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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소, 일본인들이여(ねえ、日本の人たちよ )
마쓰시로 대본영 조선인 희생자 추도 평화 기념비 유지 관리 위원회
국문 번역 : 김보예
1944년, 가을
마을 이장과 경관에게 잡혀 와 / 트럭에 짐짝처럼 실려 온 부산.
도야마에서는 화물열차로 / 여기는 마쓰시로.
닫힌 문엔 자물쇠가 채워지고 / 볼 일은 차 안 양동이에
一九四四年秋
村役人と警官に 引っ立てられ / トラックに詰め込まれて 釜山
富山からは 貨物列車で / ここ松代
外から錠が掛けられて / 用は 車内のバケツ

다음 해, 4월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 피난 벙커 완공.
펑! 펑, 퍼엉, 굉음이 울리자 / 돌덩이가 내 머리를 가르고 /작업반장의 허리를 두드리더니,
무수한 돌파편이 / 젊디 젊은 내 동료의 온몸에 박히네.
翌年 四月
避難豪まで あと一歩…
ダン!ダ、ダーンの轟音の途端 / 岩は 私の頭を割り / 親方の 腰を砕き
無数の小石は / 若い仲間の体中を突き刺した

도쿄대공습과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 /대본영 공사에 대한 소문
빨리! 빨리! 강행되는 공사 / 주위 소각장은 어디에서나 연기가
東京大空襲 米軍沖縄上陸 / 大本営工事の噂
パルリ!パルリ!の突貫工事で / 近くの焼き場は どこも満杯

내 동료들은 사이가와강 변두리 덤불 숲속
임시 소각장에서 하루를 꼬박 지새워 / 재가 되었지.
私らは犀川べりの やぶの中
仮説炉で 一日かかって / 炭と化した

광복 후, / 한 동료의 품에 떠안겨 / 그리운 고향에 / 돌아왔건만,
光復(クァンポク)後 / 仲間の一人に 抱えられ / 懐かしいの故郷に / 私は帰れたが

초라하게 변해 버린 내 모습에 / 아내는 정신을 잃고, /사람답게 생활하기까지 1년이나 걸렸소.
変わり果てた 私の形に / 妻は倒れ / 一年間 人間に戻らなかった

다정하게 대해주는 / 이들도 있었지만,
나와 동료들의 운명은/ 왜 이렇게 된 건가.
왜인가? 생각해 봐주시게. / 여보소. 일본인들이여.
親しくてくれた / 人達もいたけれど
私らの運命は / なぜ、こうなったの
なぜさ? 考えておくれ / ねえ 日本の人たちよ

'마쓰시로 대본영 조선인 희생자 추도 평화 기념비 유지 관리 위원회'에서 추도비 건립 10주년을 맞이하여 간행한 팸플릿에 실린 시다. 시의 첫 연에 적힌 '여기는 마쓰시로'의 마쓰시로는 어디인가?

지난 편에서는 '마쓰시로 대본영 지하호'의 현재와 일본시민단체에 관해 이야기했다면, 이번 편에서는 '미쓰시로 대본영'에 얽힌 역사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관련 기사] 태평양 전쟁 말 일왕의 지하 벙커, 그리고 강제 노역의 흔적

비극의 서막

태평양 전쟁(1941~1945) 막바지에 이르러 패전이 짙어질 무렵, 미국은 일본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도쿄와 그 주변 도시에 소이탄을 대량 투하한다. 이 사건은 '도쿄 대공습'이라 불린다. 일본 정부는 도쿄 대공습을 '본토 결전'이라 칭하며, 미국과의 전쟁을 준비한다.

[관련 기사] 오사카 여행에서 꼭 들러야 할 '지하 벙커'_ http://omn.kr/1i193

1944년 7월 중순, 도죠 히데키 내각은 국체 보유(일왕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 체제 유지)를 위해 대본영과 중추 기관(황거, 관청, NHK 라디오 등)이 이전할 방공호 건설을 계획한다. 대본영이란 청일전쟁 때 처음 설치된 기관으로 일왕의 직속 군대 최고 통수 기관, 즉 참모본부를 뜻한다.

방공호 건설과 대본영 이전은 1944년 초부터 언급되기 시작했다. 맨 처음 방공호 건설을 제안한 이는 육군 군사과의 이다 마사타카 소령이었다. 1944년 초 그가 육군차관에서 제의한 내용이 시발점이 되었다. 육군은 1944년 5월 초에 이미 나가노에 이전하기 알맞은 자리를 물색하고 있었다. 나가노가 대본영의 이전지로 결정된 것은 크게 5가지 때문이었다.
 
