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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진술하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최후진술하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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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는 순리적인 방법으로 유신독재를 종식시키고 박정희가 권력을 내려놓도록 하는 길을 모색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위치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시국에 대처하고자 하였다.

10ㆍ26거사 후 그가 옥중에서 쓴 「수양록」의 원본이 『한국일보』에 의해 2004년 6월 26일 공개되었다. 1980년 1, 2월에 쓴 일종의 일기 또는 소회를 담은 심경록이다. 이런 대목이 있다. 1980년 1월 27일자이다.

1976. 12, 4 돌연 대통령께서 집무실로 부르셔서 갔더니 중정부장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순간 기분은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본인은 좋다 그러면 이제는 순리적 방법으로 대통령을 설득하여 유신체제를 고쳐보자, 절호의 찬스다. 이렇게 생각하고 처음에는 대통령의 의중을 탐색하는 데 노력했다. 그러나 조금도 틈이 없다. 하는 수 없이 미련스럽게 틈만 있으면 슬슬 완화해보시도록 이야기해 보았으나 어림도 없었다.

국내 여론은 물론 혈맹의 우방 미국이 우리나라 체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세계의 자유 우방이 우리에 대해서 인상이 좋지 않다는 것 등. 그러나 누가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조금도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아 나는 이제 다 틀렸다. 마지막 방법으로 혁명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 1979. 4 혁명을 결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건이 좋지 않아 미루다가 10. 26을 드디어 결행하고 말았다. (주석 7)


유신독재를 청산하는 길은 말하면 유신독재의 심장인 박정희를 처리하는 일이었다. 김재규가 같은 날에 쓴 기록이다.

나는 밉고 미운 유신독재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하겠는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유신독재는 박 대통령 각하 혼자서 지키고 있으며 나머지는 그저 따라 하기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우리 국민들 전체도 자유를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누가 여하한 방법으로 유신독재 체제를 물리칠 수 있겠는가 하고 사방을 돌아보았으나 그러나 아무도 용기를 낼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하는 수 없구나 내가 하는 방법 이외에는. (주석 8)
 
박정희(중앙)와 김재규(오른쪽), 그리고 차지철(왼족)
 박정희(중앙)와 김재규(오른쪽), 그리고 차지철(왼족)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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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의 이같은 결단을 더욱 재촉하게 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공화당과 유정회 소속 의원들은 10월 4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을 제명하는 폭거를 자행했다. 이에 앞서 8월 9일에는 YH무역 여직원 170여 명이 마포 신민당사에서 생존권보장 등을 요구하며 농성중인 것을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1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부상, 국회의원ㆍ당직자 상당수가 구타를 당하였다.

마침내 부산과 마산에서 한국현대사의 물굽이를 바꾸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10월 16일 부산대생 4천여 명은 교내시위에 이어 저녁 8시경 시청 앞에 집결, 시민들과 합세하여 유신철폐, 독재타도, 야당탄압 중지 등을 외치며 경찰과 대치했다. 이날 학생들은 교내에서 〈민주투쟁선언문〉을 배포하면서 반유신ㆍ반독재 구국투쟁의 대열에 참여할 것을 다짐했다.

부산대생들은 서울의 각 대학과 전남대학ㆍ경북대학 등에서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시위가 연일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데도 침묵만 지켜오다가,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의원직 제명안이 국회에서 변칙적으로 처리된 직후부터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시위에 나서기 시작했다.
  
1975년 5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김영삼 신민당 총재을 접견하고 있다.
 1975년 5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김영삼 신민당 총재을 접견하고 있다.
ⓒ e-영상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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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은 어용야당 대표 이철승을 누르고 신민당의 새총재가 되어 대여투쟁을 강화한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과 총재직 직무정지가처분 등 폭압적 방법으로 그를 제거하려 들었다. 또 YH여성근로자 170여 명의 신민당사 농성을 폭력으로 쫓아냈다. 이 과정에서 김경숙 양이 숨지고, 야당사가 짓밟혔다.

이같은 상황에서 대규모의 시위대로 변한 부산대생들은 교내시위에 이어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시내에 진출하여 경찰과 대치하다가 최루탄에 맞서 벽돌을 던지는 등 투석전으로 돌입, 파출소ㆍ신문사에 투석하고 경찰차에 방화하는 등 이튿날 새벽 2시까지 유신 이후 가장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이날 시위로 학생 282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16일의 학생ㆍ시민들의 시위를 보고받은 구자춘 내무장관은 17일 부산시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앞으로 지각없는 경솔한 소란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처해나가겠다"고 경고했다. 같은 날 부산시민회관에서는 부산시장을 비롯한 각 기관장ㆍ새마을지도자 등 2천 5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0월유신 7주년 기념식이 열려 참석자들은 "유신으로 총화단결을 더욱 공고히 하자"는 따위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러는 동안 부산대를 비롯, 동아대ㆍ고려신학대ㆍ수산대 등 부산시내 각 대학의 학생들은 시청에서 불과 4백m 떨어진 국제시장과 부영극장 앞으로 속속 집결하고 있었다. 오후 6시 30분 경 남포동에 모여 있던 4백여 명의 학생들은 애국가를 부르며 일부는 국제시장 쪽으로, 일부는 충무동 쪽으로 행진했다.
  
