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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유해 봉환식, 추모하는 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4월 21일 오후(현지시간) 카자흐스탄 누르술탄 국제공항에서 열린 독립유공자 계봉우·황운정 지사 유해 봉환식에서 추모사를 하고 있다.
▲ 애국지사 유해 봉환식, 추모하는 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4월 21일 오후(현지시간) 카자흐스탄 누르술탄 국제공항에서 열린 독립유공자 계봉우·황운정 지사 유해 봉환식에서 추모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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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21일 카자흐스탄 수도 누르술탄의 누르술탄 공항에서는 독립유공자 계봉우·황운정 지사 내외의 유해 봉환식이 거행되었다. 고향 땅을 떠난 지 100여 년 만에 고국 품으로 돌아가는 뜻깊은 행사였다. 이날 필자는 행사 맨 앞 줄에서 황운정선생의 손자와 나란히 앉아서 역사적이고 감동적인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렇다면 계봉우·황운정 지사 및 고려인들은 어떻게 머나먼 카자흐스탄까지 오게 되었을까?
  
1897년 시행된 러시아 제국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광산에 일하러 온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 알마티 등 여러 지역에 한국인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하지만 이들은 1899년 급변하는 세계정세에 따른 러시아 제국의 강제 이주 명령에 의하여 카자흐스탄을 떠나 연해주(블라디보스톡) 등으로 이주하였다. 

스탈린 시대의 고려인 강제 이주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고 러시아제국 전역은 적군과 백군 간의 치열한 내전에 휩싸인다. 이때 적군은 고려인들에게 조선의 독립지지, 고려인의 지위 보장 및 토지 분할을 약속했고 이를 믿은 고려인들은 적군에 가담해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 1922년 적군의 승리로 내전은 마무리되었고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CCCP)이 건립된다.
  
소련은 약속을 이행하는 듯 보였고, 고려인들은 이를 믿고 한국어 신문을 발행하고 수많은 한국 학교를 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탈린 및 중앙위원회는 1937년 강제이주 전 이미 고려인들을 타지로 이주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이들의 계획은 1937년 이전에 여러차례 시도되었다.

1931년까지 약 70가족, 300여 명이 카자흐스탄 및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하였다. 중앙아시아 목화재배지를 쌀 재배지로 전환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기 위하여 쌀 재배에 탁월한 고려인들을 이주시킨 것이다.
   
1933년 결과에 만족한 스탈린 및 중앙위원회는 고려인 약 9만 명을 러시아 극동 하바롭스크에서도 더 외곽에 위치한 곳으로 이주시키기로 하였다. 그들은 차별적으로 행해진 토지 배분에 대한 고려인의 불만을 잠재우면서, 고려인을 통해 '버려진 땅'을 개간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집단농장(콜호스)의 공산당 간부들까지 고려인에 가세해서 함께 이주저지 투쟁을 벌이자 이 계획은 취소되었다. 그 와중에도 약 3천 명을 이주시켰지만, 그들은 척박한 동토에서 사망하거나 국외로 도망가 버렸다.

하바롭스크 이주 계획이 실패하자 소련공산당은 본격적으로 독립군 및 독립투사, 지식인, 붉은 군대 군인, 사회지도층의 고려인들을 무차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약 2500명이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고 날조된 증거와 약식 재판을 통하여 대부분 총살되었다.

1937년 일제히 소련의 중앙과 각 지방의 뉴스와 언론매체에서는 고려인이 일본의 첩자일 수도 있다는 대대적인 흑색선전을 시작하면서 여론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그해 7월,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하였고 소련은 즉시 중국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한다.
 
 1937년 강제 이주 당시 카자흐스탄 우슈토베(Ushtobe)는 최초의 정착지로 기록돼 있다.
 1937년 강제 이주 당시 카자흐스탄 우슈토베(Ushtobe)는 최초의 정착지로 기록돼 있다.
ⓒ 김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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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더불어 기존에 세워져 있던 이주계획을 실행하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명의의 강제이주명령서가 1937년 8월 21일 하달된다. 곧바로 고려인들의 강제이주가 시작되었고 3만6442가구, 17만1781명이 6000㎞에 달하는 악몽의 여정을 떠났다.  

모든 고려인은 짐을 정리할 틈도 없이 마을에 집결해 역으로 수송되었고, 연해주의 각 역에는 이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킬 열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고려인들은 창문도, 화장실도, 물도 음식도 없는 짐승을 운반하는 칸에 실려 아시아의 동쪽 끝 연해주로부터 중앙아시아까지 기나긴 여정을 견뎌야만 했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 속에서 결국 2만5천여 명이 중앙아시아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망하고 말았다.
  
중앙아시아에 도착한 고려인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철저한 감시하에 도시 거주 유입이 완전히 봉쇄되었고, 혹독한 자연 그대로의 황량한 황무지로 내몰렸다.

거의 매일 고려인들은 가족이 사망하는 슬픔을 겪으며 살기 위해서 땅을 파 잘 곳을 마련해야 했다. 날이 밝으면 맨손에 땅을 개간하면서 틈틈이 먹을 것을 찾아다녀야만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 후 고려인들은 농업과 축산 분야에서 노동 영웅을 배출하는 등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가기 시작하였지만, 1957년까지 사회적 지위의 모든 것들이 박탈되었으며 오직 중앙아시아에서만 거주할 수 있었다.

1958년 공식적으로 모든 제한이 풀렸지만 실질적으로는 전 분야에서 제한은 여전했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고려인들은 자식 교육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런 부모의 열정 속에서 공부한 고려인들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의 명문대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들은 사회적 지위 제한을 덜 받는 의사, 과학자, 변호사, 예술 분야 등 전문 직종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여러 활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1991년 소련의 붕괴는 고려인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특히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현재 사회 모든 분야에서 중요 인물로서 활동하고 있다.

특히 경제적 부문에서는 2019년 포브스지 발표 카자흐스탄 50대 부자 중 6명이 고려인일 정도로 탁월한 성과를 보이며 그 외의 대부분 카자흐스탄 고려인들도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살아가고 있다.  

고국 땅으로
 

오늘 황운정 지사 손자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코로나19로 인해 올해 행사를 치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지 벌써 1년이 지났다면서 감회에 젖었다.

이어 고국의 품에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 이들에게 마음속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말하면서 목이 메어 갔다.

아무 말도 못 하던 그는 이곳 카자흐스탄에 남은 분들도 꼭 고국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트려 버렸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그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올해는 홍범도 장군을 포함해 최이붕, 강연상 지사가  꼭 고국 땅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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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및 중앙아시아 그리고 CIS 지역의 역사,인문,경제,국제관계 전문가. 현재 국제변호사,민주평통 해외자문위원,NIS 교수,카자흐스탄 인문법학대학교 한국학 센터장 및 카자흐스탄 한인 경제인연합회장을 맡고 있다. 카자흐스탄 수도 누르술탄 거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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