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성북동 문화탐방에 이어 서촌문화탐방기를 게재한다. 상허 이태준이 잡지 <문장>에서 언급했던 '골동'이란 말의 멋과 맛을 알게 됐다. 근원 김용준의 '상고주의'와 상통하는 언어다. 미래 후손들을 위해 프랑스처럼 고전과 전통(관광산업)을 지켜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수화 김환기가 전통을 토대(프랑스 시절까지)로 해서 뉴욕화단에서 '점묘화'라는 새로운 추상표현주의의 미술품을 창조해낸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기자말]
사실 윤동주가 서촌 누상동 9번지 소설가 김송의 집에 정병욱과 함께 하숙한 것은 불과 5개월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윤동주가 서촌에 살았던 전후 시기는 한국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간이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1941. 5), <또 다른 고향>(1941. 9), <별 헤는 밤>(1941. 11) 등을 창작해서 원고지에 옮겨놓은 것이다.
▲ 윤동주의 누상동 하숙집  사실 윤동주가 서촌 누상동 9번지 소설가 김송의 집에 정병욱과 함께 하숙한 것은 불과 5개월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윤동주가 서촌에 살았던 전후 시기는 한국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간이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1941. 5), <또 다른 고향>(1941. 9), <별 헤는 밤>(1941. 11) 등을 창작해서 원고지에 옮겨놓은 것이다.
ⓒ 박태상

관련사진보기


서촌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민족시인 윤동주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윤동주 시인을 알고 있다.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그의 시를 접했기 때문이다. 또 자라나는 청소년세대도 윤동주를 잘 안다.

이준익 감독의 흑백영화 <동주>가 절찬리에 상영되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덕분이다. 흑백영화인데도 약 118만 명이 관람했다. 흑백 예술영화가 100만 명을 넘긴 것은 대단한 성과다. 그만큼 시인 윤동주의 인기를 말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너무 송몽규에게 치중하는 흐름을 보여 상대적으로 시인으로서의 윤동주의 역할이 약화되어 있어 실망스럽다.
 
서촌에서 인왕산 쪽으로 한참을 걸어 올라가면 윤동주 언덕이 자리하고 있다. 윤동주문학관 바로 옆의 돌계단을 오르면 공원이 나타나고 그곳에 서서 남산을 바라보면 탁 트인 시야에 광화문을 비롯해서 세종대로와 서촌이 한눈에 들어온다. 언덕진 공원 한복판에 윤동주의 <서시> 시비가 세워져 있다.
▲ ‘서시’ 시비 서촌에서 인왕산 쪽으로 한참을 걸어 올라가면 윤동주 언덕이 자리하고 있다. 윤동주문학관 바로 옆의 돌계단을 오르면 공원이 나타나고 그곳에 서서 남산을 바라보면 탁 트인 시야에 광화문을 비롯해서 세종대로와 서촌이 한눈에 들어온다. 언덕진 공원 한복판에 윤동주의 <서시> 시비가 세워져 있다.
ⓒ 박태상

관련사진보기

 
윤동주의 시 세계는 1940년대 암흑기에 함께 활동했던 이육사의 그것과 크게 비교된다. 이육사가 남성적인 분노를 내세우며 강인한 지사적인 풍모를 보여주었다면, 윤동주는 내적 성찰과 기독교적인 속죄의식을 앞세워 부끄러움의 미학을 펼쳤다. 특히 윤동주는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고뇌와 자화상의 내적 고백을 표출해서 감성적인 호소력을 뿜어내었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북간도의 용정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용정 은진중학, 평양의 숭실중학(신사참배 강요로 중퇴함), 용정의 광명학원 중학부, 서울 연희전문 문과와 일본 릿교대학 영문과, 도사샤대학 영문과(정지용 시인을 존경해서 옮겨감, 기독교대학)에서 수학했다.

윤동주는 간도 연길에서 발행하던 <카톨릭소년>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를 윤동주(尹童柱)란 이름으로 발표하면서 시작 활동을 펼친다. 이 무렵 윤동주는 <정지용시집>을 정독하고, 신문에서 이상의 작품을 스크랩해서 읽었다고 한다. 또 백석시집 <사슴>을 필사하고, <김영랑시집>을 정독했다.
 
오른 쪽 사진에는 1955년 재판의 표지가 실려있다. 이 표지는 수화 김환기가 그린 것이다. 해방 후 친우 정병욱교수가 지니고 있던 유고 31편을 모으고 정지용 시인이 서문을 써서 정음사에서 초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가 간행되었다. 1955년 윤동주 10주기를 기념하여 89편의 시와 4편의 산문을 엮어 정음사에서 다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펴냈다. 1976년에 그동안 게재 유보하였던 23편을 수록하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3판이 발행되었다. 필자는 이 소중한 3판을 개인 소장하고 있다.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3판(1976)에 실린 ‘서시’  오른 쪽 사진에는 1955년 재판의 표지가 실려있다. 이 표지는 수화 김환기가 그린 것이다. 해방 후 친우 정병욱교수가 지니고 있던 유고 31편을 모으고 정지용 시인이 서문을 써서 정음사에서 초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가 간행되었다. 1955년 윤동주 10주기를 기념하여 89편의 시와 4편의 산문을 엮어 정음사에서 다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펴냈다. 1976년에 그동안 게재 유보하였던 23편을 수록하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3판이 발행되었다. 필자는 이 소중한 3판을 개인 소장하고 있다.
ⓒ 박태상

관련사진보기


1938년 그의 나이 22세 때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해서 최현배 교수로부터 조선어를, 이양하 교수로부터 영시를 배우게 되며, 해방 후 그의 시집을 잘 간수해서 유고시집을 출간했던 친구 정병욱(전 서울대교수)을 만나게 된다.

