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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는 바쁜 서울 생활, 뜻대로 되지 않는 연애와 취업 그리고 맛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지긋지긋한 인스턴트 음식들에 진절머리가 난 김태리(혜원 역)가 등장한다. 그녀는 새하얗게 쌓인 눈을 사박사박 밟으며 고향집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하얀 눈 속에 묻힌 배추를 뽑아오더니 금세 배춧국을 완성한다. 갓 지은 하얀 쌀밥 한 그릇을 눈 깜짝할 새에 뚝딱하더니 그녀는 배를 두드리고는 그대로 누워버린다.

우리의 기억 중에 가장 오래 남는 것은 후각이라고 한다. 찜기에서 익어가는 고소한 떡 익는 냄새, 막걸리 담은 통에서 나는 시큼한 술 냄새, 꽃 파스타의 푸릇푸릇하고 싱그러운 향기와 오꼬노미야끼 위에서 비틀리는 가다랑어 냄새까지. 영화 속에서 김태리는 요리를 하면서 유일한 가족이자 요리 스승이었던 엄마와의 추억들을 떠올렸다.

나의 엄마

나의 엄마는 내게 요리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부엌에서 절구에 마늘을 찧던 소리, 국이 끓으며 냄비 뚜껑을 들썩이던 소리, 압력 밥솥의 김 빼는 소리들이 뚝딱뚝딱 온 집을 울려도 엄마는 도와달라고 일절 말한 적이 없다.

나와 두 살 터울 남동생까지 넷이서 살던 집은 1층짜리 단칸방이었고 화장실은 밖에 있는 '푸세식' 공동 화장실이 전부였다. 부엌은 신발을 신고 나가야 하는 곳에 위치했고 거기서 밥을 차려 가지고 들어오는 것도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아이들에게 요리 재료를 다듬는 작은 일거리나 부탁은 위험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8살 터울의 여동생이 태어날 무렵이었나. 우리는 2층 주택으로 이사를 갔다. 거기도 역시 화장실은 밖에 있었으나 다행히 수세식이었고 부엌은 방 안에 있었다. 조금 덜 위험해진 환경이 됐으나 엄마는 여전히 숟가락을 놓아달라는 일 조차도, 물 컵을 가지고 와달라는 것조차도 나에게 하나 부탁한 적이 없었다.

그 무렵쯤, 엄마는 장바구니 겸 끌차인 까만 손수레를 통통 튀기며 집을 나서곤 했다. 그리고 한참 뒤에 초록색 그물망에 가득 들어있는 밤 자루를 몇 포대씩 싣고 2층이었던 우리 집에 낑낑거리며 올라오셨다.

엄마의 손놀림

그때 우리 동네에서는 그렇게 밤 자루를 끌고 가는 아주머니들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엄마는 가지고 온 밤 자루를 열어 밤을 커다란 대야에 부어놓고 고무장갑 엄지를 잘라 엄지손가락에 골무로 끼셨다. 그리고 아주 날카롭다며 나에게 여러 번 주의를 주고는 밤 깎는 칼을 들고 밤을 까기 시작했다.

밤의 겉껍질을 깐 후 율피를 깎는 것은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세심한 일이었다. 율피를 지나치게 두껍게 깎아버리면 깐 밤의 무게가 가벼워져서 킬로그램당 쳐주는 밤 가격을 제대로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속껍질을 얇게 자르느라 집중하던 엄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자르던 와중에 속이 썩어 많이 잘라내야 하는 밤이 나오면 엄마가 드시곤 했는데 나도 먹고 싶어 하는 눈길로 쳐다보면 예쁘게 자른 것들 중 하나를 주시곤 했다. 달고 고소한 생밤이 어찌나 맛있었는지 나는 엄마가 밤을 깎으면 뭐라도 하나 또 떨어질까 싶어서 옆에 머물렀다.
   
어린시절 나의 집
▲ 집 어린시절 나의 집
ⓒ 양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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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동생도 밤을 원래 좋아했고 생밤이라도 얻어먹으려고 계속 붙어있자 엄마는 한 덩이를 따로 덜어내서 밤조림을 만들어줬다. 밤에 물을 자작하게 붓고 설탕과 소금을 넣어 졸이면 밤 익는 고소한 냄새가 온 집안에 퍼졌다. 노랗게 익은 밤에 달콤한 설탕이 진득하게 묻은 밤조림은 그야말로 별미였다. 나에게 밤조림이란 엄마가 만들어 주셨던, 노랗고 설탕이 반짝반짝한 모양이다. 이렇게 간단하게 맛있는 간식을 만들 수가 있다니. 물론, 깐 밤이 준비돼 있어야겠지만 말이다.

