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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을 바라볼 때쯤 만난 지인들이 있다. 40대 초반이었고 다들 약속이나 한 듯, 날씬했고 예뻤고 패셔너블했다. 이들과 독서토론 모임을 시작했다. 모임이 끝나면 우르르 몰려가 점심을 먹곤 했다. 음식점에 들어갈 땐 다들 배불리 먹을 기세였지만, 푸짐한 음식을 앞에 둔 그들의 젓가락질은 번번이 무뎌지곤 했다. 그들과의 식탁에선 하루도 빠짐없이 '다이어트'라는 말이 새어 나왔다. 다들 매우 날씬한데도 말이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이들 모두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다이어트'를 입에 달고 산다. 물론 모두 여전히 날씬하다. 무엇이 이들의 몸을 평생 규율하게 했을까?
   
코르셋과 무관하다는 당신에게
  
 '탈코르셋 : 도래한 상상'
 "탈코르셋 : 도래한 상상"
ⓒ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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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코르셋 : 도래한 상상>에서 저자 이민경은 젊은 여성들의 '탈코르셋'(이하 탈코) 논쟁에 과감히 뛰어든다. 읽고 보니, 젊은 여성들의 옥신각신 '탈코' 체험기려니 했던 내 생각은 오해였다. "내 몸이 위치한 현실, 현실에 위치한 내 몸에서 출발"한 그들의 사유는 깊고 치열했으며, 각자가 처한 위치에 따라 그 사유의 결도 사뭇 달랐다. 격세지감이 생기는 지점에선, 열아홉 살 딸애와 스물아홉 살 조카를 교차시키며 읽었다. 그렇다면 나처럼 나이 먹은 아줌마에게 이 책은 그저, 젊은 여성의 '탈코'를 이해하는 외 무용한 것일까? 어느새 나는 '탈코'에 몰입하고 있었다.
   
청소년 자녀를 둔 독서 토론 멤버들에게 <탈코르셋>을 읽고 토론해 보자고 제안했다. 토론장에 모인 멤버들의(위에 언급한 모임의 멤버이기도 하다) 반응은 시큰둥했다. 책 인터뷰이의 경험이 과장되어 공감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놀랍게도 코르셋을 착용해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탈코' 자체가 이들의 삶과 무관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난 화장도 거의 안 하는데, 난 옷도 털털하게 입는데"가 그들이 코르셋과 무관하다고 생각한 이유였다.
  
토론장의 두 명의 면면을 보자면, 이들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명명하지는 않지만, 꽤 페미니스트이며 페미니스트가 되려고 노력 중이다. 페미니즘과 교신한 이전과 이후가 얼마나 다른지를 알고 있는 이들이다. 외모에 집착하는 스타일이 아니고, 첫 문단에 언급했던 모임의 식탁에서 열심히 젓가락질한 유일한 이들인 만큼, 다이어트 강박도 없다. 코르셋을 입은 적이 없다고 믿기에 '탈코' 인터뷰이가 증언하는 코르셋 억압에 공감하지 못하는 걸까? 그렇다면 내가 입은 적이 없는 코르셋은, 다른 이들도 입은 적이 없는 코르셋이 되어도 괜찮은 걸까?

우리는 '탈코'의 범위를 각자의 삶으로 끌어들이는가 하면, 청소년 자녀의 꾸밈을 코르셋 논쟁으로 확장하면서 토론해 보았다. <탈코르셋>의 경험이 과장이라고 느꼈다면, 우리는 일찍이 코르셋을 집어던졌어야 했다. 정말 그럴까? 극단적 꾸밈이라는 괄호를 벗겨내고, 코르셋의 범위를 일상의 자기 신체 모니터링이나 부지불식간에 좇고 있는 규범적 여성성으로 틈입하자, 우리는 '나는 코르셋과 무관하다'는 단언이 섣부른 판단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몇 년 만에 지인을 만나기로 했는데, 그 지인이 '최강 동안' 멋쟁이인지라, 쪼끔 자라 나온 흰머리가 거슬리기 시작했고, 뿌리 염색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하고 말았다면, 대학 '남사친' 동창을 만나러 가는데 화장을 할까 말까를 갈등했다면, 눈썹 그리기가 번거로워 고민 끝에 문신을 새겼다면, 뚱뚱한 타인의 몸이 공연히 부담스러웠다면, "누구나 아름답다"는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면, 우리는 정말 코르셋을 집어던졌던 것일까?
  
