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는 최근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과 시카고 불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더 라스트 댄스>가 폭발적인 인기 몰이를 하고 있다. <라스트 댄스>는 조던이 마지막 우승을 차지했던 1997-98시즌을 배경으로 조던과 불스 팀원들, 그리고 NBA의 뒷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프로스포츠가 중단된 가운데 추억의 전설이나 명승부를 다룬 '레트로' 콘텐츠들이 스포츠팬들의 갈증을 달래주며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은퇴한 지 17년이 넘었는데도 조던이 농구계나 미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조던이 전성기를 누렸던 1990년대는 NBA가 미국을 넘어 글로벌 콘텐츠로 도약하던 전환점으로 꼽힌다. 조던이라는 걸출한 기량과 화제성을 겸비한 슈퍼스타의 탄생으로, 그를 활용한 마케팅 효과는 엄청난 신드롬을 일으키며 NBA 농구를 전 세계적인 인기상품으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조던이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한국에서조차 그의 인기는 절대적이었다.

1990년대는 한국 사회에서도 농구의 인기가 정점을 찍었던 르네상스 시절로 꼽힌다. 1994년 MBC에서는 미니시리즈로 최초의 본격 농구 드라마를 표방한 <마지막 승부>가 방영되어 장동건, 심은하 ,손지창 등을 최고 스타로 배출해내며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중·고교생들 사이에서는 일본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명작 농구 만화 <슬램덩크>가 그 시절 청춘들의 필독서로 자리매김했다. NBA 선수들을 롤모델로 하여 강백호, 서태웅, 윤대협, 채치수, 이정환 등 개성넘치는 캐릭터들의 '한국화'된 작명들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을 정도다.

90년대 미국에 NBA가 있었다면, 한국에는 농구대잔치가 있었다. 아직 프로화가 정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80년대-90년대 중반까지 실업과 대학팀이 한데 모여 최강팀을 가리는 세미프로 형식의 농구대잔치는 당시 국내 최고의 대회로 꼽히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스포츠뉴스의 메인이나 스포츠신문의 헤드라인을 농구 관련 뉴스가 장식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특히 90년대 인기 돌풍의 중심은 대학팀들이었다. 서장훈, 이상민, 문경은, 우지원, 서장훈 등을 앞세운 연세대학교는 1994년 농구대잔치 사상 최초의 대학팀 우승이라는 신화를 이끌어내며 말 그대로 아이돌급 인기를 누렸다. 현주엽-전희철-김병철 등을 앞세운 영원한 라이벌 고려대, 허재-강동희-김유택 등을 앞세워 농구대잔치 최다우승(7회)을 이룩한 기아자동차 등도 90년대를 논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팀들이다.

당시 농구경기가 열리는 체육관 객석은 관중들로 가득찼고 그들 대부분은 10대~20대의 젊은 팬들이었다. 마치 K팝 아이돌 스타들의 콘서트처럼 소녀팬들이 유독 많았다는 것도 그 시절 당시 농구 응원문화의 특징이었다. 남자 농구스타들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지금도 그 시대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은 1990년대를 '마지막 승부세대' '슬램덩크 세대' 혹은 '농구대잔치 세대'라는 타이틀로 추억한다. 소위 이전의 세대와 확연히 구분되는 신세대들을 통합적으로 지칭하는 'X세대'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 시절 청춘들은 왜 유독 농구라는 콘텐츠에 열광했을까. 마치 전문 모델들이 설정을 통해 보여주는 포즈들이, 농구에서는 드리블, 패스, 덩크, 슈팅 등 플레이 자체를 잡는 것과 유사하며 이는 하나의 그림이 된다. 

또한 90년대 초반은 우리 사회에서 그간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변화'와 '개성'에 대한 욕구가 용암처럼 솟구치던 시기였다. 스피드, 점프, 지구력 등 인간의 육체가 펼칠 수 있는 운동능력의 극한을 종합적으로 과시하는, 농구라는 스포츠 특유의 다이내믹함은, 이전 세대에 비하여 훨씬 감각적이며 역동성을 추구하는 당시 신세대의 취향과도 잘 들어맞았다.

복잡한 룰을 잘 몰라도 정신없이 빠른 경기템포와 바스켓에 공을 집어넣는 횟수를 따라잡는 단순한 시청만으로도 농구를 즐기는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실업 형님들을 연파하는 겁 없는 대학 동생들의 성장기는, 마치 낡은 기성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변화를 갈망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대리만족의 판타지를 줬다.

