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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와 박선호 철모를 쓴 군인 사이에 앉아 있는 사람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이고, 포승줄에 묶인 채 김재규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의전과장 박선호다.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의 주요 임무는 한 달에 10회 정도 열리는 대통령의 연회 자리에 여성을 ‘조달’하는 ‘채홍사’ 역할이었다. 김재규와 박선호는 대구 대륜중학교 사제지간이기도 하다. 대륜중고등학교는 일제강점기 도서관을 통해 국권을 되찾으려 했던 ‘우현서루’의 명맥을 이은 곳이다. 김재규와 박선호 두 사제는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 김재규와 박선호 철모를 쓴 군인 사이에 앉아 있는 사람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이고, 포승줄에 묶인 채 김재규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의전과장 박선호다.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의 주요 임무는 한 달에 10회 정도 열리는 대통령의 연회 자리에 여성을 ‘조달’하는 ‘채홍사’ 역할이었다. 김재규와 박선호는 대구 대륜중학교 사제지간이기도 하다. 대륜중고등학교는 일제강점기 도서관을 통해 국권을 되찾으려 했던 ‘우현서루’의 명맥을 이은 곳이다. 김재규와 박선호 두 사제는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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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신군부의 12ㆍ12군권 탈취사건으로 재판정은 더욱 기울어졌다. 그리고 재판 진행 속도가 빨라졌다. 공판이 시작된 지 불과 14일 만인 12월 18일 제9회 공판을 마지막으로 사실심리ㆍ증인신문ㆍ증거조사 등을 모두 마치는 초고속 재판이었다.

중앙정보부장의 국가원수 살해라는 엄청난 사건이고 피의자가 8명이나 되는 대형사건인데, 재판은 초고속으로 이루어졌다.

이날 공판에서 검찰은 김재규ㆍ김계원ㆍ박선호ㆍ박흥주ㆍ이기주ㆍ유성복ㆍ김태원 피고인에게 사형을 구형하고, 궁정동에서 김재규가 사용했던 권총을 땅에 파묻은 유석술 피고인에게 징역 5년을 구형했다.

재판부는 다른 피고인들이 최후진술을 마치고 마지막 김재규의 진술이 시작될 때 10분간 휴정을 선언하고 방청객을 모두 내보냈다. 변호인과 김 피고인 가족 4명만을 남게 하였다. 그가 최후진술에서 국가기밀을 공개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댔다.

"그의 최후진술은 논리 정연했고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사형을 눈앞에 둔 피고인이 혼신의 힘을 다해 토해내는 웅변, 바로 그것이었다."(주석 7)

김재규는 최후진술에서 10ㆍ26을 혁명이라 지칭하면서 건국이념이고 국시인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거사가 어떻게 내란죄냐 묻고, "대장부로 태어나서 죽을 수 있는 명분을 찾은 것으로 죽음의 복을 잘 타고 난 사람"이라고 사생관을 피력했다. 최후진술의 주요 부문을 세차례 나눠 소개한다.
 
 최후진술하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최후진술하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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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혁명이 어떻게 내란죄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오늘날 자유민주주의는 우리 대한민국 전체 국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3700만이 다 같이 갈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회복시키는 데 어찌하여 내란죄의 적용을 받아야 되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또 10ㆍ26 혁명은 순수하고 깨끗합니다. 집권욕이나 사리사욕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오로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겠다는 일념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혁명의 결과 자유민주주의는 완전히 회복되었고, 보장되었습니다.

최 대통령께서는 권한대행 시절에 국민 앞에 공약을 했습니다. 현 대통령의 자리를 임기를 다 마치지 않고 도중에 그만두겠다고 하였는데, 이는 '과도정부'를 의미하는 것이고, '과도'라는 것은 자유민주주의로 이행해가는 과도기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10ㆍ26 혁명의 목적은 완전히 달성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회에서 긴급조치 9호를 해제했습니다. 10ㆍ26 혁명이 없었던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으며, 꿈이라도 꿀 수 있는 일입니까? 이 또한 이 혁명의 성공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10ㆍ26 혁명은 5ㆍ16 혁명이나 10월 유신에 비해 정정당당한 것입니다. 허약한 민주당 정권을 무력하다는 이유로 밀어치우는 것과 집 앞마당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말살한 것에 비하면, 서슬이 시퍼렇고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유신체제를 정면에서 도전하여 타파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민주회복 국민혁명은 완전히 성공했습니다. 10ㆍ26 혁명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정정당당한 혁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무혈혁명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그러나 무혈로 혁명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때는 최소한의 희생은 부득이한 것입니다. 이번 혁명에서 최소한의 희생은 불가피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는 자유민주주의 회복과 자신의 희생과를 숙명적 관계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서는 각하께서 희생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대통령 각하를 잃은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고 마음 아픔을 비할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유신 이후 7년이 경과되었고, 영구 집권이 보장된 오늘날 박 대통령이 살아 있는 한, 20년 내지 25년 내에는 최소한 자유민주주의 회복이 안 된다고 볼 때, 가슴 아프지만 국민들의 희생을 막기 위하여 이 혁명은 필연성이 있는 것입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사진은 1980년 1월 23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항소심 2차 공판 당시 사진.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사진은 1980년 1월 23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항소심 2차 공판 당시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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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들 모두 감상적이고 감정이 몹시 앞서 있기 때문에 사리 판단에 있어서 지나치게 판단하기 쉽습니다. 저에 대한 내란죄 심판도 그런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감상이나 감정에 사로잡히지 말고 정치 현실은 정치 현실대로, 감상은 감상대로 냉정히 판단해서 엄연히 구별해야 합니다.

저는 법을 잘 모르지만, 때나 경우를 가리지 않고, 공정한 법을 적용하기 위해 판례를 매우 중요시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 스스로의 생명을 구걸하기 위해 최후 진술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대장부로 태어나서 제가 죽을 수 있는 명분을 찾은 것으로 죽음의 복을 잘 타고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오늘 죽어서도 영생할 수 있다는 자부가 있기 때문에 조금도 생명을 구걸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석
7> 김재홍, 『박정희 살해사건 비공개진술 전(全) 녹음 최초정리(하) - 대통령의 밤과 여자』, 326쪽, 동아일보사, 1994, 이후 ('비공개진술(하)' 표기)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박정희를 쏘다, 김재규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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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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