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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나는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 처음 몇 달은 재밌게 다녔던 것 같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매일 '닭장'같이 좁은 방에 갇혀 피아노를 친다는 게 지긋지긋하게 싫었다. 몇 번이고 그만두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엄마는 주문처럼 말씀하셨다.

"체르니 30번까지만, 딱 거기까지만 하고 끝내자."

그렇게 나는 꼬박 3년 동안 피아노를 배웠고, 체르니 30번을 떼자마자 미련 없이 '닭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두 번 다시 피아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조금 연습하면 손이 풀릴 줄 알았는데...
 
 이젠 낡아버린 디지털 피아노
 이젠 낡아버린 디지털 피아노
ⓒ 오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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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내가 다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것은 첫째 딸이 여섯 살 되던 해의 일이었다. 아빠를 따라 결혼식장에 다녀온 딸이 '지붕 있는 피아노'를 사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결혼식장에서 본 그랜드 피아노를 말하는 것이었다. 진짜 지붕을 떠 바치고 있는 피아노를 살 수는 없고, 대신 디지털 피아노 한 대를 집에 들였다. 그런데 정작 딸보다 내가 더 설레고 좋았다. 그때부터 나에겐 야무진 꿈 하나가 생겼다. 

"나의 로망인 <녹턴>을 연주해보리라!"

하지만 30여 년 만에 다시 치는 피아노는 결코 쉽지 않았다. 악보가 한눈에 읽히지 않아 손가락으로 한 줄, 한 줄 짚어가며 음을 찾아야 했다. 뇌에서 인식한 음을 손가락에게 지시해 건반을 누르는 전 과정이 슬로모션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머리도, 손가락도 굳어있었다. <녹턴> 한 곡을 연주하는 데 20분 이상이 걸렸으니, 말 다 했다. 하긴... '닭장' 탈출 이후 피아노 건반 한 번 눌러보지 않았던 내가 다짜고짜 '녹턴'을 쳐보겠다고 덤볐으니, 무리도 이런 무리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매일 밤, 애들을 재우고 피아노를 뚱땅거렸다. 헤드폰을 끼고 나만의 세상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미친 듯이 피아노를 쳤다. 다음 날이면 손가락과 손목으로 연결된 근육이 당겨 아플 정도였다. 그래도 실력은 쉽게 늘지 않았다.

몸으로 익힌 것은 절대 까먹지 않는다던데 난 왜 이럴까... 괜스레 야속한 마음도 들고, 조금씩 지쳐갈 무렵 기분 전환 삼아 제일 만만하다고 생각했던 <엘리제를 위하여>를 쳐봤다. 그런데 이 역시 쉽지 않았다. 아... 완전히 잊어버렸구나. 이쯤 되면 피아노 치기를 포기했을 법도 한데 어쩐 일인지 그럴수록 <녹턴>에 대한 나의 갈망은 더 커져갔다. 

"혹시 나한테 프로포즈하려고 연습하는 거야?"

남편의 우스갯소리를 웃어넘기며 그렇게 나는 매일 피아노를 쳐댔다. 어차피 헤드폰으로 나만 듣는다 생각하니 부끄러움도 창피함도 없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어쩌면 그 이상의 시간이 흘렀을까, 느리지만 그래도 제법 구색을 갖춘 <녹턴>을 연주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다시 <엘리제를 위하며>를 쳐봤다. 그런데! 손가락이 스스로 움직였다. 연습 한 번 안 한 곡인데 저절로 쳐지다니, 나는 그게 너무나 신기했다. 내 안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던 무언가가 깨어난 것만 같았다.

'꾸준히'의 효과를 믿으며
 
 나달나달 떨어진 악보
 나달나달 떨어진 악보
ⓒ 오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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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어려운 일을 해결하다 보면 어느새 작은 일쯤은 저절로 해결된다는 것을, 그것이 바로 '내공'이란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꾸준함에 장사 없단 말을 온몸으로 느끼며 내 인생을 반성했다. 

생각해보니 피아노 학원을 다닐 때도 <엘리제를 위하여>를 끝까지 쳐본 적이 없었다. 앞부분만 배웠고 어느 정도 친다 싶으면 다음 곡으로 넘어갔다. 왜 그랬을까? 그냥 그렇게 대충 치는 척만 했다. 인생 역시 그렇게 살아왔구나... 싶었다. 피아노 건반을 대충 눌러가며 얼핏 보면 꽤 그럴싸한 곡을 연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연주자인 나는 안다, 그것이 엉터리라는 것을. 딱히 노력이란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운이 꽤 좋은 편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게 독인 줄 모르고. 

그로부터 7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나는 매일 피아노를 친다. 처음 치는 곡은 여전히 어렵고 힘들지만 그래도 끝까지 쳐본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반복해서 꾸준히 치다 보면 속도가 붙는 걸 스스로 느낀다. 이젠 제법 내 감정을 실어 연주하는 여유도 부릴 수 있게 됐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한다.

한음, 한음 건반을 눌러 한 곡을 연주하듯 그렇게, 그게 인생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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