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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십대는 '겁없는 하룻강아지'였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은 충분하다고 여겼고, 선배들의 조언은 모두 세상의 변화를 모르는 소리라며 무시했다. 인생의 답을 알아챌 만큼 현명하다 여겼으니, 타인의 삶을 재단하며 비난하는 데 겁이 없었다.

삶을 기나긴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다양한 굴곡의 과정이 아니라, 목표를 향해 끝없이 오르는 계단이라 여겼다. '성취' 너머의 연속적인 시간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민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계단을 오르고 싶었고, 그 성취의 끝에서 나를 기다릴 '성공적인 인생'을 의심하지 않았다. 성급했다.

마흔이 넘은 지금, 나는 그 시절의 내 실수가 떠오를 때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다. 누구보다 빨리 목표의 계단에 올랐다 여겼던 순간의 환희는, 그 후로 이어진 기나긴 고민의 시작이었다. 인생은 예상보다 너무 길었고, 나는 기나긴 인생을 현명하게 살아갈 준비가 없이 세상에 던져졌다.  
 
나무 의사 우종영 작가의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 겉표지.
 나무 의사 우종영 작가의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 겉표지.
ⓒ 메이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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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하는 인생에 대한 고민은 여전하지만, 오늘은 나무 의사 우종영 작가의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를 통해 얻은 지혜를 소개하고 싶다.

이 책에서 소개된 이야기들은, 우종영 작가가 나무 의사로서 살아온 30여 년의 세월 동안 나무와 자연을 통해 얻은 것들이다. 인간의 수명을 훌쩍 뛰어넘는 생명체인 나무가 전해주는 이야기라서일까. 인생 어느 한순간의 경험을 자랑하는 인간의 이야기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동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견디기 힘든 순간들이 있다. 아무 걱정 없어 보이는 사람도 말 못 할 속 사정은 하나씩 다 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이 무탈한 하루는 생각보다 자주 오지 않는다. 또한 인생은 너무 길기 때문에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아끼고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내 인생을 책임져야 할 유일무이한 존재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 p.240 (벚나무의 가르침 중)

언제부터인가 인간의 삶을 통해 얻어지는 가르침을 믿기 어려워졌다. 젊은 날의 내가 따르고자 했던 '삶의 모델'들은 세월의 더께가 얹히며 빛나던 모습을 잃어가기 일쑤였다. 절대적인 애정의 대상이었던 '우상'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배신감을 느끼게 했다.

인생은 결코 짧지 않고, 살아내야 하는 인생은 어느 한순간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따라가야 한다고 믿었던 삶의 모습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나는 쉽게 길을 잃었다. 내가 누군가의 삶을 통해 나의 삶을 교정하고, 그들의 삶을 흉내내려 한 게으름의 대가였다. 

며칠 전, 엠마 톰슨의 2019년 작품 <레이트 나이트>를 보았다. 엠마 톰슨이 연기한 케서린 뉴베리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토크쇼를 10년 넘게 진행하는 '성공한' 진행자이다. 하지만 위기가 닥친다. '진행자를 교체하겠다'는 방송국의 결정에 반발하며 자신의 쇼를 지켜내려 애를 쓰는 과정이 영화의 주된 이야기이다.

좋아하는 배우의 나이 든 모습을 볼 수 있다는 반가움에 선택한 작품이었는데, 영화가 던진 질문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당신은 정말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고 있나요?' 주인공은 거칠고 냉혹한 경쟁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승리했다고 믿었지만, 알고 보니 세상이 정해놓은 틀 안에서 세상의 잣대에 따른 것뿐이었다.

세상이 더 이상 그녀의 이야기를 쓸모 있게 여기지 않은 것도, 그것이 그녀의 목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완벽하게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려면 스스로의 목소리를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내 삶에 대한 고민과 연결되어 생각할 거리를 풍성하게 던져주는 작품이었다.

인생이 어느 한순간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타인이 정해놓은 삶의 방식대로 사는 것도 나쁜 방법은 아닐지 모르겠다. 지금 뛰고 있는 경기장에서만 1등을 하면, 그 순간의 영광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내가 네 나이였을 때는 말이야'를 되풀이 하는 것만으로는, 남은 인생 대부분을 '꼰대'라며 외롭게 보낼 수밖에 없다. 별 볼일 없는 마흔이 되고 보니, 가끔은 나의 빛나던 스무 살 시절을 펼쳐놓고 자랑하고 싶은 욕망이 불타오를 때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범 무서운 줄 아는' 정도의 현명함도 생겼다. 
 
