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조선의용대'의 영혼으로 기려진 석정 윤세주는 타이항산 폔청전투에서 전사 순국했다.
  "조선의용대"의 영혼으로 기려진 석정 윤세주는 타이항산 폔청전투에서 전사 순국했다.
ⓒ 밀양시

관련사진보기

 타이항산 연화산 아래의 윤세주 열사 초장지. 돌비에 ‘조선 민족 영령’이라는 글귀를 한글 풀어쓰기로 새겼다.
 타이항산 연화산 아래의 윤세주 열사 초장지. 돌비에 ‘조선 민족 영령’이라는 글귀를 한글 풀어쓰기로 새겼다.
ⓒ 김태빈

관련사진보기


1942년 6월 3일, 조선의용대 화북(華北)지대 정치위원 석정(石正) 윤세주(尹世胄, 1901~1942)가 타이항산(太行山) 석굴에서 순국했다. 허베이(湖北)성 폔청(偏城)에서 일본군의 제팔로군 소탕 작전에 맞서 싸우다 총상을 입은 지 닷새 만이었다. 

폔청 전투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중국 타이항산맥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운 타이항산 전투 가운데 후자좡(胡家庄) 전투·싱타이(邢台) 전투(1941)와 함께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1942년 5월 28일, 허베이성 셰현(涉縣)의 북쪽 가장자리 산시성 경계에 있는 폔청에서 시작된 이 전투는 일본군의 소탕 작전에 대항한 팔로군의 반 소탕전으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5월 29일 항일 연합군사령부에서는 조선의용대에게 탈출로를 확보해 전군이 탈출하도록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일본군이 점령한 양쪽 산봉우리 사이의 탈출로를 내고자 조선의용대는 전 대원이 탈출할 때까지 두 산봉우리를 공격하여 작전 개시 5시간 만에 탈출로를 확보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석정은 허벅다리에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사흘 후에 동지들이 그를 발견했으나 중태였고 6월 3일에 결국 숨을 거둔 것이다. 약산 김원봉(1898~1958)의 죽마고우로 함께 의열단을 설립하고 이육사(1904~1944)의 지기였던 석정 윤세주는 "동지를 위하여 혁명을 위하여 죽었다고 말해짐을 두려워하지"(조선혁명간부학교 2기 졸업식 훈화, 1934.4.23.) 않고 마흔한 살의 불꽃 같던 삶을 마감했다.

'밀양 사람' 윤세주, 의열단에서 조선의용대까지    
 
 밀양 해천 주변 항일테마 거리에 그려진 벽화. '의열단 조선의용대의 영혼'이라 적혔다.
 밀양 해천 주변 항일테마 거리에 그려진 벽화. "의열단 조선의용대의 영혼"이라 적혔다.
ⓒ 장호철

관련사진보기


동향의 벗 약산과 항일투쟁의 삶을 함께한 윤세주는 밀양 사람이다. 일본 식민지 통치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던 석정은 어릴 적부터 반골 기질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보통학교 시절에 이른바 '천장절'(일왕 생일)에 일본인 교장한테서 받은 일장기를 변소에 처박아버리는 결기를 보일 정도였다.

그가 항일정신과 의지를 정립한 데는 밀양의 사립 동화중학 전홍표(1869~1929, 2018 건국포장) 교장의 영향이 컸다. 석정은 전 교장의 애국 사상에 감화되어 학교 내 비밀결사인 연무단(練武團)을 조직하고 당시 금지됐던 개천절 기념행사를 벌이며 시위를 벌였는데 이 사건으로 동화중학은 문을 닫아야 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한 석정은 만세운동을 확산하고자 고향에 내려가 동지들을 규합했다. 3월 13일 오후 1시쯤 수천 명이 모인 밀양 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장날 시위를 주도했는데 당시 그는 18살이었다. 

석정은 일본 경찰의 수배를 피해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망명길에 올랐고 일제는 그해 4월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궐석재판으로 그에게 징역 1년 6월을 선고했다. 석정은 국내의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신민회의 결의로 랴오닝성(遼寧省) 유하현에 세운 독립군양성 기관인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정식 군사훈련을 받았다.

