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5 10:55최종 업데이트 20.05.05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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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조용히 책을 읽던 아이가 다가와서는 이런 말을 했다. "엄마, 헤라는 참 나쁜 여자야. 난 헤라가 정말 싫어. 엄마도 그렇지?" 뜬금없이 무슨 말이냐고 묻자 아이는 좀 전까지 열심히 들여다 보던 학습만화의 한 페이지를 펼쳐보이며 말했다.

"내가 지금 별자리 이야기 읽고 있었거든. 제우스가 칼리스토라는 요정이랑 아기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데 헤라가 요정을 질투해서 곰으로 만들어 버렸대. 그래서 요정의 아들은 그 곰이 자기 엄마인 줄도 모르고 죽이려고 했다는 거야. 하는 수 없이 제우스가 두 사람을 하늘로 올려보내서 엄마인 칼리스토는 큰곰자리, 아들인 아르카스는 작은곰자리로 만들었대. 이 모든 게 다 헤라 때문이잖아. 아니면 다 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었는데. 헤라 정말 나빠!"


흥분한 아이의 설명을 듣자 순간적으로 웃음이 나왔다. 마냥 어리다고 생각했던 8살짜리 아들이 어느덧 이야기를 읽고, 이해하고, 극중 인물에 감정이입을 할 만큼 자랐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보고 자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아들이 다시 읽으며 당시의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비판받지 않았던 그리스 로마 신화의 가부장성
 

제임스 베리의 Jupiter and Juno on Mount Ida. 제우스와 헤라를 그린 것이다. ⓒ James Barry

 
어린 시절의 나 역시 헤라를 싫어했다. 왜 헤라는 제우스가 다른 사람들이랑 행복하게 살도록 그냥 두질 않는 것인지, 어째서 착하고 예쁜 여성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헤라만 가만히 있으면 모두가 평화롭고 행복할 것 같은데 매번 나타나서 시비를 거는 모습에 짜증이 났다. 주변의 다른 친구들 역시 헤라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고는 했다.

그런데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 모든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다보니 무언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사실 헤라는 분노해야 마땅했다. 아내가 끊임없이 자신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고 바람을 피우는 남편에게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 더구나 그런 남편이 최고 권력자라서 저항할 방법도 없었다면 얼마나 답답하고 속이 상했을 것인가.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곰으로 만들면 안 되겠지만 말이다. 그처럼 화를 내야 마땅한 헤라를 왜 나와 친구들은 그토록 미워했을까?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제우스야말로 문제였다. 신들의 왕인 제우스는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으면 백조나 송아지로 변신하는 수고를 무릅쓰고서도 겁탈하곤 했다. 쫓기다 못한 여성이 방문을 꽁꽁 닫아걸고 숨으면 햇볕으로 변해서까지 따라갔다. 앞서 등장한 칼리스토라는 요정 또한 사실은 제우스와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던 것이 아니라 아르테미스로 변신한 제우스에게 강간을 당한 후 임신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리스 로마 신화는 제우스의 행동을 두고서는 어떠한 비판적인 언급도 하지 않았다. 독자로 하여금 제우스의 모든 행동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동시에, 화를 내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헤라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끔 유도하고 있었다. 또한 제우스에게 겁탈 당한 여성들에 대해서도 종내에는 모두 체념하고 순응하며 '행복하게' 살았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아내가 성폭력 가해자인 남편에게 분노하는 대신 피해자에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껏 이 모든 내용을 대단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이, 제우스의 행실을 문제시하거나 이에 분노하는 목소리가 사회적으로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이가 보고 있었던 학습만화 역시 분노하는 헤라의 모습만 강조하고 있을 뿐 다른 문제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그러면서 나는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자체가 철저하게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의 산물임을. 그처럼 가부장적인 이야기가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대물림되어 반복될 정도로 우리가 남성중심적인 문명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이런 이야기를 읽고 성장한 사람들이 성차별적인 사고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사실을.