흔히 경쟁이 성장의 동력이 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과도한 경쟁은 목적을 잃게 하고 회의감을 불러일으키며, 종국엔 지금 자기가 어디 즈음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든다. 가장 큰 문제는 피라미드식 경쟁구조는 1등이어도 그것을 계속 지키기가 너무 어렵다는 데 있다. 치고 올라오는 사람이 너무 많기에 1등에서 밀려나는 건 순식간이다. 밀려난 즉시 사람들이 보내던 찬사와 환호 또한 사라지고 남는 건 삶의 허무뿐이다.
- 235p. '소나무의 가르침' 중

돌이켜보면, 스무 살의 내가 성급했던 이유는 인생을 '순위가 정해지는' 단거리 경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뛰는 트랙을 가장 빨리 마치는 것만으로, 인생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여겼다. 대학원을 다니던 이십 대 때의 목표가 '좋은 연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른이 되기 전에 박사학위를 마치는 것'이었으니 방황은 예견되어 있었다.

가방끈이 길어진다고 내 삶의 목소리를 더 잘 듣게 되는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서둘렀을까. 모두가 똑같은 트랙을 뛰고 있다고 강요하는 세상의 틀을 벗어나서, 각자의 속도로 살아가는 나무들처럼 생각했더라면 조금은 덜 방황하지 않았을까?
 
여름의 산을 생생하게 하는 것은, 하늘을 향해 한껏 뻗어오른 가지를 가득 채운 초록의 잎이었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향한 기운이, 우리의 삶에도 응원을 전하는 것만 같았어요.
▲ 초록이 가득한 여름산의 기운 여름의 산을 생생하게 하는 것은, 하늘을 향해 한껏 뻗어오른 가지를 가득 채운 초록의 잎이었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향한 기운이, 우리의 삶에도 응원을 전하는 것만 같았어요.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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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가다 보면, 그들의 삶에서 '운명'을 느낀다. 그들은 다른 생물들이나 주변 환경의 도움을 얻어 싹을 틔울 장소까지 이동해야 했을 테고, 싹을 틔울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때까지 씨앗 안에서 인고의 시간을 견디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싹을 틔우고 생명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이후로는 오직 하나의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굳건히 뿌리를 내린 후, 묵묵히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고 성장하는 것 말이다.

집요하게 태양을 찾아내고, 바위틈의 좁은 틈새로도 끈질기게 뿌리를 뻗어나가 물을 끌어들인다. 살아남기 위한 그들의 몸부림은 때때로 그들의 모습까지도 바꿔버린다고 한다.

'주엽나무가 환경의 위협을 버텨내기 위해 몸을 가시로 둘러싸기도 한다'는 대목을 읽을 때에는, 아침 출근을 준비해야 하는 것도 잊고 한참을 먹먹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무의 삶은 결국 버팀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버틴다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굴욕적으로 모든 걸 감내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하지만 평생 나무를 지켜본 내 생각은 다르다. 나무에게 있어 버틴다는 것은 주어진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 내는 것이고, 어떤 시련에도 결코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버틴 시간 끝에 나무는 온갖 생명을 품는 보금자리로 거듭난다. 그러니 가시 투성이의 흉한 모습으로 변하면서까지 버틸 필요가 있느냐고 비아냥대는 것은 옳지 않다. 굴욕적인 겉모습까지 감내하며 끝까지 버티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오히려 칭찬해 줘야 마땅하다. 정호승 시인은 견딤이 쓰임을 결정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나 나무나 삶을 제대로 살아 내는 과정에는 오로지 버텨내야 하는 순간이 있는 듯하다. 나는 오늘도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건투를 빈다.
- 57~59p.

마흔의 나는 아직도, 내 삶의 목소리를 찾아내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중이다. 출근하기 싫은 아침을 견디고, 이해할 수 없는 조직의 결정을 버티고, 내 생각을 말한다는 것만으로 유별난 것으로 취급받는 일상을 견디며, 하루에도 몇 번씩 그만두고 싶은 유혹을 떨쳐내는 중이다.

서른 살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현실을 도망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도망치는 것만으로는 답을 찾지 못할 것도 안다. 그러니, 매일을 지독하게 견디고 버틸 뿐이다.

꼰대로 늙어가지 않기 위해, 쓸모없는 사람으로 내쳐지지 않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말이다. 결국, 이 모든 버팀의 순간을 통해 내가 가장 기대하는 것은, 내 삶을 온전히 나의 목소리로 살아가는 것이다.

지난 주말, 봄부터 몇 번이나 올랐던 근교의 산을 다시 찾았다. 봄의 초입 빛으로 가득 찼던 산길은, 나무마다 경쟁적으로 피워낸 초록으로 그늘을 드리웠다. 여름 산의 생생한 기운은 코로나19로 지쳐가는 마음에 활기를 주었다. 나무마다 가득 피어난 초록은, 나의 삶을 응원해 주는 것만 같아서 감사했다. 일단, 나무들이 넉넉하게 채워준 기운으로 조금은 더 견뎌봐야겠다. 혹시라도 지금을 버티고 있다면, 당신에게도 응원을 전한다.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 - 세상에서 가장 나이 많고 지혜로운 철학자, 나무로부터 배우는 단단한 삶의 태도들

우종영 (지은이), 한성수 (엮은이), 메이븐(2019)


태그:#오늘날의 책읽기, #나무의사 우종영, #자연의 가르침, #나무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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