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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게재된 기사 "매국 간신 대여섯을 거리에서 능지처참하소서"(http://omn.kr/1nknd)에서, 최익현(1833~1906)이 일제와 매국노들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자 김학진·조병세·남정철 등의 지지가 이어졌다는 사실과 그들이 탄압을 받았고 허위도 구금됐다는 사실을 살펴봤다. 조병세와 허위에 대해서는 차후 다시 살펴볼 기회가 있으므로 지금은 최익현·김학진·남정철의 삶을 좀 더 알아본다.
 
 대마도 수선사 앞의 '최익현 순국비', 절의 법당(오른쪽 위)과 법당 현판(아래)
 대마도 수선사 앞의 "최익현 순국비", 절의 법당(오른쪽 위)과 법당 현판(아래)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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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은 누구인가? 이이화는 <인물 한국사 : 최익현>에서 '최익현은 19세기 말 외세가 이 땅에 밀려올 때에 가장 줄기차게 저항 운동을 벌인 대표적인 유림'으로서 '끝내 유폐된 땅 대마도에서 죽었기 때문에 민족운동의 선봉으로 꼽혀왔다'고 평가했다.

최익현은 22세인 1855년에 급제했다. 그가 나라 안에서 크게 주목받게 된 것은 대원군과 맞서면서부터였다. 정3품 고관의 반열에 있던 최익현은 경복궁 중건과 그 공사를 벌이느라 당시 화폐 상평통보보다 액면가치가 100배나 되는 당백전(當百錢)을 마구 찍어 경제를 파탄시킨 대원군의 잘못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그 결과 대원군에게 낙인이 찍히고, 뒷날 경기도 양주에 은거하게 되지만 관리들과 백성들의 여론을 이끄는 인물이 됐다.
 
 예산의 최익현 묘소
 예산의 최익현 묘소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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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은 1876년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 체결을 통해 일본에게 조선침략의 길을 열어주게 되는 개항 때 다시 상소 운동을 펼쳤다. 그는 서양 세력과 일본의 외교 통상 요구를 철저히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척화(斥和), 즉 오랑캐의 화친 요구를 배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강화도 조약만 해도 그랬다. 이 조약은 '부산·원산·인천을 일본에 개방한다, (일본인이 한국에서 저지른 범죄를 일본인 관리가 재판하는) 영사 재판권을 허용한다, 일본은 조선 연해를 자유로이 측량하여 지도를 작성할 수 있다' 등 일본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내용이었다. 조선인이 일본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는 거의 없고, 그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 길만 열어준 꼴이었다.

최익현은 통상이 곧 침략으로 이어진다고 봤다.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에 입각해 서양과 일본을 한통속으로 보았고, 그들은 겉모습만 사람일 뿐 사실상 짐승에 지나지 않는다고 인식한 인수론(人獸論)을 전개했다. 그는 외세를 물리쳐야 바른 것(성리학적 인식)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위정척사(衛正斥邪) 세력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최익현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이제 끝났다"고 선언

최익현이 두드러진 활동을 펼친 시기는 일진회가 조직되고 을사늑약이 추진된 1904~1905년 무렵이었다. 그는 단발령에 저항하여 "상투를 자르는 짓은 정신을 좀먹는 지름길이다, 신체발부(身體髮膚, 몸, 머리카락, 피부)는 부모가 준 것이니 목숨과도 바꿀 수 없다"고 외쳤다.

심지어 그는 고종에게 "40년 군신의 의리는 여기서 끝났습니다!"라고 부르짖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그는 "나라가 없고 군주도 없으니 우리 3천리 국민은 모두 남의 노예이다, 살아도 죽는 것만 못하다"라고 선언했다.
  
최익현은 애초 일본과 외교적으로 교섭하고, 국제사회에 호소하자고 주창했다. 그러나 실효성이 있을 리 없었다. 마침내 그는 의병을 일으켜 무력 투쟁에 나섰다. 최익현은 호남 유생 임병찬(林炳瓚), 장성 유생 기우만(奇宇萬)과 함께 전라도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창의했다.
 
 최익현이 창의한 무성서원. 강당 현판과 마루 사이로 사당이 보인다.
 최익현이 창의한 무성서원. 강당 현판과 마루 사이로 사당이 보인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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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의 의병군 북상을 시작했지만 순창에서 관군에 진압되고, 본인도 체포됐다. 최익현은 대마도로 끌려갔다가 결국 그곳에서 결국 죽음을 맞았다. 그는 처음에는 일제가 주는 음식을 먹지 않고 굶었고, 나중에는 조선에서 가져온 쌀이라는 사실을 알고 단식을 중단했다. 하지만 73세나 되는 고령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쇠약해진 몸이었고, 이국의 억류 생활을 견뎌낼 수 없었다.

그가 체포되고, 대마도로 끌려가고, 마침내 죽어 부산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수많은 유림들과 민중의 마음을 울렸다. 그의 운구 행렬이 부산에서 북으로 올라올 때 수많은 사람들이 울면서 그 뒤를 따랐다. 나아가 그는 '후기 의병 봉기의 모델이 되었다'(이이화).

최익현을 적극 도왔던 김학진, 초지일관 못하고

김학진(1838~1917)은 33세(1871년)에 급제했고, 1894년 형조 및 공조 판서를 역임했다. 동학농민군 봉기 때 전라 감사가 됐다가 능력 부족을 이유로 자진 사퇴하기도 했다.

그는 1905년 1월 일제의 경찰권 개입과 친일파를 비판한 최익현의 상소를 적극 지지했다. 그 자신도 3월 일제의 국권 침탈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일제에 구금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뒤로는 친일 행각을 보였다. 1909년 한국과 일본 황제의 사진 봉안 및 송덕비 창건을 위한 '송성 건의소' 발기인으로 활동했고, 1910년 합병 추진 단체 '대한 평화 협회'의 찬성장을 맡았다. 조국을 망하게 한 '공'을 인정받아 남작 작위와 2만5000원의 은사 공채를 얻었다. 1912년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 병합 기념장(韓國倂合記念章)'을 받았다.

남정철도 변절, 김학진과 친일 이력 흡사

남정철(1840~1916)은 42세(1882년)에 급제하여 1885년 평안도 관찰사, 1889년 대사헌을 거쳐 그 이후 도승지·형조판서·예조판서·한성판윤·경성부 관찰사·함경북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1897년 내부 대신이 되었다.

최익현이 1904년 12월 일제의 침탈과 친일파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을 때 적극 지지하고, 특진관으로 있던 1907년 7월 고종 양위에도 동의하지 않다가 체포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친일로 돌아섰다. 1909년 12월 일진회가 한일합병 운동을 주도하는 데 대응하기 위해 이완용 등이 조직한 국민대연설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나라가 망한 뒤의 행보는 김학진과 거의 흡사하다. 남정철은 김학진과 마찬가지로, 1910년 10월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고, 1911년 1월 2만5000원의 은사공채를 수령했으며, 1912년 8월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남정철은 김학진과 사망 연월일도 비슷하다. 남정철은 1917년 12월 13일 세상을 떠난 김학진보다 여섯 달가량 먼저인 1916년 6월 30일 이승을 하직했다.

남정철과 김학진이 처음의 의기를 잘 유지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람이 초지일관을 지키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후손된 우리가 생애를 독립운동에 바친 지사들을 잘 기리고, 민족배신자들을 엄중히 추궁하는 것은 매우 인간적인 행동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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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소설 의열단><소설 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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