이야기는 당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생각을 담는 그릇인 동시에 구성원들에게 사회규범을 학습시키는 도구로서도 기능한다. 사회의 변화에 맞추어 각종 콘텐츠가 끊임없이 업데이트 되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성 규범이 변화하면 이를 다루는 콘텐츠 또한 거기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

그럼에도 성교육에 무관심하고 무지했던 우리 사회는 이제껏 시대에 역행하는 자료들을 그대로 방치해 왔다. 앞서 아이가 재미있게 보고 있었던 학습만화에 잘못된 성관념을 바탕으로 하는 내용이 아무런 비평 없이 그대로 들어 있었던 것이나, 지난해 어린이 대상의 한 인기만화에 여성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염산을 뿌렸다는 내용이 아무런 제재 없이 포함되어 논란을 일으킨 것 모두 마찬가지이다.

시대착오적 성교육, 바꿀 때 됐다
 

교육부가 지난 4월 30일 공식 페이스북에 올린 카드뉴스중 일부. 이 카드뉴스는 남성(아버지)의 공감능력 부족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는 의도로 제작되었다. 현재는 삭제된 상태다. ⓒ 교육부 페이스북

 
심지어 교육부는 지난주 '여성의 뇌와 남성의 뇌는 다르게 진화되었다'는 내용의 카드뉴스를 제작해 올렸다가 논란이 되자 말없이 삭제하기까지 했다. 시대는 변화하는데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전혀 변화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에 구시대적인 콘텐츠를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콘텐츠가 계속해서 잘못된 성관념을 낳는 악순환인 셈이다.

사실은 교육부에서 내세우는 성교육 표준안부터가 그렇다. 2015년 만들어질 당시부터 크게 논란이 되었던 교육부의 성교육 표준안은 수많은 비판의 목소리에도 아직까지 개정되지 않은 상태다.

이 표준안은 '남성의 성욕은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급격하게 나타날 수 있다'거나, '건전하지 못한 이성교제를 했을 때 성폭력이 발생할 수 있다'거나, '여성은 평소 우유부단하기보다는 단호한 모습을 보여야 성폭력을 예방할 수 있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전반적으로 남성의 성욕을 제어가 불가능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취급하며 성폭력의 책임을 여성에게로 전가한다.
 

교육부의 성교육 표준안 내용 중 일부 ⓒ 백목련

 
이런 상황이다보니 끊임없는 논의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성폭력 문제가 크게 개선되지 않는 것이 한편 당연하게 느껴진다. 한 쪽에서 상대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은 폭력이라고 아무리 말해 봤자, 강간을 하지 말고 불법촬영을 하지 말라고 아무리 소리쳐 봤자, 다른 쪽에서는 여전히 남성의 성욕은 조절 불가능한 것이라고, 그러니 여성이 알아서 조심해야 한다고, 문제가 발생하면 조심하지 않은 사람의 책임이라고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성범죄 판결에서 판사들이 피해자보다 가해자에게 이입하여 솜방망이 처벌을 한 것 또한 이러한 교육의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얼마 전 n번방 특별법이 통과되면서 이제껏 경미하기 짝이 없었던 성범죄의 처벌이 앞으로 한층 강화된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미성년자 의제 강간 연령은 기존의 13세에서 16세로 상향되며, 성착취물 역시 기존과 다르게 소지만 해도 처벌받는 쪽으로 바뀌게 되었다. 참으로 기쁜 소식이지만 그럼에도 교육의 변화 없이는 이러한 모든 것은 결국 미봉책일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해야겠다.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성에 대한 사람들의 근본적인 인식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성교육은 아주 기본 단계에서부터 달라져야 한다. 여성과 남성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남성의 성욕은 절대로 당연한 것도 아니며 결코 조절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 상대의 의사에 반하여 누군가를 만져서는 안 되며 함부로 사진을 찍어서도 안 된다는 것, 성폭력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아주 어린 나이부터 확실하게 인지시켜야 한다.

n번방 사건이 수면 위로 올라온 이후 많은 부모들이 가정과 학교에서 아이들의 성교육 문제에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성폭력과 성범죄에 경각심을 갖고 교육을 받는다 할지라도 해당 교육 자체가 잘못된 방향이면 별다른 효과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잘못된 성교육을 통해 잘못된 성관념이 더욱 공고해질 가능성까지 있다. 우리에게 새로운 법이 필요했던 것과 같이, 이제는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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