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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세상이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로 나뉠까. 많이들 떠들던 인공지능(AI)이 아닌 바이러스가 지구적 변화를 일으켜 "바이러스가 인공지능을 이겼다"고 한다. 박노자 교수는 선진국 신화, 미국 신화, 시장 신화가 깨지고 있다고 한다. 일상의 정지를 인류에게 삶을 바꾸라는 신호로 받아들인다면 먹구름 뒤의 희망을 의미하는 '실버 라이닝'이다.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는 바이러스라는 독한 지적을 받으면서도 성장을 추구해온 인류가 얼마나 바뀔까.  

바이러스 확산을 막는 강력한 행위주체는 국가다. 생명을 구하기 위한 조치가 경기침체를 일으키기에 경제정책도 동시에 쓴다. 한 언론은 헬리콥터 머니를 뿌리는 지금이 '정부의 시간'이라고 했다. 국가권력의 과잉으로 인한 사생활 침해, 정보장악과 통제 우려에서부터 심하게는 파시즘화 우려까지 있다. 2009년 금융위기 때 공적자금을 쏟아붓자, "국가의 귀환"이니 "자고 나니 사회주의"라는  말이 튀어 나왔었다.

​기업은 정부에게 손을 벌린다. 국민 세금을 쓰는 것이기에 국민에게 손을 벌리는 셈이다. 급격한 생산위축으로 무색해지는 측면도 있지만 사용자 단체는 노동시간 제한을 무너뜨리려 한다. 사용자는 경기부양을 위해 정부가 돈을 뿌리는 상황에서 경기부양에 역행한다는 비판에도 임금삭감과 동결부터 한다. 늘 그랬듯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제도 도입을 요구한다. '국가의 시간'이 '기업의 시간'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에서 경험했다. 

​현장의 노동시민들은 사용자가 코로나19를 활용하여 압박해 올 것을 우려한다. 이미 겪는 곳도 꽤 늘고 있다. 임금인상 유예, 임금과 복지동결, 임금 삭감, 무급순환휴직, 부분 구조조정, 전면 구조조정으로 일부 사업이나 산업을 버리는 등 여러 수준이 있다. 가장 확실한 안전망으로 역할하는 노조가 없으면 속절없이 밀린다. 

산업과 기업에 따라 상황은 약간 다르다. 직격탄을 일찍 맞은 항공업계는 이미 권고사직 등 구조조정을 했다. 물리적 거리두기는 경제 침체를 가져올 수밖에 없지만, 사재기를 없애는 한 요인이 되었다는 한국의 배달산업은 거리 두기의 빈 거리를 채우기 위한 과로노동이 된다. 온라인 쇼핑은 25%가 늘었다고 한다.

몸은 멀리, 마음은 가까이 두어야 하는 관계방식의 변화는 비대면 화상회의나 온라인 강의를 폭증시키고 관련 산업을 자극한다. 라면 수출이 늘었다고 한다. 재난 상황에서 간편하게 끼니를 때울 수 있는 라면은 국경을 넘어 재난 필수품이 되고 있다. 대부분의 중소영세 사업장이나 자영업자의 어려움은 곳곳에서 나온다. 제조업의 어떤 외국계 사업장은 미국 본사에서부터 일방적 임금동결조치를 내렸다. 

지나간 위기에서 배우자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자 재벌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이 지탄받았다. 하지만 '재벌책임론'은 점차 '경제살리기 - 기업살리기 - 기업하기 좋은나라'로 바뀌었다. 사회를 지배하는 프레임이 바뀌었다. 헤게모니(주도권)가 변한 것이다. 결국 노동하기 좋지 못한 나라, 사회 양극화를 통해 '헬조선'으로 이르는 문이 열렸다.

2008년, 금융위기에 대응 프레임을 고민한 조합원과 간부들 제안으로 노조가 "함께살자"를 내세웠다. 그러나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겠다고 등장한 이명박 정부는 "비즈니스 프랜들리(친기업)"를 앞세웠다. 기업을 사용자 사유물로 보는 그들의 구조조정은 노동시민 공격이었다. "너 죽고 나 살자"를 부추겼다. 

