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비저블 맨> 포스터

영화 <인비저블 맨> 포스터 ⓒ 유니버설 픽처스

 
멋진 저택에서 남편인 '애드리안(올리버 잭슨 코헨)'과 함께 사는 '세실리아(엘리자베스 모스)'. 자신을 통제하려는 애드리안에게 질려버린 그녀는 어느 날 밤 그의 집에서 탈출한다. 밖에 나온 후에도 두려움에 떨던 그녀는 애드리안이 자살했고, 자신에게 거액의 유산을 남겼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야 마음을 놓는다. 하지만 그 이후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존재를 느끼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을 하나씩 잃으면서 공포에 빠져든다.  

"그 누구도 날 볼 수 없고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는 가정은 개인에게 주어진 금기와 규범을 피해 자유라는 이름으로 방종을 누릴 수 있다는 결론으로 손쉽게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인지 많은 이야기들은 투명 인간이 되는 개인이 그동안 지켜오던 도덕을 파괴하면서 느끼는 욕망으로 인한 내면적 갈등, 그리고 해방의 광기에 집중한다. <반지의 제왕>의 골룸이 그랬고, 플라톤의 <공화국> 속 기게스가 그러하며,
<할로우 맨>의 세바스찬 케인이 그렇다. 그러나 공포 영화의 명가 블룸하우스 프로덕션에서 제작한 새로운 투명인간, <인비저블 맨>은 다르다. 

<인비저블 맨>은 투명인간이라는 단어를 두 가지 의미로 풀어낸다. 하나는 물리적으로 투명해지는 인간으로 이는 투명인간이라고 하면 단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인 관계망 안에서 사라진다는 뜻의 보이지 않는 인간이다. 영화에서 애드리안은 전자다. 광학렌즈 발명가인 그는 전신에 카메라가 달린 슈트를 개발해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데 성공한다. 반면에 세실리아는 후자다. 그녀는 모습을 감춘 애드리안으로 인해 자신의 가족, 친구 등 인간관계가 하나씩 끊기는 과정을 생생히 목격한다. 
 
 영화 <인비저블 맨> 스틸 컷

영화 <인비저블 맨> 스틸 컷 ⓒ 유니버설 픽처스

 
흥미롭게도 이 영화는 애드리안보다 그의 피해자인 세실리아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 주력한다. 그리고 이 선택은 공포 영화라는 장르의 특성을 새롭게 구현하는 한 수다. 본래 고전적인 의미의 투명인간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자신을 해칠 수 있다는, 가상의 외부로부터 비롯되는 공포를 조성한다. 그러나 SNS의 등장 후 그 어느 때보다 교류가 빈번하고 사람 간의 관계가 밀접해진 상황에서 사회적으로 고립된다는 것은 그와 또 다른 결의 공포, 현실에서 개인이 느낄 수 있는 내적 공포감을 끌어올린다. 실제로 애드리안의 계획이 절정에 달하는 식당에서의 시퀀스는 가장 놀랍고 경악스러운 순간으로,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투명인간의 공포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이 작품은 효과적인 방식으로 본래 의미의 투명인간도 묘사하고 있다. 특히 카메라의 움직임이 인상적인데, 작중 카메라는 공간을 최대한 넓게 활용하려고 한다. 의도적으로 세실리아의 뒷공간, 혹은 그녀가 의식하지 못하는 공간을 주로 살피다 보니 보이지 않는다는 투명인간의 특성상 그 빈 공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싹함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중간중간 삽입되는 세실리아를 훔쳐보는 각도에서의 컷,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cctv 화면 역시 팽팽한 긴장감을 배가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연출은 2시간의 러닝타임을 지탱할 충분한 동력이 되지는 못한다. 우선 카메라 구도와 화면 전환을 이용해 만들어내는 긴장감과 놀라움은 기본적으로 단발적인 서프라이즈일 뿐, 지속적인 서스펜스를 보여주기 어렵다. 이에 더해 영화 구조 상의 문제를 연출로 덮을 수도 없다. 영화는 중반부부터 투명인간의 존재를 전면에 드러내는 전개를 보여준다. 문제는 그전에 관객들이 세실리아와 함께 더 친숙하고, 더 그럴듯한 현대인들의 악몽을 접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존재할 수 없는 존재가 만드는 공포를 맛볼 때의 강도나 충격은 비교적 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인비저블 맨>은 투명인간의 진상을 밝히는 후반부보다 세실리아가 홀로 남게 되는 과정을 묘사한 초반부가 더 공포 영화답다. 

투명인간의 의미를 현대적 맥락 안에서 재해석한 <인비저블 맨>은 공포 영화 속 여성 캐릭터와 서사 역시 현재의 변화에 맞춰 새롭게 구축한다. 그간 공포 영화 속 여주인공에 대해서는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모든 사건의 시작을 담당하고, 비명만 지르다 죽는 인물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공포 영화 속 여성 캐릭터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세실리아는 과거의 여성 주인공과는 다르다.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을 때, 그녀는 커피가루, 핸드폰 등 각종 방법을 동원해서 투명인간을 스스로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경찰과 경비원들이 속수무책으로 다할 때도 세실리아는 투명인간의 목적을 가장 먼저 파악해서 그를 막으려고 한다. 

더 나아가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이 영화를 전형적인 남성의 가스라이팅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애드리안은 세실리아를 철저히 억압하고 통제하며, 그녀를 철저히 도구화하고 목적으로만 대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작중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 진짜 범인의 정체에 대한 의문은 애당초 중요하지 않은 대목이다. 범인(남성)의 정체가 모호하다는 것은 복수를 선택하는 세실리아(여성)의 선택에 당위성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전개이기 때문이다.
 
 영화 <인비저블 맨> 스틸 컷

영화 <인비저블 맨> 스틸 컷 ⓒ 유니버설 픽처스

 
<인비저블 맨>은 본래 유니버설 픽처스에서 추진하는 시네마틱 유니버스인 '다크 유니버스'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톰 크루즈 주연의 <미이라>가 기대 이하의 결과를 받은 후 계획이 바뀌어 블룸하우스에서 700만 달러의 저예산 공포영화로 제작되었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다.

<인비저블 맨>은 <미이라>처럼 무리하게 세계관을 만드는 대신 투명인간이라는 소재 자체에 집중한 결과 투명인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원작에 대한 존중도 충분히 표하고 있다. 이 영화는 1933년에 개봉한 고전 공포영화 <투명인간>의 리메이크 작품인데, 공포 영화로서도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며 그 정체성을 유지한다. 붕대를 두르거나 모자와 코트를 입은 투명인간의 대표적인 이미지를 지나가듯 보여주면서 원작을 깨알같이 오마주 하는 것은 덤이다. 

또한 이 작품의 연출과 각본을 맡은 리 워넬 감독이 <프랑켄슈타인> 리메이크 영화에 각본과 연출로 참여하는 만큼, 다크 유니버스 프로젝트가 본 궤도에 오를 경우 <인비저블 맨>은 훌륭한 첫걸음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인비저블 맨>은 새로운 해석이 만들어낸, 여러모로 훌륭한 공포 영화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원종빈 시민기자의 개인 브런치에 게재된 글입니다
영화리뷰 인비저블 맨 블룸하우스 투명인간 공포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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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읽는 하루, KinoDAY의 공간입니다. 서울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정치경제철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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