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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를 시작한 지 1년 즈음 지났을 때였다. 별생각 없이 오랜만에 기타나 쳐볼 요량으로 방구석에서 어쿠스틱 기타를 치려고 했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기타의 몸통이 도톰하게 부풀어올라 있는 게 아닌가. 딱 봐도 딱딱한 기타가 뚱뚱해진다고? 내 뱃살도 아닌데?

그때 알았다. 피부에도 관리가 필요하듯 기타에도 관리가 필요하다는 걸. 너무 건조하면 나무가 지나치게 수축하고 너무 축축하면 나무가 한껏 부풀어 오른다. 50% 내외의 습도를 매 순간 적절히 유지해주는 게 기타 관리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기타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습도 관리에 요란을 떨곤 한다. 건조한 계절엔 가습기는 기본이고 각종 온습도계 관련 용품들도 종종 사용된다. 여름철에는 소프트 케이스나 하드 케이스 안에 기타와 함께 실리카겔이나 제습제를 잔뜩 넣어서 지나친 습기를 방지하기도 한다.

심지어 추운 겨울에는 기타를 현관에 두고 천천히 집 안으로 들이는 친구도 있었다. 외부에서 차가워진 기타가 따뜻한 집 안으로 갑자기 들어오게 되면 급격한 온습도 변화로 기타가 변형될 수 있기 때문이다. 피부 관리는 못해도 기타 관리에는 열과 성을 다하는 게 기타 애호가들의 숙명 아닐까.  
 
피부에도 관리가 필요하듯 기타에도 관리가 필요하다
 피부에도 관리가 필요하듯 기타에도 관리가 필요하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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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여름, 나는 부풀어 오른 기타를 되살리기 위해 습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빠듯한 대학생 시절이었기에 솔루션은 저렴할 수밖에 없었다. 김을 먹고 남은 실리카겔들을 하나둘씩 모으기 시작했고 에어컨이 없는 내 방 안을 건조하게 만들고자 물먹는 하마를 여기저기 비치해두었다. 사방에 촛불을 켜고 어두운 방 안에서 기도하는 사람처럼, 나는 제습제를 곳곳에 비치해두고 기타가 돌아오길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당시에 기타만큼이나 나에게 돌아와 주었으면 했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헤어진 지 6개월 정도 지난 예전 여자 친구였다. 먼저 나에게 이별 통보를 한 건 그녀였지만 어쩐지 나는 포기가 안 됐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다시 연락을 했고 긴 침묵 끝에 그녀는 홍대 앞 어느 카페에서 만나자는 답장을 문자로 보냈다.

카페에서 만난 그녀는 내가 시킨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뜨겁게 느껴질 만큼 차가웠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고 말했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눈 앞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할 말이 없었다. 지금 마시는 게 커피인지 코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뒤로 어떻게 카페를 나와서 집으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았을 때, 나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홀로 기타를 들고 앉아 있었다. 대체 궁상맞게 왜 기타를 손에 쥐었던 걸까. 답답한 가슴을 치는 대신 기타를 치자고 생각했던 걸까. 기타를 몇 번 치다 보니 후드득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징징거리는 기타와 징징거리며 눈물을 흘리는 나. '흑흑'거리며 시작된 작은 울음은 '허윽허윽' 큰 울음으로 바뀌었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흐아아아' 대성통곡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 보니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흐어어어.. 근데.. 흐으아아 아 내 기타.. 허윽허윽 젖으면.. 흑흑 안 되는데.."

눈물을 흘릴 때에도 근손실을 걱정하는 헬스 마니아들의 심정이란 이런 게 아니었을까. 안구에 습기가 가득 찰 수는 있어도 기타에 습기가 차서는 안 될 일이었다. 펑펑 우는 와중에도 눈물 젖은 기타가 걱정되었다. 나는 울음을 멈추고 기타에 흘린 눈물을 황급히 닦아낸 뒤에 제습제가 가득한 내 방 안으로 기타를 가져갔다. 처음 모습처럼 되돌아오기를 바랄 수 있는 건 이제 기타밖에 없었으니까.
 
기타에게도, 사람에게도 적절한 습도가 필요하다
 기타에게도, 사람에게도 적절한 습도가 필요하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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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계절이 바뀌면서 기타는 다행히도 원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별의 기억도 어느덧 조금씩 희미해졌다. 처음엔 내게 모질게 말하던 그 친구가 밉기도 했지만, 덕분에 남은 미련을 털어내고 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지내게 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친구가 가끔은 고맙기도 했다.

기타처럼 사람에게도 적절한 습도가 필요하다. 50% 내외의 습도는 기타뿐만 아니라 우리가 생활하는 데에도 중요하니까. 다만 기타와는 다르게 사람에게는 습기가 넘쳐나는 시간이, 눈물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 때때로 찾아온다는 것. 그리고 울 수 있을 때 울어야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해질 수 있다는 것. 그 사실을 요즘도 기타를 칠 때면 가끔씩 떠올린다.

나처럼 기타를 껴안고 꺼이꺼이 울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필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seung88)에도 함께 실립니다.


태그:#기타, #습도, #눈물, #실연,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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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라이터. 술 마시며 시 읽는 팟캐스트 <시시콜콜 시시알콜>을 진행하며 동명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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