대통령이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압박했던 2009년, 쌍용차 노동자들은 "해고는 살인이다"며 저항했다. 불안정 노동을 하는 노동시민에게 해고는 일상이었지만, 이 구호는 대기업 정규직의 해고 공포를 한껏 드러낸 프레임이었다. 공포는 극한 전투로 나타났고 국가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한 진압은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을 남겨 노동시민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코로나19를 극복하는 과정과 그 이후는 '사회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빅 브라더로 군림하려는 국가권력에 종속되지 않고, 일부만의 욕심만 채우는 시장권력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노동시민을 비롯한 다양한 시민들이 연대하며 주도성을 발휘해 균형을 잡아야 한다. 나는 이것이 '사회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양극화에 저항해온 시민은 복지를 늘리는 원동력이었다. 기본소득이나 재난극복수당을 익숙한 것으로 만들어냈다. 우리 시민들은 세월호 아픔을 공감하고 안전을 핵심 이슈로 만들었다. 그 노력이 국가권력에 지금의 재난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도록 발빠르게 움직이게 한 바탕이다. 국정농단으로 제 맘대로 움직이던 대통령에 탄핵촛불을 든 시민이 권력의 한계와 임무를 가르쳤다.

​민영화에 맞서 공공성을 외쳐온 노조와 시민들이 의료체계 붕괴를 막는 에너지였다. 코로나19로 동료 시민에 대한 연대의식을 발휘하는 높은 시민정신은 지구적 재난 상황에서 한국의 모습을 빚어내는 강력한 저력이다. 지금은 단지 '정부의 시간'이 아니다. 미래도 그렇다.

재난극복 미래협약을 만들자

재난을 이용해 돈벌이를 하려는 이익종자, 재난을 이용해 권력을 차지하려는 권력종자도 있다. 노사관계에서 공포와 불안을 부추겨 노조를 공격하려는 사용자, 불안을  부추겨 '위기를 혁명으로' 만들고 싶은 급진파도 있다.

이익을 추구하는 부자와 자본가, 사회를 바꾸고 싶은 급진파에게 양심이나 공감을 기대하지 않는다. 공감이 무너지고 뒤틀릴 때는 반동이냐 혁명이냐를 과감하게 선택할 수도 있다. 다만 지금 현재 이것이 재난을 대하는 공동체의 태도로 적정할까.

노조가 적극적으로 재난극복 프로그램을 만들자. 사용자의 조치를 수위별로 예상하고 대응 시나리오를 짜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노동조합 운동차원에서 수동적 대응을 넘어설 선제적 프레임을 만들 필요가 있다. 사회의 시간을 위한 노조 역할이 여기에 있다.

단순한 경제살리기가 아니라 코로나19가 경고하는 지구 생태계와 선순환하는 경제로 바뀌어야 한다. 기업살리기는 단지 고용을 핑계로 세운 물질적 성장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이 누릴 권리를 위한 문화적 성숙이어야 한다. 

총선 앞에서 표를 모으는 정치가 요란하다. 그건 그것대로 중요하지만 코로나19가 노조에 요구하는 절박한 정치는 재난극복과 코로나 이후의 프레임을 짜는 지혜를 모으는 것이 아닐까. 

과거 경제위기 때 등장했던 '고통분담' 같은 구리고 네거티브한 프레임이 아니라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공유'와 같은 긍정적 프레임, 관성적 단체교섭을 넘어 "재난극복과 미래를 위한 협약"을 고민하고 선제적으로 제안하면 어떨까. 노동현장에서 사회로 확산되는 새 흐름을 보고 싶다. 이것이 코로나 이후를 위한 사회적 플랫폼의 출발이 아닐까.

태그:#코로나19이후, #재난극복미래협약, #코로나이후사회, #코로나이후플랫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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