아쉬운 부분은 NBA가 조던의 시대 이후로도 오늘날까지 세계적으로 인기있는 스포츠 콘텐츠로 굳건히 자리매김한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프로화 이후로는 농구 열기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국농구가 90년대 '신세대 스포츠'라는 타이틀과 함께 한 때의 반짝 유행을 넘어서 팬들을 매혹시킬 만한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제공하는데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NBA는 조던의 은퇴 이후 한동안 주춤하는 듯 했지만 이후로도 코비 브라이언트, 르브론 제임스, 스테판 커리 등 수많은 다음 세대의 슈퍼스타들을 배출해내며 인기를 이어왔다. 90년대의 농구가 지금보다 더 거칠고 남성적이었다면, 현대농구는 더욱 빨라진 경기 템포에 3점슛과 스몰볼이 대세를 이룬 공격농구로 변화하는 트렌드를 유연하게 수용했다. 또한 미국 중심을 비롯한 전세계로 문호를 개방하면서 더욱 풍부한 선수자원과 넓은 시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한국의 90년대 농구 신드롬에는 많은 거품이 끼어 있었다. 90년대 등장한 '농구대잔치 세대' 스타들과 그들에 열광하던 '신세대'들 사이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개성과 스타일을 가지고, 뭔가 큰 일을 낼 것처럼 화려하게 등장했지만 정작 시간이 흘러서 돌아보면 왠지 2% 아쉬운 모습이라는 점이다.

안방에서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던 한국 남자농구는, 이후 국제 대회에서 드러낸 경쟁력의 한계, 프로화 출범 이후 외국인 선수와의 경쟁에 밀린 국내 선수들의 수준차이, 성적지상주의에만 집착하는 한국농구계의 비전과 상품성 부재 등이 겹치며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었다. 결과적으로 90년대까지 한국농구와 스타들에게 가지고 있었던 대중의 판타지에 전혀 부응하지 못했고, 농구의 인기는 그렇게 주류 스포츠에서 밀려났다.

농구를 소재로 활용한 각종 대중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였다. 드라마 <마지막 승부> 는 방영 당시에서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당시 농구인기의 트렌드에 잠깐 편승한 것 뿐 드라마에서 묘사해내는 농구의 수준이나 극적 완성도 역시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드라마가 종영되자 농구에 대한 관심도 그것으로 끝이었고 이후로 비슷한 콘텐츠가 활발하게 제작되었다거나 인기를 끈 적도 없다. 

만화<슬램덩크>의 주인공들은 전국대회 우승을 이루지 못한 채 뭔가 석연치 않은 용두사미 구성으로 급하게 마무리되었다. 2부가 나올 것이라는 소문만 무성했지만, 결국 소문으로만 끝난 채 조용히 시간이 흘러 팬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갔다.

1990년대 농구대잔치 세대와 스타들을 소재로 한 콘텐츠들은 최근까지도 간간이 방송이나 대중문화에서 다시 조명을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 추억팔이에 의존한 단발성 이벤트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떤 면에서는 마이클 조던의 시대 이후에도 수많은 아이콘과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냈던 NBA과 달리, 한국농구가 아직까지도 농구대잔치 시절을 대체할만한 화제성있는 콘텐츠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90년대 신세대들의 행보도 한국사회 속에서 농구 인기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자본주의와 민주화의 축복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장하는 듯했던 신세대는 정작 90년대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잉태한 IMF와 경기불황의 파고를 직격탄으로 맞아야 했던 '불행한 세대'였다. 군사정권에서 민주화로, 다시 보수에서 진보로, 정권교체로 인한 정치적 격변기와 경기침체 및 청년실업의 장기불황을 거치며 절박한 생존경쟁 속에서 어느덧 '낀 세대'의 운명을 맞이해야 했다.

한때 세상을 바꿀 것 같았던 90년대의 청춘들도 이제 세월이 흘러 신세대에서 '기성세대'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나이가 되었다. 한때 한국농구 세대교체의 주역이었던 농구대잔치 세대는, 이제 어느덧 지도자나 행정가 혹은 방송인으로 전업하며 사회를 이끄는 '어른'의 위치에 올라섰다.

90년대 한국농구 신드롬의 수혜를 가장 많이 누리면서 살아온 세대인만큼 한국농구의 흥망성쇠와 중흥에 대하여 남다른 책임감이 필요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덧 2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 시절 누구보다 농구를 사랑했던 수많은 청춘들에게 90년대는 왠지 그리움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마음속의 '화양연화'로 오랫동안 남아있을 듯하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마이클조던 농구대잔치 레트로열풍 슬램덩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