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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해 들어오는 남편의 손이 향기롭다. 받아든 비닐봉지 안에는 봄내음 머금은 녹색 쑥이 가득이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남편은 일터 근처 밭에서 쑥을 한아름씩 캐오곤 한다.
 
쑥 사진입니다.
 쑥 사진입니다.
ⓒ 김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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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으로 작년에는 쑥된장국과 쑥부침개를, 재작년에는 무려 쑥떡을 만들어 먹는 기염을 토했다. '손으로 뭉친 반죽을 살짝 던졌을 때 흩어지지 않고 모양이 유지될 정도'라는, 초보자에겐 애매하기 그지없는 농도조절 과정 때문에 실패의 쓴맛을 안겨주었던 백설기의 추억. 그와 달리 쑥떡은 적당히 간하고 반죽해서 찜통에 쪄내기만 하면 봄을 만끽하게 해주는 기특한 녀석이었다. 집에서 내가 직접 떡을 만들다니, 얻어지는 뿌듯함은 덤이었다.

캐나다에 봄이 오면 한국인들의 눈길을 잡아끄는 몇 가지 나물들이 있는데 그중 참나물과 산마늘이 으뜸이다. 살짝 데쳐 소금, 참기름, 참깨, 다진마늘 넣어 조물조물 무쳐내면 그 식감과 향이 으뜸인 참나물은 할 수 있는 한 많이 따서 소분해 냉동실에 얼려놓고 두고두고 꺼내 먹는다. 명이나물이라고도 하는 산마늘은 구운 고기와 함께 먹으면 궁합이 기가 막힌데, 간장장아찌도 담그고 김치도 만든다.

이곳에서도 웬만한 한국 식재료는 다 구입할 수 있지만 가장 아쉬운 것을 고르라면 바로 '신선한 봄나물'이다. 그러니 지천으로 돋아나는 쑥과 참나물, 산마늘 등에 욕심을 내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지만 이곳에선 공공장소나 사유지에서는 잡초일지라도 함부로 뽑다가 적발되면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한다.

실제로 산마늘 한 뿌리 당 가격을 매겨 수천 불의 벌금을 문 사람이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아다니기도 한다. 이번에는 다행히도 아는 캐네디언 소유의 농장 내에서 산마늘 군락지를 발견, 허락을 받고 마음껏 캐오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이렇듯 봄나물에 과한 욕심을 부리는 것 외에도, 외국에 살다보면 '별 걸' 다 만들어 먹게 된다. 집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갖가지 먹거리들이 즐비한 한국과 달리, 캐나다에는 한국 음식을 파는 식당이 많지 않고 가격도 저렴한 편이 아니다보니, 먹고 싶은 것이 생기면 자력갱생을 택한다. 그래서 족발, 순대국, 꼼장어 볶음, 연어초밥 같이 보통 밖에서 사먹는 게 당연하다 여겨지는 음식들도 집에서 냄새 폴폴 풍겨가며 만들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 가정이 그렇듯 우리집도 주식은 한식이다. 일단은 남편과 내가 먹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에게도 한국인의 입맛을 잃게 하고 싶지 않아서다. 어릴 때부터 한식을 위주로 먹다보니 첫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갈비탕, 둘째는 잔치국수, 셋째는 찜닭과 산마늘 장아찌다.

코로나19 때문에 무산되기는 했지만 이번 여름 한국을 방문하면 김치처럼 매운 음식도 곧잘 먹는 아이들 덕분에 어른들께 좀 칭찬 받지 않을까 은근 기대도 했는데... 아쉽다.

아이들은 도시락으로 샌드위치나 파스타를 싸가기도 하지만, 볶음밥이나 불고기덮밥, 김밥 같은 한국음식도 종종 가져간다. 'Traditional Day(전통의 날)' 행사가 있는 날이면 외국인들도 대체로 거부감없이 즐겨하는 불고기나 잡채를 들려 보낸다. 작년에는 선생님과 아이들 사이에서 한국 음식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산마늘 간장장아찌와 김치 사진입니다
 산마늘 간장장아찌와 김치 사진입니다
ⓒ 김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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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냄새를 싫어하는 아이들이 있을까 걱정되어 자극적인 음식은 리스트에서 제외했는데 어떤 한국인 아이는 김치를 들고 왔다고 한다. 다문화 사회인 까닭에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도록 어려서부터 교육받아서인지 매워서 못 먹을지언정 거부감을 표하는 아이는 없었고, 심지어 리필을 요청하기도 했단다.

그때 학교에서 불고기를 맛봤던 큰딸 친구들은 우리집에서 생일파티를 하게 되었을 때 내게 한국 음식을 부탁했다. 나는 기꺼이 불고기와 볶음밥을 만들었고 아이들은 고맙게도 그릇을 싹싹 비워줬다. 아이들의 국적이 캐나다, 이란, 중국, 르완다 등 다양했던 걸 보면, 한국음식의 세계화도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한국 음식을 파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한국 음식을 찾고 즐기는 외국인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놀랐었다. 과거와 달리 요즘에는 한국여행을 다녀온 젊은이들도 많고 '원어민 교사'로 한국에서 몇 년간 살다온 사람들도 심심찮게 만나볼 수 있다.

그들이 은근한 '한국 음식 전도사'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 지인은 산마늘 장아찌를 만들어 캐네디언 친구에게 '코리언 피클' 같은 거라며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그 친구도 그 일로 한국 음식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중국식당, 베트남 쌀국수집, 일본 스시집 등은 아무리 작은 마을에 가도 한두 개쯤은 꼭 있는데, 한국 식당은 아직 그렇게 보편화되어 있지 못하다. 혹자는 한국음식이 세계화되지 못하는 건 '레시피'가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던데 일리있는 말이라 생각했다. 늘 먹는 음식도 레시피를 지켜가며 음식을 만드는 이들에게 '적당히' 손맛으로 만드는 한국음식은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실제로 아는 중국인이 김치 레시피를 물어온 적이 있다. 김치를 너무 좋아하는데 인터넷을 뒤져봐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나부터가 계량하지 않고 담그는 김치 레시피를 영어로 쓰려니 꽤 시간이 걸렸지만 '전도사'의 사명을 띠고 열심히 적어 건네주었던 기억이 난다. 외국인들의 입맛을 분석하여 계량화된 레시피가 전략적으로 퍼져나간다면 한국 음식을 즐기는 이들이 더 늘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엄마는 밑반찬을 잔뜩 만들어놓거나 김치를 담근 날이면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부자됐다!" 산마늘로 간장장아찌와 김치를 만들어 냉장고 그득히 채워두고, 들에서 캐온 쑥도 넉넉히 들여 놓아서 '부자'가 된 나는 문득 고조선 건국 신화에 나오는 곰이 떠오른다.

사람이 되기 위해 동굴에서 쑥과 마늘만 먹으며 버텼다는 대단한 곰. 그는 환웅에게 이렇게 빌었더랬다. "원컨대 모습이 변화하여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올 봄, 우리 가족도 쑥버무리와 산마늘 김치를 먹으며 코로나19를 견뎌야겠다. 그리고 환웅에게 빌어보아야 할까보다.

"원컨대 코로나19가 물러가 사람처럼 살았으면 합니다."

그나저나 곰은 100일을 버티니 사람이 되던데, 우리의 집콕도 100일이면 될런지 몹시 궁금하다.

태그:#캐나다, #봄나물, #쑥, #산마늘, #코로나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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