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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기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씨의 실종사건을 놓고 다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사진은 생전 김씨의 모습. 최장기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씨의 실종사건을 놓고 다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사진은 생전 김씨의 모습.
▲ 최장기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씨의 실종사건을 놓고 다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사진은 생전 김씨의 모습. 최장기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씨의 실종사건을 놓고 다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사진은 생전 김씨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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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욱이 미국에 망명하여 외신에 폭로하거나 미하원 국제관계소위원회에서 증언한 박정희(정권)의 비리ㆍ비행ㆍ부정은 어마어마했다.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 박동선은 정보부의 주요 공작원이었다. 1964년 당시의 주미대사 정일권이 박동선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소개했으며 이후 박동선은 이후락의 지령을 받아 미국내의 공작을 맡았다. 처음에는 눈에 띄는 성과를 올리지 못했으나 주한미군 철수론이 나온 1970년 미의회를 상대로 매수 회유하라는 특별지령이 나간 뒤로 박동선은 중용되었다. 여기에 필요한 공작금은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쌀대금 가운데서 떨어지는 수수료로 충당되었다.

▲ 통일교회 간부인 박보희는 정보부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며 정보부는 그를 접점으로 하여 통일교회를 움직여 왔다.(이상 77년 6월 5일자 뉴욕 타임즈 회견).

▲ 한국에 투자하려는 외국기업은 수수료, 리베이트, 혹은 정치헌금이라는 명목으로 총투자액의 5%를 강제적으로 징수당했다. 이 돈은 박정희가 스위스은행에 개설한 비밀구좌에 입금되고 박정희가 스위스 은행에 개설한 비밀구좌에서 대외활동자금 등으로 사용되었다.(77년 6월 6일자 워싱턴 포스트와의 회견)

▲ 박 대통령이 가장 두려워했던 두 개의 세력은 71년 대통령선거 때의 상대후보와 미국 의회였다. 박 대통령은 김대중 문제를 유괴로, 미의회에 대해서는 '박동선에 의한 매수작전'에 의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 박 대통령의 김대중에 대한 감정은 심한 열등감에 기초를 둔 증오에 가까운 것이었다. 공화당정권은 선거법 위반의 혐의를 날조하여 김을 기소했고 1973년 8월에는 동경에서 김을 유괴하였다. 유괴작전의 지휘관은 당시의 이후락 정보부 부장이었다. 박 대통령이 직접 이 작전을 지휘했다는 증거를 갖고 있지는 않으나 이같은 중대한 계획이 대통령의 허락 없이 감행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 독재체제를 확립한 박 대통령은 미국이 어떤 태도로 나올 것인지에 괘념하고 있었다. 그는 미 행정부와 의회의 반대가 자기의 독재정치에 큰 영향을 끼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반대를 억제하기 위하여 박동선 스캔들이 실행에 옮겨진 것이다.

▲ 당시의 중앙정보부는 미국의 중앙정보부(CIA)와 연방수사부(FBI)의 두 비밀수사기관을 합친 것과 같은 것을 만들려는 의도에서 설립된 것이다. 나는 1963년부터 69년까지 6년 8개월간 가장 장기간 부장으로 근무한 사람이다. 내가 부장 때에는 미국에는 5인의 정식요원을 주재시켰는데 워싱턴에 2인, 유엔주재 대표부에 2인, 로스앤젤레스에 1인이었다.

그러나 내가 미국에 망명한 73년 이후 그 권한은 강화되어 현재 내가 알고 있는 한 워싱턴에 12인, 뉴욕의 유엔대표부에 4인, 그밖에 로스엔젤레스를 포함하는 미국 각지에 9인, 도합 25인이 있다. (이상 77년 6월 22일 미하원 국제관계소위에서 증언).

▲ 서울 지하철 건설은 프랑스와 일본이 경합했었다. 일본측은 기시(岸信介) 전 수상과 야스기(矢次一夫) 씨가 박 대통령에게 직접 요청함으로써 공사는 미쓰비시상사에 맡겨지고 당시 주일대사였던 이후락 씨가 한일간의 파이프역을 했다. 미쓰비시상사로부터 리베이트가 기시와 이후락 양쪽으로 건너갔으며, 그만큼 서울지하철 공사비는 비싸게 치였다.(77년 7월 17일, 교또통신과의 회견).

▲박 정권과 일본 자민당간의 '검은 채널'은 김성곤(전 공화당 제정위원장), 이후락, 이병희(전 무임소장관) 등이 그 역을 맡았다. 이병희로부터 자민당의 세이란까이(靑崗會) 멤버에게 선거자금 형식으로 비밀헌금이 여러 번 흘러갔다. 상사관계의 일본 측 창구는 기시 노부스케와 야쓰기 가즈오 두 사람이었다. 미쓰비시, 미쓰이, 이또쭈, 마루베니 등이 한국 측에 거액의 리베이트를 보낸 사실을 알고 있다(77년 7월 16일 마이니찌신문과의 회견). (주석 5)

 
 MBC PD수첩은 지난 5월 3일 "김형욱 양계장 암살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며 이를 처음 제기한 4월 11일자 시사저널 보도와 상반된 주장을 펼쳤다. 생전 김형욱 모습.
 MBC PD수첩은 지난 5월 3일 "김형욱 양계장 암살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며 이를 처음 제기한 4월 11일자 시사저널 보도와 상반된 주장을 펼쳤다. 생전 김형욱 모습.
ⓒ MB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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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김형욱의 폭로와 폭탄선언에 속수무책이었다.

그의 입을 막고자 여러가지 방법이 동원되었으나 허사였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파리에서 실종되고 말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형욱을 한국 땅에 끌어들이기 위해 끈질긴 노력을 다했다. 멕시코나 브라질의 대사직 또는 다른 요직을 내걸고 귀국을 권유했다. 김이 미국으로 건너간 뒤로부터 1979년 10월 그가 파리의 카지노에서 영구 실종될 때까지 정부는 김종필ㆍ정일권ㆍ백두진ㆍ홍종철ㆍ민병권ㆍ김동조 등을 연달아 김형욱에게 보내 귀국을 종용했다. 심지어는 이철승ㆍ박병배ㆍ고흥문ㆍ노진환 등 야당계 인사들도 그를 찾아가 귀국을 권유했다. 그러나 김형욱은 국내의 이와 같은 애타는 호소를 모조리 거절했다. (주석 6)


주석
5> 이상우, 『제3공화국 외교비사』, 177~178쪽, 조선일보사, 1984. 
6> 앞의 책, 17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박정희를 쏘다, 김재규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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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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