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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석자는 주로 젊은 층이었지만, 집회의 취지에 공감한 한인 1세대들의 참석도 눈에 띄였다.
 참석자는 주로 젊은 층이었지만, 집회의 취지에 공감한 한인 1세대들의 참석도 눈에 띄였다.
ⓒ 이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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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현지 시각 6일 낮 12시. 미국 LA 한인타운 한복판에서 흑인인권운동을 지지하는 집회가 열렸다. 1992년 일어난 '4.29 사태(LA 흑인폭동)'로 많은 피해가 있었던 곳에서 열린 집회인 만큼 그 의미가 남달랐다. 윌셔파크 플레이스 잔디광장에 모인 800여 명의 참석자들은 '인종차별 철폐'를 외치고 경찰의 폭력성을 규탄하며 지난 5월 25일 경찰 가혹행위로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를 추모했다.

'흑인생명을 위한 아시안 라티노 연대(Yellow & Brown Folks United for Black Lives, 아래 연대)'가 주최한 이 집회에는 한인을 비롯한 아시아인과 라티노는 물론이고 백인, 흑인 등 다양한 인종의 주민들이 참여했다. 집회를 주도한 '연대'에는 한인 2세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다.

주최 측 김나라씨는 "여러 유색인들도 흑인의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음을 알리고, 반인종차별주의에 힘을 합하기 위해 집회를 열게 됐다"라면서 "한인이 큰 피해를 겪었던 '사이구(4.29)'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도 반드시 한인들이 나서야 한다"라고 힘줘 말했다.

흑인 드럼밴드가 연주하고, 한인 풍물패가 화답하고
  
 이 집회는 젊은 한인 2세들이 주도했고, 참석자도 대부분 젊은층이었다.
 이 집회는 젊은 한인 2세들이 주도했고, 참석자도 대부분 젊은층이었다.
ⓒ 이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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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회 참석자들이 조지 플로이드를 추모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집회 참석자들이 조지 플로이드를 추모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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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는 참석자들의 자유발언과 퍼포먼스로 2시간가량 진행됐다. 발언에 나선 전신영(65)씨는 "1992년 'LA폭동' 때는 한인들이 당한 피해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시위에 참가했었는데, 오늘은 다인종이 모여 평화롭게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집회가 있어서 나오게 됐다"면서 현 상황에서 한인 커뮤니티가 앞장서서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애너하임에서 왔다는 스테파니씨는 "주변에서 열린 집회보다 아시안과 라티노가 주축이 돼 준비한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아 1시간을 운전해서 참석했다"라고 말했다. 한인 참석자들의 지지발언이 이어지자, 발언에 나선 한 흑인 여성은 "돈만 밝히는 것으로 알았던 한인에 대한 이미지가 오늘로 많이 바뀌게 됐다, 여기서 여러분들과 함께하게 돼 고맙다"고 말하며 한국어로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집회는 네 명으로 구성된 흑인 드럼밴드의 연주가 끝난 후, 한인 풍물패가 함께 즉흥연주를 이어가면서 절정을 이뤘다. 참석자들은 드럼밴드와 풍물패의 연주에 맞춰 몸을 움직이고, 구호를 외치며 하나가 됐다. 한인타운에서 열린 이 평화로운 집회는 공동체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의미가 있었다.
 
 흑인 드럼밴드와 한인 풍물패가 즉흥연주를 하고 있다.
 흑인 드럼밴드와 한인 풍물패가 즉흥연주를 하고 있다.
ⓒ 이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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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벌어진 논쟁

그러나 한인들이 많이 찾는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이 집회를 못마땅해 하는 의견도 많이 있었다. 이 시각의 기저에는 물론 '경험'이 깔려있다. 그 경험은, 'LA폭동' 때의 피해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흑인과의 갈등일 수도 있다. 혹은 이번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 기간 중 벌어진 약탈의 피해일 수도 있다. 이번 시위 기간 중 LA한인들은 과거에 비해 큰 피해를 보진 않았지만, 필라델피아 한인들은 큰 재산상의 피해를 봤다.

