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사냥의 시간> 포스터.

영화 <사냥의 시간> 포스터. ⓒ Netfilx

 
"왜 <사냥의 시간>은 <파수꾼>의 인기를 이어가지 못했나."

지난 4월 23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영화 <사냥의 시간>이 마주한 질문이었다.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2011년 영화 <파수꾼>을 통해 유수 영화제에서 신인 감독상을 휩쓸었던 윤성현 감독이 9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왔으니, 관객들이 흥분과 기대를 감출 수 있었을까.

영화의 여러 면에 대한 상찬에도 불구하고, <사냥의 시간>이 <파수꾼>과 비교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가서, 왜 <사냥의 시간>은 <파수꾼>의 인기를 계승하지 못했을까.
 
애초 <사냥의 시간>이 <파수꾼>을 계승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파수꾼>은 변치 않을 것 같았던 세 친구의 유대가 무너져버린 디스토피아를 그렸다. 사춘기에 들어선 세 친구가 있고 그들 사이에 오해가 생긴다. 감정을 사려 깊게 표현하는 대신 과격하게 표현하는 희준(이제훈)이 있고 그런 희준이 미워 외면하는 동윤(서준영)과 기태(박정민)가 있다. <파수꾼>은 이들의 현재와 기억을 비교 관찰하고 어디서부터 그들이 잘못된 건지를 파악하되, 화해의 공은 카메라가 아닌 인물들에게 쥐어주는 영화였다.
 
반면 <사냥의 시간>은 경제 악화로 화폐가치가 무너진 세상에서 한탕을 계획하던 네 친구가 깊은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꿈과 가족, 우정과 채무로 뭉쳐 도박장에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한 명의 경찰이 추적한다. 이후 영화는 본격적으로 장르적 색채를 선명하게 밝히는 데 주력한다. 이 과정에서 추적과 도피, 제압과 반항이 발생한다. <사냥의 시간>의 렌즈 초점이 모든 힘을 집중하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의 긴장과 급박함이다.
 
 영화 <사냥의 시간>의 한 장면.

영화 <사냥의 시간>의 한 장면. ⓒ 넷플릭스

 
<사냥의 시간>과 <파수꾼>의 교집합은 윤성현이라는 감독과 배우 이제훈, 박정민 그리고 조성하의 재결합 뿐이다. 감독이 구축한 디스토피아 세계관과 그 속에서 그가 다루는 장르적 특징은 전혀 다르다. 결국 이 둘은 너무나도 다른 영화다.
 
<사냥의 시간>의 문제는 감독이 공들인 장르적 색채가 다소 옅어 보인다는 점이다. 조직 폭력배들이 비호하는 도박장을 준석(이제훈) 일당이 털면서 예견됐던 개인과 조직 간의 갈등은, 조직이 아닌 한(박해수)이라는 개인과의 갈등으로 변모한다. 한은 경찰과 관계가 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인물이다. 이 지점부터 한은 <터미네이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끝까지 간다> <악마를 보았다> 등 여러 영화에서 본 듯한 추격전을 시작한다. 한은 이 영화에서 T-1000이고 안톤 시거이며 창민이자 동시에 수현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절대적 존재의 단단함은 준석 일당을 징그럽고 집요하게 추적하는 과정으로 응징하는 대신, 그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일당에서 이탈했을 때를 기다렸다가 옆구리를 찌르는 방식으로 빛이 바랜다.
 
이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사냥의 시간>을 차라리 소년만화에 가까운 영화로 간주하는 게 나아 보인다. 소년만화에는 주인공이 단계적으로 도장깨기와 깨지기를 거듭하며 도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적들이 있다. <사냥의 시간>에서 한은 "형이 언제든 너희 잡을 수 있는데 발버둥치는 꼴이 재밌어서 봐준다"며 준석과 친구들을 잡았다가 놓아주고, 거의 잡은 순간에는 굉장히 천천히 다가간다. 준석과 일당은 첫 범죄에 들뜬 듯 기뻐하다가 두려워하게 되고, 한의 습격에 좌절감을 느끼다가 친구의 죽음에 분노하여 알 수 없는 힘과 용기를 얻는다. 아, 이 얼마나 만화적인가.
 