가을이 되면 집 뒷산 밤나무에 가서 땅에 떨어진 밤송이를 발로 밟아 열었다. 그 속에 알알이 들어있던 잔잔한 밤을 주머니에 가득 담아오면 엄마는 밤을 삶아 반으로 잘라 주었다. 삶은 밤을 쟁반에 펼쳐두고 찻숟가락으로 퍼먹었던 것도 눈에 선하다. 나는 그저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에 앉아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는 아이였던 시절이 참 그립다.

스무 살 여름, 엄마는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나는 그제야 먹고살아야 한다는 것이 피부에 와 닿았고 음식은 과연 어떻게 만드는 것인지 초록창에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땅 짚고 헤엄치는 수준으로 만들기 시작한 요리는 물론 처음에는 대부분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우리 엄마도 요리를 참 잘했는데 다행히 그 손맛의 새끼손톱만큼의 지분을 물려받았는지 몇 년 후, 다행히 조금씩 맛이란 걸 내기 시작했다.

강요된 희생

나는 나이가 들고, 30대가 돼 엄마가 예전에 해줬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올려 보고 나서야 엄마의 마음을 조금씩 알 것 같았다. 엄마는 4남매의 둘째로 태어난 장녀였다. 그 시절엔 딸들이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하고, 집안의 남자들은 공부를 하도록 뒷바라지하는 시대였다.

엄마의 오빠였던 큰외삼촌은 일찍이 공부에 흥미가 없었지만 막내로 태어난 외삼촌은 모두의 기대를 등에 업고 4남매 중 누구도 다닌 적이 없는 대학교에 입성했다. 대학 입학까지 외할머니 대신 뒷바라지를 해준 건 우리 엄마였다. 그 시절엔 딸이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딸에게 비자발적인 희생을 강요했을까.

나는 우리 엄마가 나의 고등학교 입학식에서 몰래 숨어 눈물을 훔치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중졸에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공장일과 살림뿐이었던 엄마는 내가 자기처럼 살길 바라지 않았던 것이리라.

고등학교 입학하는 딸을 보며 자신의 한을 푼 것처럼 울컥하던 엄마에게 나는 큰 위로였을 것이다. 그런 엄마의 자랑스러웠던 딸이 엄마가 사라지고 난 인생에서 할머니와 아빠로부터 비자발적인 희생을 강요받으며 고통받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겠지?

공부 때려치우고 집에서 아빠 좋아하는 반찬이나 만들며 동생들 뒷바라지하며 살아야 한다고 고함치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엄마는 여자이고 딸이었던 내게 오게 될 '강요된 희생'을 자신의 온몸으로 막아서고 있었나 보다. 그리고 나는 나를 위해 애썼던 엄마의 노력을 물거품처럼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그저 묵묵히 내 길을 걸었다. 누군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인생으로 나를 내던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요리 하나도 할 줄 모르고 집안일 하나도 할 줄 모르지만 강요된 희생 따위는 거절할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

생밤

지금도 지나가다 생밤만 보면 엄마가 떠오른다. 밤 하나 입에 넣고 맛있게 먹는 날 보던 엄마의 마음을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엄마가 있었던 시절, 나에게 엄마는 달콤한 밤처럼 내게 큰 힘이 되어주는 존재였음을 이제야 고백한다.

그렇기에 인스턴트 음식들에 지긋지긋해질 때면, 음식 냄새 폴폴 풍기며 밥을 짓던 엄마가 떠오른다. 그리고 밤 조림이 그리워 사 먹는 날에는 꼭 실망을 한다. 아무리 생김새가 그럴싸해 보이고 노랗게 설탕에 졸여진 밤이 반짝반짝거려도, 엄마가 직접 껍질을 깎아 졸여준 내 어릴 적 먹던 밤 조림 맛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나 많은 밤을 더 졸여야 엄마의 맛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나는 현재 두 딸의 엄마다. 나는 우리 아이들과 잘하지도 못하면서 간간히 요리교실을 연다. 아이들의 작품은 심각하게 엉망진창이지만 그저 엄마와 무언가를 조물 거리며 만든다는 자체가 즐거운 것 같다.

나는 콩나물 대가리 떼는 게 귀찮은 데 아이들은 서로 떼겠다고 난리인 게 참 아이러니다. 아이들은 그저 엄마라는 이유로 엄마를 좋아하고 엄마와 함께한다는 이유로 뭘 하든 그저 행복한 것 같다. 내 아이들은 나를 어떤 요리로 기억할까. 내 아이들은 나를 어떤 냄새로 기억할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세상을 버틸 힘이었으면 좋겠고 어려움을 넉넉히 이겨낼 사랑의 냄새였으면 좋겠다.

태그:#어린시절, #그립다, #엄마, #엄마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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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문화예술기획자/ 『오늘이라는 계절』 (2022.04, 새새벽출판사) 울산북구예술창작소 감성갱도2020 활동예술가 역임(2022) 『사는 게 만약 뜨거운 연주라면』 (2023.10, 학이사) 장생포 아트 스테이 문학 레지던시 작가(2024) (주)비커밍웨이브 대표, (사)담문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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