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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6일, 4447일, 4022일. 이 숫자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각각 쌍용차 해고노동자, KTX 승무원, 삼성 반도체 백혈병 피해자들이 복직 혹은 합의를 위해 싸운 시간이다. 모두 10년이 넘는다. 10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님을 강조하기에도 무색한 시간이다.

많은 이들이, 심지어 나를 포함해서, 말로 내뱉지 못한 말들이 있었다. 왜 굳이 그렇게 오랫동안 다른 곳에 취직하지 않고 싸우는 건가? 싸우고 있는 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그저 묵묵히 그들을 응원하며 언제가 될지 모를 복직을 같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많은 사회적 비극이 그러하듯,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스위치처럼 관심을 껐다가 다시 켤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복직 혹은 배상에 '드디어' 합의했다는 기사를 보면 다시 기억을 되돌아보는 '평범한' 일상을 보냈을 것이다.

싸우고 연대하는 사람들 곁에서, 꾸준하게 
 
 <여기, 우리, 함께> 앞표지
 <여기, 우리, 함께> 앞표지
ⓒ 갈마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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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의 당사자가 아닌데도 그들의 곁에서 그 투쟁에 연대하고 기록한 사람들이 있다. 아마 그들도 연대와 기록을 시도하기 전에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이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왜 연대를 하는지에 대해 뾰족한 답이 없다. 오히려 연대를 하면서 답을 찾아간다. 기록노동자 희정은 연대자를 "오래도록 싸우는 사람들이 세상을 향해 던진 질문에 가장 먼저 응답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여기, 우리, 함께>는 그 질문에 응답하는 사람들을 기록했다. 

싸우는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무관심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식을 하고 고공에 오르는데, 세상이 관심이 없는 것만큼 힘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국합섬 노동자 100여 명의 고용을 승계하겠다는 말을 뒤집고 공장 가동을 멈춘 뒤 폐업을 선언하는 탓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린 차광호가 굴뚝에 오른 것이 파인텍 투쟁의 시작이다. 

굴뚝 밑에서는 홍기탁과 박준호가 밥을 올려주면서 투쟁을 계속했다. 차광호가 408일 후 굴뚝에서 내려오고 복직했지만 회사가 생활보장 등의 약속을 지킬 의지가 없음을 확인하자 이번에는 홍기탁과 박준호가 굴뚝에 올랐다. 
 
하늘에 오르면 그나마 카메라가 비춘다. 목소리가 전파를 탄다. 그러나 "왜 투쟁하는가?"라는 질문이 시작되는 순간, 또 다른 곤혹이 시작된다. 싸우는 사람들은 싸우는 내내 사람들을 납득 시켜야 한다. (중략) 그러나 나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질문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왜 떠나지 않았느냐'고 물었는데 그는 '왜 함께했느냐'고 받아들였다. 그는 떠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함께한 것이다. 고공에서 박준호가 덧붙인다. "지내왔던 사람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의리. 그게 우선이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굴뚝 밑에서 밥을 올려주는 것이 '연대'인가? 저자는 한때 이런 궁금증을 가졌다고 한다. 연대라기보다는 '시혜'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고.

'밥차'의 형태로 싸우는 이들의 곁에 머무르는 이들이 있다. 투쟁하는 이들도 밥은 먹어야 하니까. 각종 농성장을 찾아가는 '밥통'이라는 이름의 협동조합은 '먹는 일'의 소중함을 안다. 그리고 그 '먹는 일'을 위해서는 누군가 노동을 해야 한다.

밥통의 상근 매니저였던 손지후씨는 밥의 힘을 긍정한다. 투쟁이 길어질수록 밥은 먹어야 하는데 밥 차릴 힘마저 없을 때, 같이 밥을 먹자고 다가오는 사람이 있으면 누군가는 나를 잊지 않았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연대의 다양한 가능성을 도모하는 사람들 

싸우는 사람들에게 밥을 주거나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닌 방식으로 연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미술가와 뮤지션이다. 그들은 현장의 노동자들에게 '좋은 이웃'이 되고자 했다. 장기화되는 투쟁의 한복판에서, 외롭지 않기를 바라며 현장에 작업실을 차렸다. 2007년부터 2019년, 4464일이라는 최장기 투쟁기록을 세운 콜트·콜텍 농성 현장에도 예술가들이 있었다. 작가 정윤희도 그들 중 하나다. 
 
정윤희는 "자꾸 엮이고 싶다"고 했다. "제 삶의 일부가 됐어요." 이는 콜트·콜텍 문제가 자신의 관계나 경험을 넘어 창작 작업의 일부가 되었다는 말이기도 한데, 현재 정윤희는 노조 파괴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이라고 한다. 예술가가 들여다보는 노동조합 파괴라니, 흥미롭다. (중략) 어느 날은 지지받지 못해 아쉽고, 어느 날은 콜트·콜텍 싸움 그 자체로 기운을 얻는다. "계속 버티고 지키고 있으시잖아요." 그래서 정윤희는 '연대'를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자기 삶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연대를 통해 맺어지는 관계가 나를 성장시키고, 서로의 존재가 북돋움이 되어 나의 삶을 지켜준다. 

어떤 수단을 가지고 연대를 하간에, 연대자들은 현장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끊임없이 고민한다. 뮤지션 황경하는 말한다. "싸우는 데 젓가락이라도 들 수 있으면 좋은데" 음악을 할 줄 알기에 음악을 통해 연대를 하는 것이라고. 음악은 결국 사람들을 모으고, 현장에서 공연을 기획하여 이슈와 연대를 끌어내는 일이다. 황경하의 말을 빌리면 그것이 그가 "우산을 씌워주는" 방법이다. 

지난 5월 1일은 노동절이었다. 우리 사회 곳곳에는 여전히 투쟁이 지속되고 있고, 그들 곁에서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 연대를 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많은 이들에게 그들은 '정규직 밥줄을 부여잡고 있는' 우악스럽고 이기적인 존재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싸움이 아니라 생존이다. 이것을 잊는 순간 싸우는 사람과 곁에서 연대하는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정규직 노동자는 해고되고, 비정규 노동을 하던 이는 사라졌다. 두 사람은 닮은꼴이다. 고용형태가 다른데도 자꾸 나풀나풀 가벼워지라는, 아니 저렴해지라는 노동시장의 요구를 받다 보니 닮아 버렸다. 저들의 싸움을 방치한다면 우리는 무엇이 되었건 자꾸 닮아갈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감춰진다는 점에서, 한껏 가벼워진다는 점에서. 가벼워진 노동을 덧입은 우리는 어디론가 사라질 것만 같다. 이대로 괜찮지 않다. 그래서 기록한다. 사라지기 전에. 아니 사라지지 말라고.

여기, 우리, 함께 - 오래도록 싸우고 곁을 지키는 사람들, 그 투쟁과 연대의 기록

희정 (지은이), 갈마바람(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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