1. 신슈(信州, 나가노의 옛 이름)는 신들의 마을이라는 뜻의 신슈(神州)와 발음이 같다.
2. 10톤 폭탄도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암반이 굳건하다.
3. 방공호 근처에 비행장도 건설할 수 있다.
4. 평지가 많고 공사하기가 쉽다. 때문에, 노동자의 거주지와 자재 창고를 확보할 수 있다.
5. 민가가 드물어 기밀 보유가 쉽다.
 
7월에 도죠 내각이 방공호 건설을 승인했고 9월에는 육군 장관이 착공 명령을 내렸다. 10월부터는 조선인 노동자 숙소가 세워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11월 11일 11시! 방공호 굴착을 위한 첫 다이나마이트가 터진다.
 
 마쓰시로 대본영 지하호(죠잔 지하호)의 입구
 마쓰시로 대본영 지하호(죠잔 지하호)의 입구
ⓒ 김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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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가을

대본영 방공호 건설에 동원된 조선인들은 어떻게 마쓰시로까지 연행된 것일까? 크게 5가지 경우로 나뉜다.

하나, 1994년 11월. 압록강 근처 공장 현장에서 연행된 사람들이다.
공사 총책임자 가토의 증언에 의하면, 압록강 부근에서 도박(화투)하던 이들을 끌고 왔다고 한다. 그 수는 무려 2000명에 이르렀다.

둘, 1945년 2월. 한국에서 연행된 사람들이다.
제 1연에서 노래하고 있는 내용이 이 케이스에 해당한다. 경상남도 창녕군에서 연행된 박도삼은 징용 영장을 가지고 온 마을 이장에 의해 집에 있다가 연행되었다. 연행된 사람 중에서는 밭에서 일하다가 잡혀 온 사람, 길 가다가 잡혀 온 사람 등 다양했다.

김창기, 강영한도 박도삼과 같은 케이스로 끌려온 징용자였다. 그들 증언에 의하면, 트럭에 짐짝처럼 실려서 부산까지 온 뒤 도야마(일본)에서부터는 열차 화물칸에 실려 왔다고 한다. 열차 안에는 20와트 전구가 하나 있었고, 열차 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긴 채 살벌한 감시 속에서 실려 왔다고 한다.

볼일(대소변)은 구석에 놓인 양동이에 했는데, 그 냄새가 심해 배급된 주먹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혹독한 추위에도 덮을 이불 한 장 없이 열차에 실려 와 처음 내린 곳이 마쓰시로였다.

셋, 1945년 2월, 도쿄의 시오도메 역을 경유해 온 화물 열차에 연행된 사람들이다.
연행 집행에 동행한 나가노시의 전직 첩보관에 의하면, 발에 쇠사슬이 채워진 채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조선인들이 연행되었다고 한다.

넷, 1945년 2월, 아이치현에서 연행된 사람들이다.
과거 아이치현 징용과에서 근무하던 테라오 세이지에 의하면, 아이치현 고마키시의 일본군 공사 현장에서 조선인 300명을 트럭에 실어 데리고 왔다고 한다. 당시 도주를 시도한 이가 두 명 있었는데, 일본 헌병에게 사살되었다고 했다.

다섯, 1945년 4월, 시코쿠에서 연행된 사람들이다.
이들의 연행 경로는 불분명하다. 일각에서는 그들이 연행된 곳이 시코쿠가 아닌 나가노현 기소군일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이렇게 강제 연행된 조선인 노동자의 숙소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삼각 병사의 모양으로 높이는 사람이 키보다 낮았다. 연합군에 들키면 안 되었기에 숙소는 낮고 좁았다. 그리고 숙소 지붕은 흙이나 나뭇가지로 위장했다. 허술한 숙소는 비나 눈이 내리면 방수가 되지 않았고, 천장에서 물이 새 이불은 다 젖었다. 그 때문에 손과 발은 늘 동상에 걸려 있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의 숙소(외부)
 조선인 노동자들의 숙소(외부)
ⓒ 김보예
  
 조선인 노동자들의 숙소(평면도)
 조선인 노동자들의 숙소(평면도)
ⓒ 김보예
   
 조선인 노동자들의 숙소(내부)
 조선인 노동자들의 숙소(내부)
ⓒ 김보예
   
(나가노 여행 속 역사의 발자취③에서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광양시민신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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