석정은 1919년 11월, 죽마고우 김원봉을 비롯하여 황상규(1891~1931, 1963 독립장)·곽재기(1893~1952, 1963 독립장) 등 13명과 함께 지린성(吉林省)에서 조선독립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무장 항일투쟁을 결의했다. 그는 의열단의 첫 목표로 일제 요인 암살과 총독부·동양척식회사 등 주요 기관을 폭파할 계획을 세워 같은 해 연말께 신철휴(1898~1980, 1990 애국장)·윤치형(1893~1970, 1990 애국장) 등과 함께 국내에 특파되었다.

그러나 부산과 밀양에 반입된 폭탄과 무기, 그리고 선언문 등이 일경에게 발각되면서 그는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921년 6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1927년 출옥한 석정은 1932년 여름 다시 중국 난징으로 망명했다. 
   
1932년 10월, 석정은 의열단장 김원봉이 장제스의 지원으로 난징교외에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1932~1935, 정식 명칭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대)에 입교하여 이듬해 4월 제1기로 졸업했다. 그해 11월, 난징에서 독립운동가들의 협동전선 모임인 한국대일전선 통일연맹(아래 통일연맹)이 결성되자, 석정은 송병조·김두봉·김규식·윤기섭·최동오 등과 함께 중앙집행 상무위원으로 선출됐다. 

'조선의용대의 영혼'이 덩샤오핑을 살렸다

통일연맹의 결성은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 의거(1932) 뒤 임시정부가 일제에 쫓기게 된 데다가 일본군의 상하이 출병으로 시작된 중국 침략전쟁에 대해 단일한 대일항전 체제 구축이 긴요해진 데 따른 결과였다. 통일연맹은 이듬해 7월, 독립운동가들이 소망하던 단일정당 민족혁명당 탄생의 모체가 됐다. 

석정은 1938년 10월,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조선혁명청년연맹 등 민족운동 좌파연합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이 한커우(漢口)에서 결성한 조선의용대에 참가해 핵심부서인 편찬위원회 주편(主編)으로 선전공작 활동을 벌였다.
 
 김원봉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주도로 1938년 10월 10일 중국 후베이 성 한커우에서 결성된 조선의용대 결성 기념사진. 깃발을 든 김원봉 왼쪽 두 번째가 석정 윤세주다.
 김원봉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주도로 1938년 10월 10일 중국 후베이 성 한커우에서 결성된 조선의용대 결성 기념사진. 깃발을 든 김원봉 왼쪽 두 번째가 석정 윤세주다.
ⓒ 위키백과

관련사진보기


조선의용대는 중국 항일 전선의 변동에 따라, 우한(武漢)에서 구이린(桂林)을 거쳐 1940년 3월에는 충칭(重慶)으로 이동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군에 배속되어, 대 일본군 반전선전, 대 중국민 항전 선전, 일본군 포로 심문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국민당 정부 지구에 국한된 활동에 대원 내부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다. 

결국, 화북(華北) 지역에서의 무장투쟁을 요구하던 대원들은 1940년 말부터 이듬해 여름 사이 황허를 건너 타이항산 팔로군(八路軍) 지역으로 옮겨갔다. 타이항산에서 기존 조선청년연합회 회원들과 합류한 조선의용대 주력은 1941년 7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되었다. 

석정은 화북지대의 정치위원으로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중국 국민혁명군 제팔로군(공산당군)과 함께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다. 일본군은 1942년 2월부터 4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제팔로군 소탕 작전에 들어가 타이항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5월이 되자 20개 사단 40만 병력으로 3000~4000명에 불과했던 조선의용대를 대대적으로 공격해 왔다. 일본군은 타이항산을 완전포위한 후 전투기와 전차까지 동원하여 무차별적 공격을 전개했다. 

일본군의 소탕 작전에 맞서 팔로군은 거세게 저항했다. 허베이성 셰현과 그 이웃인 산시성 랴오현(遼縣)에서 치러진 전투는 매우 치열했는데, 이때 중국군에서는 제팔로군 부참모장 쭤취안(左權)이 전사했다. 랴오현이 지금 '쭤취안현'으로 불리고 있는 것은 쭤취안의 희생을 기려서다.

