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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회관에서 점심을 먹는데 한 할머니가 "우리도 글자 좀 갈차 줘" 하셨다.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반가워서다. 한때 고등학교에서 학생들도 가르쳤고 얼마 전까지 저 멀리 읍내로 다문화가정 컴퓨터 강의를 했던 내게 자식한테도 못 할 말을 하시는 거다.

엊그제만 해도 읍내 장날에 아랫집 할아버지가 왔었다.

"전 슨상. 택시 좀 불러줘."

마을까지 단돈 1000원이면 12킬로를 달려오는 택시를 휴대폰이 있어도 못 부른다. 한 손엔 스마트폰을 들고 다른 한 손엔 서울 사는 아들이 써 줬으리라 여겨지는 전화번호 쪽지가 들려 있다. 지역 택시 콜센터 전화번호다.

글을 모르시기도 하지만 숫자도 모르신다. 간단한 계산을 못 하는 것은 물론이다. 문맹 할아버지의 불편함은 귀가 닳도록 들었다. 읍내 나갔다가 이 눈치 저 눈치 보다가 동네 아는 사람이 타는 버스를 뒤따라 탔다가 엉뚱한 곳으로 갔던 이야기. 우리 동네 이름이 두 글자다 보니 앞머리가 두 글자로 된 버스를 자신만만하게 탔다가 막차까지 놓친 이야기 등등.
 
문맹?할아버지의?불편함은?귀가?닳도록?들었다.
 문맹?할아버지의?불편함은?귀가?닳도록?들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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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장에 갔다가 돌아오실 때는 택시 어떻게 부를 건가요?"
"사람 봐 감서 부탁해야지."

사람 봐 가면서 부탁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안다. 모르는 사람에게 부탁하겠다는 뜻이다. 할아버지를 아는 사람에게는 글 모른다는 걸 드러내기 싫다. 자식이 노부모 걱정에 스마트폰을 사 드리고 수시로 안부 전화를 걸기는 하지만 할아버지가 걸지는 못한다. 숫자도 모르고 글자도 모르니 자식이 스마트폰에 단축키를 설정해 드렸지만 엉뚱한 곳으로 전화가 걸린 뒤로는 혼자 번호판 누르는 게 겁난다.

한 번은 농협 앞에서 농협이 어디냐고 묻는 할머니가 있었다. 농협이 번듯한 건물을 지어 이사한 뒤였다. 아마 이 할머니는 농협이 어디냐고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 여러 번 물은 듯했다. "저쪽에 저기요. 조금만 가시면 바로 저기요"라는 답을 들었을 경우, 할머니는 조금 저기가 어딘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간판을 곁에 두고 또 물어야만 한다.

언젠가 뉴스에 농약 가룬지 밀가룬지 모르고 부침개를 부쳐 먹었다가 사망사고를 일으킨 기사가 떠오른다. 나는 두 말 않고 그러자고 했다. 할머니더러 같이 글자 배울 사람들 모아 보라고 했더니 그르마고 하셨다.

아주 오래전 다른 고장에 살 때 한글 교실을 했었다. 반년 정도 진도가 나갔을 즈음 삐뚤빼뚤 글을 쓰게 되었는데 그때 한 할머니의 한글학교 소감문이 생각난다.

'모티(모퉁이)를 돌아 버스가 와서 정거장에 학생들을 부라 놓으면 가슴이 철렁했다.... 아들을 상급 학교 보내느라 딸을 공부시키지 못한 한이 가슴에 응어리가 맺혀 있었다.'

글 속의 딸도 이미 할머니다. 당신도 글을 모르고 딸도 글을 모르니 그 불편함이 오죽했을까. 그때 있었던 일이다. 대통령 선거를 하는 날이었는데 투표소에서 그 할머니를 만났었다. "이번에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찍었다"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글자가 보이더라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마을 이장이 찍으라고 하는 칸에 찍었지만 제대로 찍혔는지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태어나 처음으로 대통령 후보 이름 밑에다 붓두껍을 찍은 그 감동이 알 만했다.

학교 가 보는 게 소원이었던 그 어르신들에게 가방도 사 드리고 공책도 사드렸다. 소풍도 갔다. 바리바리 음식을 싸 들고 소풍을 가니 그야말로 초등학생들 저리 가라였다. 어찌나 와글와글 좋아하시는지.

요즘은 한글 교재가 더 잘 나올 것이다. 알아봐야겠다. 평생교육원? 아니면 군청? 또는 다문화 센터에도 알아볼 생각이다. 교육청에도. 할머니 할아버지 이름 뒤에 '학생'을 넣어서 출석도 부를 생각이다. 숙제도 내줘서 잘 해오면 선물도 드릴까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함양신문에도 실립니다.


태그:#한글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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