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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 제14대 대통령 취임선서
 김영삼 제14대 대통령 취임선서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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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 선언'을 얻어내다

통일민주당이 창당할 그즈음인 1987년 4월, 전두환은 88서울 올림픽을 빙자해 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재야 시민세력과 연합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고 직선제 개헌을 위한 장외투쟁에 나섰다. 1987년 6.10항쟁으로 이어지는 이 거대한 항쟁은 마침내 6.29선언을 얻어냈다.

직선제 개헌을 위해 김영삼‧김대중 양 김씨는 단합했다. 하지만 막상 직선제 개헌안이 관철되고, 그해 7월 10일 김대중이 사면 복권되자 곧 이전의 불출마 선언을 번복하자 공동전선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동교동(김대중) 측은 '1986년 11월의 불출마 선언은 전두환이 자발적으로 직선제를 수락했을 때는 유효하지만 4.13호헌 조치로 제안을 거부했던 만큼 이미 무효화'라는 논리였다.

하지만 당시 국민들의 요구는 후보단일화였다. 김영삼은 당내 경선을 제안했지만 김대중은 그 제안에 반대했다. 상도동(김영삼) 측은 민추협을 만들 때나 통일민주당을 만들 때도 지분은 똑같이 50대 50이었으므로 공평한 게임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교동 측에서는 같은 지분이라도 당권을 가진 쪽이 훨씬 더 유리하다는 판단이었다.

이후 동교동 측은 '4자 필승론'을 내세운 뒤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고 김대중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한편 같은 무렵에 정계에 복귀한 김종필도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대권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러자 13대 대선은 이른바, '1노3김'의 대결이 됐다. 이는 신군부의 필승전략 시나리오이기도 했다.
  
 거제도 김영삼 생가 안채
 거제도 김영삼 생가 안채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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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대통령 선거

선거전에 돌입하자 지역감정 대결의 양상이 나타났다. 김영삼 후보가 호남으로 갔을 때는 돌멩이가 날아오는 수난을 당했다. 김대중 후보가 영남에 갔을 때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게다가 대선 18일 전에 발생한 대한항공(KAL기) 공중 폭파사건은 김영삼에게 악재였다. 야권 분열은 결국 신군부의 작전대로 노태우 후보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줬다.

그해 12월 16일에 실시된 13대 대통령 선거는 경합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초반부터 우세를 보이던 노태우 후보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1위 노태우 36.6%(828만 표), 2위 김영삼 28.0%(633만 표), 3위 김대중 27.1%(611만 표), 4위 김종필 8.1%(182만 표)로 나타났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득표를 합치면 55%로 노태우의 득표율 26.6%를 크게 앞질렀다. 이로써 양김씨는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따가운 국민적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

대선에 이어 1988년 4월 26일에 치러진 총선 결과, 전국구를 포함해 여당은 125석을 얻었다. 반면 야당은 평민당 70석, 민주당 59석, 공화당 35석, 기타 10석을 기록했다. 김영삼의 민주당은 김대중의 평민당보다 득표수는 앞섰으나 의원 수는 뒤지는 성적표를 받았다. 하지만 여소야대 정국이 만들어졌다. 평민당, 민주당 공화당 의석수의 합이 여당인 민정당의 의석수를 크게 앞질렀다.
  
 3당 합당(왼쪽부터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
 3당 합당(왼쪽부터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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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 합당

이렇게 되자 노태우는 이른바 보수 대연합론으로 합당을 추진했다. 정국안정을 노린 노태우, 차기 대권을 노린 김영삼, 내각제를 꿈꾸는 김종필 3인의 이해가 합치돼 세 사람은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을 선언했다.

이에 대해 재야에서는 '야합'이라고 비난했지만 김영삼은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라는 말로,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군부세력을 척결한 뒤 이 나라에 문민정부의 기틀을 잡을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1990년 1월 3당 합당 후 민자당이 창당되자 김영삼이 당 대표를 맡았다. 하지만 김영삼의 앞날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 위기는 내각제 합의문 파동이었다. 이에 김영삼은 자신을 음해하는 모략이라면서 당무를 거부하고 낙향하는 강수로 내각제 포기를 얻어냈다.

이후에도 여러 위기가 있었지만 김영삼 특유의 뚝심으로 밀어붙인 뒤 1992년 5월 19일 민자당 전당대회에서 제14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이에 앞서 1992년 5월 15일 국민당 정주영, 일주일 뒤인 5월 26일에는 평화민주당 김대중이 각각 제14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돼 본격적인 대통령 선거전에 돌입했다. 선거 과정 중 초원복집 사건 등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지만 각종 선거전에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치른 김영삼은 상대를 이기는 맥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맞수 김대중 후보를 '좌파'로 몰아붙인 다음, 정주영 후보에겐 돈으로 대통령 자리를 매수하려 든다고 집중 포화를 쏘아댔다. 1992년 12월 18일에 치러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마침내 김영삼은 승리했다.
  
 제14대 대통령선거 벽보
 제14대 대통령선거 벽보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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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만에 이룬 꿈

김영삼은 총 유효표의 41.4%(997만 표)를 얻어 2위인 김대중 후보를 194만 표 차이로 누르고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3위의 정주영은 388만 표를 얻었다. 대통령 당선자 김영삼은 마산에 사는 아버지 김홍조 옹을 찾아가서 큰절을 드린 뒤 당선 통지서를 보이면서 말했다.

"아버지, 이걸 타기 위해 40년이 걸렸습니다."
  
 거제도 김영삼 생가와 대통령 기록관
 거제도 김영삼 생가와 대통령 기록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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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다음 날 아침 김대중은 민주당 마포 중앙당사 5층 기자회견장에서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발표했다.
 
"저는 또다시 국민여러분의 신임을 얻는데 실패했습니다. ... 저는 오늘로써 국회의원 직을 사퇴하고 평범한 시민이 되겠습니다. 이로써 40년의 파란 많았던 정치생활에 사실상 종말을 고한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한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간 국민 여러분의 막중한 사랑과 성원을 받았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이제 저는 저에 대한 모든 평가를 역사에 맡기고 조용한 시민생활로 돌아가겠습니다. ..." - <김대중 회고록 1권> 606쪽

김영삼은 부산 경남중학교 시절부터 하숙집방 책상 앞에 붙여놓은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꿈을 마침내 45년 만에 이뤘다. 하지만 그의 승리는 그가 줄기차게 추구해온 군정종식이 아닌, 군사정권과의 야합으로 대권을 움켜쥐었다. 이는 역사가 기록할 것이다.
 
 평생동지요 라이벌인 김영삼과 김대중
 평생동지요 라이벌인 김영삼과 김대중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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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이광복 지음 <인간 김영삼> / 강준만 지음 <한국현대사> 등 수십 권의 참고자료와 동시대 신문 및 여러 사람들의 증언으로 쓴 기사임을 밝힙니다.


태그:#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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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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