청소년인 자녀의 행태와 연동한 코르셋의 실태도 톺아보았다. 아이가, 아침을 못 먹을망정 꾸밈 노동을 포기하지 못할 때, 교복을 트렌디하게 줄이긴 했는데 혼자서 입지도 벗지도 못할 때, 화장 안 해 왕따당할까 봐 결국 좋아하지도 않는 화장을 억지로 할 때, 화장품 1+1행사 광고를 보고 환호할 때, 알바해서라도 핫하다는 브랜드의 옷을 사고야 말 때, 아이들 역시 코르셋을 바짝 조이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자녀들의 꾸밈이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려는 치기려니 했던 생각은 초자본주의와 결탁한 소비 패턴이 삶의 구석구석을 면밀히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 둔감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아이들의 꾸밈은 과거의 우리와는 사뭇 다른 구조적 결과이며, 과거의 우리처럼 한때 열 내다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코르셋을 입지 않았을 때의 해방감이란, 코르셋을 입다 벗어봐야 알게 되는 쾌감이 아닌가. "꾸밈을 문신처럼 새긴 새로운 고객층"인 소녀들에겐 "깜박 잊고 있었다가 되살릴 수 있는 기억 같은 것은 없다."

어느새 소비의 주체로 탄생한 소녀들은 자기만족이라는 판타지를 내세운 SNS의 바다에서 오늘도, 소비(코르셋)의 생산자이자 공급자로 그리고 다시 소비자로 기능하며 신자유주의의 첨병이 되어 있었다.
  
딸의 뒤늦은 고백
 
 영화 < 톰보이 > 스틸컷
 영화 < 톰보이 > 스틸컷
ⓒ (주)영화특별시S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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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코르셋> 토론장의 또 하나의 논점은, '젊은 여성은 탈코를 통해 남자처럼 혹은 남자가 되고 싶은가'였다. 극단적으로 짧은 머리, 금방이라도 달리기를 할 수 있는 옷차림, 하이힐, 핸드백, 장신구를 버린 몸은 남자가 되고 싶은 욕망일까? "응시당하다가 맞응시를 하는 순간을 만"들며 관찰당하는 몸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단순히 남자가 되고 싶거나 되려는 과정으로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상화된 몸에서 탈각한 몸은 분명 다른 감각을 획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톰보이>는 소녀다움을 귀찮아하는 한 소녀가 소년처럼 행세하다 발각되는 깜찍한 사기극이다. 어느 날, 이사 간 마을에서, 아무도 로레를 소녀로 생각하지 않는 새 영토에서, 로레는 소년이 되기로 한다. 단지 미카엘이라는 소년의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것만으로, 로레는 소년이 된다. 이렇게 쉽게 속아 넘어가는 외모가 성별을 가르는 정체성이라고? 영화 속 로레(조 허란)를 보고 있자면, 짧은 머리, 반바지, 운동화를 신고 있는, 누가 봐도 그 나이대의 소년이라 의심치 않을 외모다. 로레가 소녀라는 것을 영화가 노출하지 않았다면, 관객은 그녀가 소년임을 철석같이 믿었을 것이다.

로레가 소년의 몸이 되어 즐기고자 했던 것이 단지, 외모의 전도를 통한 쾌락이 아니라 전도된 몸을 통한 효용에 있었다면, 달리는 몸, 축구하는 몸, 게다가 웃통을 벗을 수 있는 몸이었다면, 이것을 단지 외양상으로만 남자가 되고 싶었던 욕망이라 단언할 수 있을까? 또 그렇다면, 남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었다면, 이는 의심받고 혐오 당할 일일까? "남자아이는 사춘기가 자유를 발견하는 시기지만, 여자아이에게 사춘기는 사춘기 이전의 자유와 대담함을 포기하는 시기"(<우리가 딸들에게 해줘야 할 말들> 중)가 되는 사회적 규범이 지배하는 사회에선, '탈코'로 남자가 되고 싶은 욕망은 소녀들이 포기하도록 강요받은 그것이다. 따라서 로레의 사기극은 무죄다.