이 전투에서 조선의용대는 정치위원 윤세주와 김창화(1911~1942, 별명 진광화, 1993년 애국장)를 잃었다. 두 사람은 쭤취안과 함께 셰현 스먼촌(石門村)에 묻혔고 그해 10월 10일 세운 묘비에 '조선 민족 영령'이란 글귀를 '한글 풀어쓰기'로 새겨 놓았다. 이 묘는 타이항산 속에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지만 가묘다.

두 사람의 유해는 1950년 10월 허베이성 한단(邯鄲)시 진지루위(晉冀魯豫) 열사능원(陵園)으로 이장했기 때문이다. 진지루위 열사능원은 중국 공산당 팔로군의 유격지구에서 전사한 항일 열사들의 유해를 모신 곳으로 쭤취안 장군을 비롯하여 200여 기의 묘가 있다.
  
 타이항산에서 허베이성 한단시 진지루위 열사능원으로 이장된 석정 윤세주의 묘와 비석
 타이항산에서 허베이성 한단시 진지루위 열사능원으로 이장된 석정 윤세주의 묘와 비석
ⓒ 김태빈

관련사진보기


타이항산 전투에서 펑더화이(彭德懷)와 덩샤오핑(鄧小平) 등 쟁쟁한 중국 공산당 간부들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석정을 비롯한 조선의용대의 희생 덕분이었다. 윤세주의 장례식에 팔로군 총사령관이자 중국 인민해방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주더(朱德)가 직접 참석해 추도사를 한 이유도 거기 있었다. 

중국에서 이어지는 '조선 혁명 동지'들의 용기와 희생의 기억

2005년 허베이성 지방 정부는 스먼촌에 '조선의용군열사기념관'을 건립했다. 윤세주와 진광화를 비롯한 항일투사를 기념하는 단층 기념관은 2011년 우리 독립기념관의 전시지원을 받았다. '공산주의자'라거나 '김일성에 반대한 옌안파(연안파)'라는 등의 이유로 남과 북에서 모두 외면한 조선의용대는 정작 중국인들로부터 '항일 영웅'으로 기려지고 있는 셈이다. 

중국 타이항산 일대에서 대일항전 활동을 전개했던 조선의용대는 1940년대 중국에서 일본군과 정규전을 벌인 유일한 독립운동 조직이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 국민혁명군에 편제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중국 공산당 휘하 군대인 제팔로군과 함께 일본군과 싸웠다. 중국 공산당이 이들을 '조선의 혁명 동지'로 부르며 기리는 이유다. 

이들은 타이항산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적지 않은 흔적을 남겼다. 산시(山西)성 쭤취안현 원터우디(雲頭低)촌 마을 어귀의 누각 담장에 쓰인 한글 "왜놈 상관 놈들을 쏴 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오"나, 허베이성 후자좡(胡家庄)촌의 초등학생들이 '조선의용대 추모가'를 한국어 발음으로 부르는 것들이 그것이다.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훌쩍 넘었지만, 사람들은 일제와 맞서 싸운 '조선 혁명 동지'들의 용기와 희생의 기억을 기리며 이어가는 것이다. 
 
 산시성 쭤취안현 원터우디(雲頭低)촌 마을 어귀의 누각 담장에 쓰인 한글 선전구호 “왜놈 상관 놈들을 쏴 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오”(위). 밀양 항일운동 테마 거리에 항일 선전 구호를 재현해 놓은 벽화.(아래)
 산시성 쭤취안현 원터우디(雲頭低)촌 마을 어귀의 누각 담장에 쓰인 한글 선전구호 “왜놈 상관 놈들을 쏴 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오”(위). 밀양 항일운동 테마 거리에 항일 선전 구호를 재현해 놓은 벽화.(아래)
ⓒ 김태빈

관련사진보기


1941년 7월 화북에서 조선의용대가 활동한 기간은 1년 남짓이다. 1942년 7월 조선의용대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 제팔로군에 있던 무정(김무정, 1904~1951)을 사령관으로 맞았다. 타이항산 전투는 이후 계속되었지만, 1943년 6월 반 소탕전에서 근거지가 크게 파괴되면서 12월에 활동무대를 옌안(延安)으로 옮겼다. 

