩어진 이들을 전국적으로 조직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아도 수 차례 시위를 주동하느라 경찰의 추적이 시작돼 공장에 다닐 수도 없게 됐다(안재성, '약전: 멈추지 않을 진보정치의 꿈, 노회찬', 노회찬, <우리가 꿈꾸는 나라>, 창비, 2018, 155쪽).

1989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사건으로 구속될 때까지 수배 생활과 지하활동 속에서 그는 '도둑처럼' 도망다녔다. 지붕을 타고, 담벼락을 넘고...

2005년 4월 24일 방송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특집 '한국의 진보' 3부작 제1부 '공장으로 간 지식인들'에 출연한 노회찬은 용접 시연을 한 뒤 "오랜만에 해보니 참 감개무량하다, 역사의 뒷골목 무대로 사라진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다룬 프로그램이 있다는 게 감격스럽다"라고 밝혔다. 제작진에 따르면 노의원의 용접솜씨는 훌륭했다는 후문이다.
  
1985년 무렵 노회찬이 노동운동을 선택한 것을 알게 된 어머니의 첫 말씀은 "왜 이 길이냐, 왜 하필 이 길이냐"였다. 그럼에도 모친은 노회찬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였다. 이후 모친은 "노동운동 하려면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알아야 한다"라며 아들을 위해 노동계 신문기사를 스크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2006년 발간된 <명사 28인이 어머니께 드리는 감사장-어머니>에 수록된 '어머님의 신문스크랩 20년'에 노회찬은 이렇게 적고 있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감당 못할 무게감 때문에 감히 꺼내 읽지 못하는 글들이 있다. 1980년대 말 노동운동으로 감옥에 있는 동안 어머님이 보내주신 174통의 편지, 지난 20년 동안 아들과 함께하기 위해 신문기사를 모은 스무 권의 스크랩이 바로 그것이다. 스크랩 첫 권 맨 앞에는 '왜 하필 이 길을…'이라고 써놓으셨다."
 

2012년 8월 12일, 노회찬 의원의 어머니 원태순 여사가 국회의원회관 의원실 방문했을 당시 모습. ⓒ 노회찬재단



기록연재 | 조현연 노회찬재단 특임이사

[['기록으로 만나는' 노회찬의 꿈과 길 ②-2] 노회찬의 일갈 "인간을 신문지 넉장 반에 가둘 순 없다" 으로 이어집니다.( http://omn.kr/1nw6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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