물론 이 영화가 마냥 유치하다거나 어색하지는 않다. 나는 분명히 이 영화가 좋다. 한의 총구가 이마를 향했을 때 있는 힘껏 좁혀지는 이제훈의 미간 주름은 <시그널>에서 무전기를 들 때 주름을 찡그리던 박해영 경위를 보는 것 같아 반가웠다. <응답하라 1988>과 <멜로가 체질>의 중간에 위치한 외형으로 익숙한 안재홍은 그의 소원대로 기존의 정형화된 자신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탈피했다. 특히 자본체계가 무너지며 누구나 총기를 구입할 수 있는 설정은 이 영화의 인물들이 총기를 사용하는데 어색하지 않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는 아직도 1980~1990년대 홍콩영화의 장면, 즉 결코 길거리에서 총기 사용이 합법화되지 않았지만 멋을 위해 무제한으로 발사되는 총격적을 잊지 못한다. 그건 현실적 합성을 떠나 최소한의 멋을 위한 세계관의 설정이다.
 
다른 관객들이 아쉬워하는 부분에도 사실 별 불만이 없다 (아, 박정민의 적은 출연분량에는 나도 매우 큰 불만이 있다). 최우식이 이 거친 영화에 전반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 많다. 그는 영화 <기생충>과 <거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조연으로 출연한 건 사실이다.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는 기댈 가족이라곤 누나밖에 없는 고등학생 유준을 연기했고 <거인>에서는 곧 고아원을 나가야 하는 나이지만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는 집으로는 돌아가려 하지 않는 영재를 연기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도저히 뒤로 발 디딜 곳 없이 막다른 지점에서 별 능력 없이 온전히 본인의 힘으로 버티어 뚫고 나가야 할 평범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해고당해 일을 할 수 없는 부모를 둔(다른 친구들은 부모마저 없다) 평범한 아들에 배치된 최우식은 최적의 선택이었다.
  
 영화 <사냥의 시간>의 한 장면.

영화 <사냥의 시간>의 한 장면. ⓒ 넷플릭스

 
<사냥의 시간>은 여러모로 다른 오마주들을 떠올리게 했다. 바에서 한이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모습은 <로스트 하이웨이>의 미스터리 맨 같았고, 지하주차장에서 빛도 없이 뚜벅뚜벅 걸어오는 모습은 <터미네이터>의 T-1000처럼 경악스러웠으며 도박장에서 일하던 상수(박정민)은 <타짜:원 아이드 잭>의 도일출을 다시 보는 것 같아 반가웠다. 봉수(조성하) 조직들의 무자비한 습격을 받았던 한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부산행>의 좀비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름만 갖췄을 뿐 선명하진 못했던 세계관의 색채, 만화적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몇몇 부분들, 그리고 <파수꾼>의 이름값에 많은 걸 염원했던 관객들의 기대치에 도달하지 못했던 여러 부분들은 <사냥의 시간>을 아쉽게 만들었다.
 
영화에서 준석과 장호(안재홍), 기훈(최우식)은 한의 추격을 피하고 피하다 함께 밀선을 타고 탈출하기로 했던 항구에 다다른다. 막다른 곳에서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도망 혹은 결투 뿐이다.

영화 역시 더 이상 뒤로 갈 수 없는 곳에서 가까스로 개봉할 수 있었다. 애초 2월 26일 극장 개봉을 계획했지만 갑작스레 '코로나 19'가 확산되면서 넷플릭스 개봉을 결정했고, 해외 판권으로 인한 가처분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넷플릭스로 공개된 <사냥의 시간>은 <파수꾼>의 인기를 이어가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좋은 영화였다.
사냥의시간 윤성현 파수꾼 이제훈 최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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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좋아합니다.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잘 쓰진 못합니다. 대신 잘 쓰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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