조선의용대가 윤세주와 김광화를 잃은 것은 엄청난 손실이었다. 당시 중국 국민당은 내부 문서에서 윤세주를 '조선의용대의 영혼'이라고 부르며 기렸다. 동지 김원봉은 1943년 윤세주의 죽음을 "분투하고 있는 화북 동지들은 가장 우수한 영도 인물을 상실하였고, 전 조선 혁명 진선(陣線)은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육사의 벗, '청포를 입고 오는 손님'이었다

이육사(1904~1944)는 수필 '연인기(戀印記)'(1941)에서 난징의 고책사(古冊肆)·골동품점을 드나들다 얻은 아담하고 섬세한 비취 인장(印章)을 상하이를 떠나 조선으로 돌아오게 됐을 때, '꼭 목숨 이외에 사랑하는 물품'을 주고 싶어 '에스(S)'에게 주고 왔다고 썼다. S는 여인이 아니라, 육사가 아낀 벗,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동기생 석정 윤세주였다.
 
"지금 S가 어디 있는지 십 년이 가깝도록 소식조차 없건마는, 그래도 S가 그 나의 귀여운 인을 제 몸에 간직하고 천대산(天臺山) 한 모퉁이를 돌아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강으로 강으로 흘러가고만 있을 것 같이 생각된다." - 이육사, '연인기' 중에서

육사는 1년 뒤, S가 타이항산에서 전사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도진순 교수(창원대·사학)는 한 논문에서 '중국에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의 복장'이 '청포'였다면서 육사의 시 '청포도'에 나오는 '손님'을 윤세주라고 해석했다. 

육사는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지만, 석정은 타이항산에서 졌고, 육사도 2년 뒤 베이징 일본대사관 감옥에서 벗을 뒤따랐다. 이들의 교우는 젊음을 즐기는 대신 빼앗긴 조국을 되찾으려 온몸을 내던진 식민지 청년의 불꽃 같았던 삶을 아프게 환기해 준다.
 
 2018년 3월, 해천 가 약산 김원봉 생가지에 건립하여 문을 연 의열기념관. 의열’을 주제로 한 기념관은 전국에서 최초다.
 2018년 3월, 해천 가 약산 김원봉 생가지에 건립하여 문을 연 의열기념관. 의열’을 주제로 한 기념관은 전국에서 최초다.
ⓒ 장호철

관련사진보기

   
 밀양의열기념관 옆념관 옆 윤세주열사 생가지에 세운 의열기념탑. 원래 윤세주 열사 어록이 돌비에 새겨져 있던 곳이다.
 밀양의열기념관 옆념관 옆 윤세주열사 생가지에 세운 의열기념탑. 원래 윤세주 열사 어록이 돌비에 새겨져 있던 곳이다.
ⓒ 장호철

관련사진보기


1982년 8월, 석정에게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를 함께 한 약산이 북으로 감으로써 남북 모두에 잊힌 독립운동가로 남은 데 비기면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까.

석정과 약산의 고향 밀양시는 두 사람의 의열 정신이 흐르는 시내 해천(垓川) 주변을 항일운동의 성지로 조성했다. 2018년 약산의 생가터에 문을 연 '밀양의열기념관'은 약산과 석정은 물론, 의열단원과 창립을 도운 이들을 기리고 '의열의 정신으로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독립투사들의 꿈과 희망을 찾아가는' 공간으로 꾸려가고 있다.

의열단 100돌을 넘기면서 지금 밀양에는 윤세주와 김원봉, 그리고 황상규가 석정로·약산로·백민로 등 거리 이름(도로명)으로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https://qq9447.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오마이뉴스>에 기사 포함, 모두 1천여 편의 글을 썼다. 2019년 5월, 블로그 '이 풍진 세상에'에 연재한 '친일문학 이야기'를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으로 펴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