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람의 언덕> 포스터

영화 <바람의 언덕> 포스터 ⓒ 영화사 삼순

 
바람은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정처 없이 세상을 돌아다닌다. 엄마 영분(정은경)은 바람 같은 사람이었다. 오랜 지병을 앓다 죽은 남편을 떠나보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고 자기 삶을 찾아 이리저리 거처를 옮겨 다녔다. 결혼도 여러 번 했다. 그렇게 돌고 돌아 오랜만의 내 고향. 많은 것이 변했지만 이곳 태백에서 새 출발을 하고 싶다.

영분는 태백에서 필라테스 학원을 운영한다는 뜻밖의 소식을 듣고 갈등한다. '한 번 찾아가 볼까? 아니야, 자식 버린 엄마가 무슨 염치로.' 영분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딸이 운영하는 학원 근처를 서성이다 얼떨결에 학원에 들어가게 되고, 딸 한희(장선)와 조우한다.

그래서 자신의 신분을 숨긴다. 하지만 관객은 두 사람의 관계가 모녀지간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같은 노래를 흥얼거리고, 웃음이 많고 살가운 성격, 갑자기 찾아오는 몸의 통증에도 당황하지 않고 이내 지나가리라 생각하는 덤덤함까지. 무엇보다도 한 사람의 객체로서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자기 삶을 짊어지는 선택과 책임감이 닮았다.

의붓아들 용진(김태희)에게 상속 상속재산 포기각서에 도장을 찍어주고, 택시운전사 윤식 씨(김준배)에게도 먼저 만남을 제안한다. 가진 것은 없지만 욕심부리지 아니하고, 순간마다 진심을 다하는 사람이다.

엄마와 딸,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어
 
 영화 <바람의 언덕> 스틸컷

영화 <바람의 언덕> 스틸컷 ⓒ 영화사 삼순


한희는 혼자 산 세월이 녹록지 않아 보인다. 학원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회원을 모으기 위해 전단지를 붙인다. 혼자 말하고 일하고 먹고 잔다. 혼자서 하는 일이 꽤나 익숙해 보이나 사실 사무치게 외롭다. 그래도 생모가 붙여준 이름처럼 기쁘게 웃으면서 살아가려 한다.

한희가 필라테스 강사인 건 우연이 아니다. 필라테스는 어긋난 몸의 교정을 도와주는 운동 중 하나다. 두 사람의 비틀어진 관계와 어긋난 삶을 자연스럽게 이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엄마임을 숨기고 강사와 수강생으로 만났을 때. 엄마 영분은 딸의 부드러운 손길이 너무 좋았다. 자세를 잡아주고 여기저기를 만지고 쓰다듬고 껴안으면서 둘은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하게 된다.

'너는 내 딸이야'라고 밝혔다면 하지 못할 마음도 나누었다. 처음 만났을 때 어색함은 사라지고 한희는 사적인 이야기까지 털어놓으며 영분에게 마음을 연다. 영분은 학원을 나오며 문밖의 전단지를 한 움큼 챙겨 온다. 수강생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라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서 전단지를 붙인다.

좀처럼 찾기 힘든 전무후무한 여성 캐릭터
 
 영화 <바람의 언덕> 스틸컷

영화 <바람의 언덕> 스틸컷 ⓒ 영화사 삼순

 
영화 <바람의 언덕>은 <들꽃>, <스틸 플라워>, <재꽃> 꽃 3부작을 연출한 박석영 감독의 네 번째 신작이자 확장된 박석영 유니버스다. 혼자서 우뚝, 외롭고 힘들어도 꿋꿋이 삶을 살아가고 있는 독립적인 두 여성을 그려 냈다. 다른 길을 걷던 두 여성이 사랑의 끈으로 이어짐에 따라 함께하는 이야기다.

여성을 어머니나 남성을 위한 조력자로 그리지 않고 한 인간으로 주목한다. 영분은 한국 영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전무후무한 캐릭터다. 어머니 하면 떠오르는 희생과 포기가 아닌, 자립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떻게 이런 캐릭터가 탄생하게 되었을까 싶을 만큼 도전적이고 진취적이다. 너를 버린 것에 미안함을 평생 짊어지고 속죄하기보단, 한 개인으로서의 인생을 살고 싶어 했다. 때문에 미안하지만 미안하다 말하지 않고, 시간을 돌리고 싶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한희는 이런 엄마를 전적으로 이해한다. 같은 여성으로서 어린 나이에 힘들고 무서웠을 엄마를 딸이 아닌 같은 여성으로 존중한다. 너 때문에 인생이 망가졌다는 엄마의 절규에 오히려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고맙다고 말하는 딸이다.

어떨 때는 굳이 말을 섞지 않아도 절절해지기도 한다. 영화 속 모녀지간은 말이 많지 않다. 대신 스킨십을 하며 충분히 잃어버린 세월의 간격을 좁혀간다. 언어를 통해 이해하지 않아도 비언어를 통해 충분히 교감한다. 그래서 모녀 사이는 서로 제일 친한 친구가 된다고 말하는 이유기도 하다.

<바람의 언덕>은 자본에 휘둘리지 않고 소수의 스태프와 감독이 협력하는 작가주의 영화에 속한다. 정형화되지 않은 틀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펼쳐 놓는다. 이에는 배우들의 호연이 있어 가능했다. <재꽃>, <우리집>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 배우 정은경과 <소통과 거짓말>로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한 배우 장선, 그리고 김태희, 김준배 등 탄탄한 연기력으로 다져진 배우들의 힘이 느껴지는 영화다.
 
 영화 <바람의 언덕> 스틸컷

영화 <바람의 언덕> 스틸컷 ⓒ 영화사 삼순

 
설원의 바람소리만 들리는 언덕은 거칠 것 없이 자유롭다. 카메라는 둘의 과거를 캐지 않는다. 플래시백 없이 모녀의 삶을 켜켜이 쌓음으로써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는다. 나를 왜 버렸고, 왜 버릴 수밖에 없었는지. 신파 없는 담백한 모녀는 오히려 신선한 충격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시작부터 조심스럽게 쌓아 올린 감정을 이내 폭발하게 만드는 능력을 갖추었다. 같이 한 세월이 많이 않지만 끈끈한 유대감이 느껴진다.
바람의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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