부마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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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전개된 17일의 시위는 고등학생들도 상당수 가담하고 어둠이 깔리면서 시민들까지 가세하여 더욱 격렬해졌다. 경찰의 완강한 저지로 부산시청 앞으로 진출이 불가능해지자 시위대는 소규모로 나뉘어 시내 곳곳에 분산하여 게릴라식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경찰은 저지 능력을 사실상 상실하게 되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시위는 더욱 격렬해져서 충무파출소, KBS, 서구청, 부산세무소가 파괴되고 MBC의 유리창이 박살났다. 이틀간의 격렬한 시위로 경찰차량 6대가 전소, 12대가 파손되고 21개 파출소가 파괴 또는 방화되었으며, 많은 시민ㆍ학생이 연행되고 다수가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부산에서 이틀째 유신철폐의 격렬한 시위가 계속되는 시각에 청와대 영빈관에서 유신 7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공화ㆍ유정회 의원들을 초청하여 흥겨운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부산시위로 파티를 중도에 끝내고 청와대 집무실로 돌아온 박정희는 최규하 국무총리에게 부산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할 것을 지시했다.

이어서 열린 임시국무회의는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할 것을 의결, 18일 0시를 기해 부산직할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박 대통령은 계엄선포와 함께 발표한 담화문에서 부산의 시위군중을 "지각 없는 일부 학생들과 불순분자들"로 규정했다.

부산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박찬긍 육군중장은 포고문을 통해 일체의 집회ㆍ시위를 금지하고, 대학의 휴교를 명령하는 한편 무장군인들을 시내 요소마다 배치했다. 그러나 학생과 시민들은 공수단의 무자비한 진압에도 불구하고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하는 가운데 시위는 마산으로 번져나갔다.
  
부마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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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민들과 학생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항의시위 소식이 마산에 전해지면서 학생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부산에서 버스로 불과 1시간 거리에 있는 마산은 생활권이 부산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부산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곧바로 알려지게 되었다.

경남대생 5백여 명은 18일 오후 "지금 부산에서는 우리의 학우들이 유신독재에 항거하여 피를 흘리고 있다", "3ㆍ15의거의 정신을 되살리자"면서 시위를 벌이고, 이중 일부 학생들이  시내에 진출했다. 학생들이 무학초등학교 앞에서 경찰에 난폭하게 연행되자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공화당사를 박살내고 양덕파출소를 파괴했다.

1960년 3월 이래 19년 만의 항쟁이었다.

시위군중들은 어둠이 짙어갈수록 더욱 수가 늘고 격렬해져 산호동파출소가 불탔으며, 이어 북마산파출소, 오동동파출소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밤 9시 30분경 경찰지원병이 늘어나 시위대들이 점거하고 있던 중심가 남성동파출소를 중심으로 시위군중들과 대치하게 되었다.

마산 시민ㆍ학생들의 시위는 19일 저녁에는 수출자유지역의 노동자와 고등학생들까지 합세, 더욱 격렬해졌다. 19일 새벽 3시까지 학생ㆍ시민들의 시위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부산시위가 마산으로 옮겨붙어 더욱 격렬한 양상으로 치닫자 정부는 20일 정오를 기해 마산지역 작전사령관 명의로 마산시 및 창원출장소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위수령 발동과 함께 마산시내에 즉각 군을 진주시켜 시청ㆍ경찰서 등 정부기관과 언론기관, 각 대학교에 대한 경계에 들어갔다.

4일 간의 시민ㆍ학생 봉기를 통하여 부산에서 1,058명, 마산에서 505명 등 총 1,563명이 연행되고, 이중에 학생ㆍ시민 87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으며, 651명이 즉결심판에 넘겨지는 등 극심한 수난을 겪었다. 부마항쟁은 대학생과 일부 고등학생, 시민ㆍ노동자들이 참여하는 시민항쟁으로 전개되었다.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제명을 계기로 폭발한 부마민중항쟁은 계엄령과 위수령으로 일시적으로 막을 내렸지만 불씨는 사그라들지 않은 채 17일에는 이화여대, 19일에는 서울대와 전남대, 24일에는 계명대 등 학생시위가 수그러들 줄 모르고 전국으로 확산되고, 마침내 10ㆍ26을 촉발시키는 뇌관이 되었다.


주석
7> 「김재규 옥중 수양록」, 김성태 엮음, 『의사 김재규』, 197~198쪽, 매직하우스, 2012.
8> 앞의 책, 196~19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박정희를 쏘다, 김재규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재규, #김재규장군평전, #부마민중항쟁, #김영삼총재제명, #수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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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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