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토' 중

영화 '레토' 중 ⓒ (주)엣나인필름

 
한 콘텐츠가 크게 흥행하고 나면, 그의 이름을 빌리는 마케팅 형식을 우리는 자주 볼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수많은 여성 솔로 댄스 가수에게 '제2의 이효리'라는 수식어가 붙었던 것처럼 말이다. 퀸과 프레디 머큐리의 전성기를 그린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큰 흥행을 거둔 이후, 우리나라에서 해외 뮤지션의 삶을 그린 영화가 개봉할 때에도 그랬다.

지난 2019년 1월, 러시아 영화 <레토>(키릴 세레브렌니코프 연출)가 개봉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의 프레디 머큐리'라니. 배급사의 입장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결정이었지만, 이 수식어가 결코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레토>는 머큐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엄연히 다른 뮤지션의 이야기인데 그 색깔을 지울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레토>는 1980년대 초반,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뮤지션은 '주파르크'의 보컬 마이크 나우멘코(로만 빌릭) 분과 밴드 키노(Кино)의 빅토르 최(Ви́ктор Цой))다(키노의 노래 '혈액형(Группа крови)'은 우리나라에서도 한대수나 YB 등의 뮤지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었던 바 있다). 키노의 보컬 빅토르 최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여전히 러시아 대중음악의 전설로서 회자되고 있다. '엘렉트리치카(Elektrichka, 광역 전철)' 같은 노래에서, 그는 은유적인 노래로 자유를 노래했다. 빅토르 최를 연기한 배우 유태오의 표현처럼, 그가 '성스러운 예술가'로 남아 있다.
 
이 영화는 단순히 공산 국가 소련, 아니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장면'이 여러 차례 연출된다. 친구들이 기차에 모여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의 노래를 부르다가 '적국의 노래를 부른다'며 얻어맞자, 이들은 토킹 헤즈(Talking Heads)의 'Psycho Killer'를 부른다. 같은 열차에 탄 승객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Psycho Killer'를 따라 부르는 순간, 이 장면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예상대로, 이 장면은 영화의 타임라인 가운데에서 실제로 이뤄지지 않은 일이다. 나타샤(이리나 스타르셴바움 분)와 빅토르 최가 묘한 감정을 나누는 사이, 같은 버스에 탄 승객들이 이기 팝(Iggy Pop)의 'Passenger'를 부르는 장면, 당국의 통제를 무시하듯 공연장이 열광의 난장판이 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억압과 자유의 사이, 부유하는 친구들


 
 영화 < 레토 > 중

영화 < 레토 > 중 ⓒ (주) 엣나인필름

 

우리가 이토록 '행복한 저항'에 몰입하려 할 때마다, 한 남자가 등장해서 (그는 관객을 향해 말을 건네는 유일한 존재다. 우리는 이것을 '제 4의 벽'이라고 부른다) 한 가지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없었던 일'이라고. 다분히 연극스러운 그의 존재가 몰입을 깬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삭막한 현실과 낭만적 이상의 괴리를 냉정하게 경계 짓는 그의 모습이 가슴을 더 움직였다.
 
당시 소련에서는 언더그라운드 록 신이 존재했다. 당대의 젊은 뮤지션들은 록 클럽의 무대에서 노래할 수 있었지만, 무대에 서기 전 가사에 대한 검열을 받아야만 했다. 권위주의 정권이 문화 예술을 억압하는 세상은 우리나라의 7~80년대와도 닮았다. 이 영화가 러시아 영화라는 사실을 기억해보자. 러시아에서 저항 밴드 푸시 라이엇이 체포되었던 일 역시 오래 되지 않은 일이다.

글램록 밴드 티렉스(T-Rex)의 마크 볼란, 루 리드(Lou Reed),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비틀즈(The Beatles)를 동경했던 친구들, 부유하는 청춘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레닌그라드의 여름밤. 그 모든 것이 이 영화에 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청춘들의 날을 그린 영화이기에, 흑백 영화로 제작한 것 역시 더욱 애상적인 분위기를 배가한다. 나는 이 영화를 종종 꺼내 본다. 그리고 영화 속 친구들이 누리는 제한된 자유를 만끽한다. 그리고 빅토르 최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곤 한다. 

"난 알아, 내 나무가 곧 날 떠난다는 걸. 하지만
그 동안은 곁에 앉아 기쁨과 고통을 느껴야지
이게 내 세상 같아 이게 내 아들 같아
난 나무를 심었어. 난 나무를 심었어."
레토 키노 마이크 나우멘코 러시아 유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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