로레가 무죄이듯, 몸에 대한 주권 회복으로 '탈코'하는 여성들에게 그것을 단지 남자가 되고 싶거나 남자이고 싶은 비틀린 욕망이라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 그 자체가 이미 '남자'인 몸을 마치 획득해야 하는 무엇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이고 싶냐고? 혹은 남자가 되고 싶냐고? 로레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면?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로레에게는 애초 남자의 몸과 여자의 몸에 대한 구분 자체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녀는 단지 제 맘대로 쓸 수 있는 제 몸을 원했을 뿐이다. '탈코'로 얻고 싶은 것이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내 몸에 대한 의지라면, 이들의 '탈코' 역시 지지받아 마땅하다.
  
'톰보이'였던 딸아이가 중학교 3학년 때 갑자기 화장하겠다고 나섰을 때, 이후로 집으로 밀어닥치는 택배의 행렬을 바라볼 때, 망연자실했다. 당시 딸아이는 '화장을 호기심이라고 했지만, 노 메이크업으로는 더는 소녀들의 세계에서 버티기가 힘들었다'고 최근에야 고백했다. 화장했을 때와 안 했을 때 현격히 다른 타인의 반응과 화장한 자신에게 과하게 연호하는 타인의 반응이 짜릿하게 다가오는 경험 속에서, 딸아이는 자기만족이라 믿었던 화장(코르셋)이 결코 온전한 자기만족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탈코르셋>을 읽은 딸아이가 가장 충격적인 부분으로 꼽은 것은, 눈을 바라보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남아에게 눈은 시력, 즉 잘 볼 수 있는가를 가늠하는 기능이지만, 여아에게 눈은 크거나 작은, 그리고 쌍꺼풀이 있거나 없으므로 예쁘거나 예쁘지 않게 보이는 미관의 대상이라는 이 현격한 차이. 결국 몸이, 남성에게는 기능이지만, 여성에겐 타인의 시선이 머무는 대상이 되는 이 간극이야말로,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자신의 몸 어디에 무엇이 새겨졌는지를 놓칠 수"밖에 없게 했으며, "자신의 몸에 대해 긍정의 가치를 부정적으로 부정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느끼도록 학습"시켜 왔다.
  
우리는 몸으로 다 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자신을 온전히 껴안고 마땅히 누릴 자격이 있다.
 우리에게는 자신을 온전히 껴안고 마땅히 누릴 자격이 있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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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탈코르셋을 다룬 러네이 엥겔른의 저서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에 언급된,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다.

"나는 ( )을 하기 위해 내 팔을 쓴다. 나는 몸으로 ( )을 할 수 있다. 나는 내 몸으로 ( )를 할 수 있어서 좋다. 나는 내 다리로 ( )를 할 수 있다. 내 몸은 ( )할 때 가장 강하게 느껴진다."

몸을 대상화하지 않고 몸의 효능에 집중하자, 몸은 꾸밀 대상이 아니라 실로 많은 것을 해내는 주체였다. 몸은 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몸과 친해지며 자신의 몸을 돌보고 사랑하고 즐길 수 있다. 한 멤버의 대답이 괄목할 만했다.

"나는 몸으로 (다) 할 수 있다."
  
종반에 달한 우리의 토론은 우리가 코르셋을 오랫동안 선택의 문제로 여겨 왔다는 점에 유의했다. 토론 전과 달리 토론을 마칠 때쯤, 우리는 여성이 코르셋을 자기만족을 실현하는 도구로서 '선택'해 왔다고 보기 어려우며, 우리 또한 선택했다고 착각해 왔을 뿐,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선택이란 실상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하지만 한 가지는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코르셋이라는 "선택의 독재"를 받아들일지 말지, 이것을 결정할 수는 있다.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러네이 엥겔른 지음, 김문주 옮김, 웅진지식하우스(2017)


탈코르셋 : 도래한 상상

이민경 (지은이), 한겨레출판(2019)


우리가 딸들에게 해줘야 할 말들 - 우리 앞에 놓인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멜리사 벤 (지은이), 정해영 (옮긴이), 오월의봄(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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