온라인에서 한인들의 지지집회를 반대하는 목소리는 하나로 요약된다. "다 잃고 또 내어주자는 것이냐?" 이런 집회로 흑인 커뮤니티를 지원해도 그들은 고맙게 생각하지 않고 당연하게 여길 거라는 것이다. 흑인들은 백인들에게 받은 패배의식과 분노를 아시안에게 푼다는 주장도 있고, 동양인에 대한 차별은 놔두고 왜 흑인운동에 같이 나서느냐는 주장도 있다. '흑인들은 게으르다' '성찰의 자세가 돼 있지 않다'는 더 날이 선 주장도 있다.

한인타운에서 자영업을 하는 박상진씨는 다른 생각을 밝혔다. 박씨도 '사이구'의 피해자이고, 개인적으로 흑인과의 좋지 않은 경험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두려움과 편견을 벗어 버리고 공감과 이해의 마음을 가질 때, 속마음이 담긴 대화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한 관계가 하나둘 늘어날 때, 미국사회의 인종갈등은 일상에서부터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같은 경험, 다른 해석
 
 한인 전신영씨가 지지발언을 하고 있다. 길 건너편에는 LA한인타운에 주둔한 주 방위군의 모습이 보인다.
 한인 전신영씨가 지지발언을 하고 있다. 길 건너편에는 LA한인타운에 주둔한 주 방위군의 모습이 보인다.
ⓒ 이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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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타운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도, 참석하지 않고 반대한 사람들도, 1992년의 '사이구'를 말한다. 그런데 그 해석은 사뭇 다르다.

미주 한인에게, 특히 LA에 사는 한인에게 1992년 4월 29일은 절대 잊히지 않는 악몽이다. 교통단속에 걸린 흑인 로드니 킹을 무자비하게 폭행한 LA경찰들이 무죄판결을 받던 날, 흑인 커뮤니티는 극심한 분노에 휩싸였다. 그 분노가 시작된 4월 29일부터 LA는 폭행과 살인과 약탈과 방화가 난무한 무법천지가 6일 동안 계속되었다. 캘리포니아 주 방위군은 물론이고 연방 군대가 투입되고 나서야 이 소요는 멈췄다.

그 기간 동안 63명이 사망했고, 2383명이 다쳤으며, 10억 달러(약 1조2048억 원)가 넘는 재산피해가 생겼다. 한인 사망자도 1명이 있었으며, 수많은 사람이 부상을 입었고, 전체 재산피해의 반은 한인이 입은 피해였다. 공권력이 보호하지 않은 LA한인타운이 약탈과 방화의 먹잇감이 됐기 때문이다. 약탈이나 방화 피해를 입은 한인상점은 무려 2300여 곳에 달했다.

소수계 이민자인 한인들은 애써 일궈놓은 재산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경제적 피해를 입었고, 그날의 상흔은 집단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미주 한인들은 1992년 4월 29일의 사건을 'LA폭동'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을 'LA폭동(LA Riot)'이라고 부르면 피해자의 입장이 강조되면서, 흑인이 받아온 억압과 이에 대한 분노는 사라지고 약탈과 방화만 남는다. 그래서 흑인의 입장을 강조하는 측에서는 'LA봉기(LA Uprising)'라고 부른다. 그러나 약탈과 방화로 인해 주저앉은 피해자의 아픔이 가려져버리기 때문에 가치중립적으로 '사이구'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사이구'를 겪으면서 한인 커뮤니티는 두 가지를 배웠다. 하나는 소수계 이민자 커뮤니티를 지키기 위해서는 한인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점이다. 이 사건 이후 한인 중심의 시민운동단체들이 생겨났으며, 유권자 수를 늘리고 선출직으로 진출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되었다. 다른 하나는 한인 커뮤니티가 다른 커뮤니티와 공생하는 데 소홀했다는 인식을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른 커뮤니티와의 공감대를 넓히고 더불어 살아야한다는 인식은 깊은 성찰로 이어지지 못했고, 가시화된 성과를 내는 데도 부족함이 있었다. 한인들이 받은 집단 트라우마가 큰 장애였고, 한인들의 배타적인 문화도 영향을 주었다. '사이구'를 겪었지만 흑인운동을 지지한다는 이용식씨는 이렇게 말한다.

"인종차별에 대한 역사를 다시 한 번 고찰하고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공감능력을 키우는 것이 한인타운이 뚝 떨어진 섬이 아닌, 같이 사는 커뮤니티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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