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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책표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책표지
ⓒ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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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

'악의 평범성'은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H. Arendt)가 제창한 용어다. 이 만한 '신 스틸러'가 따로 없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본문 맨 마지막에 이르러 비로소 딱 한 번 등장하는데, 1회 등장으로 책 전체의 메시지를 평정했다.
 
죽음을 앞두고 그(아이히만)는 장례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냈다. (···)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을. (349쪽) 

독자들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읽어내며, '무사유(thoughtlessness)'의 악성에 집중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곧 악이며, 그 같은 무사유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공유한다.

좋은 독해다. 건강한 이해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그것만 겨냥하고 있지 않다. 1961년에 재판이 열려 항소심까지 가서 이듬해 5월 사형언도로 종료된 예루살렘 법정에 의미심장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또 하나의 특별한 주제를 동시에 제시한다.

아렌트는 예루살렘 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 자체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견지한다. 예루살렘 법정에 대한 세밀하고 치밀한 묘사로 시작되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수정증보판에 붙인 '후기'를 다음의 문장으로 끝맺음으로써 아렌트는 대단한 수미쌍관(首尾雙關)을 완성했다.
 
이 보고서는 예루살렘 법정이 정의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는가라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다루고 있지 않다. (404쪽)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로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작성자의 진술에 입각하면, 예루살렘 법정과 정의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검토하는 보고서였다.

정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시작하면서 아렌트는 예루살렘 법정이 '피고 아이히만이 무엇을 잘못했느냐?'가 아니라 '유대인이 무엇을 겪었느냐?'를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재판 초기, 검사는 논고를 통해 이 재판에서 "유대인의 비극 전체가 주요관심사가 될 것이다"라고 못박았다. 관련하여, 아렌트는 예루살렘 법정이 정의를 위한 장소가 아니라, '쇼'를 위한 최적의 장소였음을 지적한다.
 
전반적인 재판의 분위기를 주도한 사람은 란다우 판사였다. 또 쇼맨십을 아주 좋아하는 검사의 영향 때문에 재판이 쇼처럼 되는 것을 막는 데 란다우 판사가 최선을, 그의 모든 힘을 다했음은 처음부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러한 노력이 항상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쇼가 시작할 때 커튼이 올라가는 것과 같은 효과를 자아내는 법정 정리의 멋 없는 고함소리와 더불어, 소송절차가 방청객 앞의 무대에서 시작된다는 것 때문이다.

(···) 이스라엘 수상인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이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납치하여 '유대인 문제 최종해결책'에 대한 그의 역할을 재판하도록 예루살렘 지방법원으로 압송하기로 결정했을 때 염두에 뒀던 쇼와 같은 재판을 위해서 이 법정은 분명히 그리 나쁜 장소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51쪽) 

물론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 범죄혐의가 없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렌트는 그의 행위를 '유대인에게 저지른 죄' 정도가 아니라, '유대인의 몸을 빌려 인류에게 저지른 과오'로서 치명적인 죄악(인간성 파괴)으로 엄중히 규정했다. 그리하여 아이히만의 범죄는 인류 전체를 대표하는 국제법정에서 다뤄져야 한다는 게 아렌트의 주장이었다(칼 야스퍼스도 동일한 주장을 했다).

허나 이 주장은 대체로 노골적 적대감을 자극했을 뿐, 동조자를 구하기 힘들었다. 예루살렘 법정은 개정된 이후로는 판결을 위하여 다만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아렌트는, 반유대주의의 상징으로서 아이히만이라는 개인을 다루겠다는 예루살렘 법정의 '공식적' 의도를 비판했다.

즉, 유대인에게 있었던 홀로코스트에 대해 마치 여타 민족(인종)들을 향해 복수라도 하듯 법정의 여러 국면들을 연출하는 한편, 유대인 정체성을 덜 중시하는 '홀로코스트 이후 세대' 유대인에게 참교육(?)을 시도하려는 예루살렘 법정을 비판했던 것이다.

어느 경우에도 법정은, 사법적 정의를 추구하는 재판이 거기서 진행돼야 한다는 점에서, 재판 이외의 다른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아렌트의 입장이다. 그러나 1960년대 초 아이히만을 피고로 세운 예루살렘 법정은 그렇지 않았다고 아렌트는 평가했다.

정의를 추구하는 법정이 정작 정의를 나몰라라 한다는 아이러니는, 불쾌한 표식도 악독한 사전예고도 없이 평범·진부한 모습으로 악이 출현한다는 아이러니 못지않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렌트가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다. 헌데 사실 그 메시지는 '뚜렷한 악의(malice)나 앙심(rancor)이 부재하는 악'을 다룬다는 점에서 악의 평범성과 분리불가능한 '한몸'이기도 하다.

태그:#예루살렘 법정,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 #유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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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사람들을 위한 정치수업], [해나(한나) 아렌트의 행위이론과 시민 정치(커뮤니케이션북스, 2020)], [박원순의 죽음과 시민의 침묵], [(2022세종도서) 환경살림 80가지] 출간작가 - She calls herself as a ‘public intellectual(지식소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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