그는 1942년(26세)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과 선과에 합격하여 도일하게 된다. 고종 송몽규도 경도제대에 입학해서 근처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다음 해 여름방학 중인 7월에 독립운동 혐의로 송몽규가 체포되자, 귀향하려고 차표도 사놓고 짐도 부쳐놓았던 윤동주도 시모가모(下鴨) 경찰서에 같은 혐의로 체포된다.

1944년 3월 경도 지방재판소 판결 결과, 송몽규와 윤동주 모두 1941년 개정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독립운동) 죄로 징역 2년을 언도 받는다. 두 사람은 후쿠오까 형무소에 투옥되었고, 결국 해방을 6개월여 남기고 일제의 생체실험 주사를 맞고 1945년 2월 윤동주가 먼저 사망하였다. 필자의 연세대 대학원 동문인 후쿠오카 현립대 니시오카 겐지 명예교수(전 세종대 일문과 교수)는 일본의 지식인을 모아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을 만들어 여러 곳에 윤동주 시비를 건립하고 있다.

윤동주 50주기를 맞이해서는 일본 지식인들이 모금하여 도시샤대학 교정에 아이러니하게도 윤동주 시비를 1995년에 건립했다. 그 옆에 윤동주가 그렇게도 흠모했던 정지용의 '압천' 시비(필자는 '지용회 홍보이사'로 건립에 참여함)가 2005년 건립되었다. 한일관계가 좋았을 때 일 년에 10만여 명이 두 곳 시비를 참배했다.

사실 윤동주가 서촌 누상동 9번지 소설가 김송의 집에 정병욱과 함께 하숙한 것은 불과 5개월밖에 되지 않는다. 연희전문 재학 중인 1941년 5월, 기숙사를 나와서 이 하숙집에 들어갔으나, 별로 친분이 없었던 김송이 일제의 요시찰인물이라 감시가 심해지자, 북아현동으로 하숙집을 옮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동주가 서촌에 살았던 전후 시기는 한국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간이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1941. 5), '또 다른 고향'(1941. 9), '별 헤는 밤'(1941. 11) 등을 창작해서 원고지에 옮겨놓은 것이다.
 
서촌에서 부암동 쪽으로 걸어 올라가면 윤동주 언덕과 윤동주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내부에는 볼만한 자료가 거의 없는 것이 아쉽다.
▲ 윤동주문학관 서촌에서 부암동 쪽으로 걸어 올라가면 윤동주 언덕과 윤동주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내부에는 볼만한 자료가 거의 없는 것이 아쉽다.
ⓒ 박태상

관련사진보기

계절(季節)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오.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오.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하나에 추억(追憶)과
별하나에 사랑과
별하나에 쓸쓸함과
별하나에 동경(憧憬)과
별하나에 시(詩)와
별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
 
서촌에서 인왕산 쪽으로 걸어 올라가면 윤동주 언덕과 윤동주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윤동주문학관 바로 옆의 돌계단을 오르면 공원이 나타나고 그곳에 서서 남산을 바라보면 탁 트인 시야에 광화문을 비롯해서 세종대로와 서촌이 한눈에 들어온다. 언덕진 공원 한복판에 윤동주의 '서시' 시비가 세워져 있다.

문제는 윤동주 문학관에 가치있는 자료가 거의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진 촬영을 금하고 있다는 점이다. 값비싼 세계적인 명품이 자리잡고 있는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은 미술관이 소장하는 귀중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등 모든 서양화 작품의 사진 촬영을 허용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대표주자로서 미국의 '개방성'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심지어 러시아의 아르미타쥬 미술관도 개방적이다. 이에 비해 한국미술관의 폐쇄성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많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가 나온다. 그곳을 지나쳐서 필운대로를 따라 곧게 올라가 우리은행 골목으로 들어가면, 박노수 화백(1927~2013)의 미술관이 나온다. 서울대학교 미대 교수를 지낸 박노수 화백은 유명한 월북 화가 근원 김용준의 제자이자 청전 이상범의 문하생이기도 하다. 한국화가 박노수 화백은 죽기 직전, 자신의 작품과 40여 년간 살았던 유서 깊은 단독주택을 종로구청에 기증하여 구립 미술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일제 감점기 친일파 윤덕영이 딸을 위해 건축한 집으로 보화각(지금의 간송미술관)을 설계한 박길룡이 지은 개인 가정주택이다. 중국 기술자들이 프랑스풍으로 지은 한옥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1973년 박노수화백이 구입하여 40여 년 거주하며 <고사>, <월하취적>, <달과 소년> 등 수많은 대표작들을 창작한 공간이다.
▲ 박노수화백의 저택을 보수해서 만든 ‘구립 박노수미술관’ 일제 감점기 친일파 윤덕영이 딸을 위해 건축한 집으로 보화각(지금의 간송미술관)을 설계한 박길룡이 지은 개인 가정주택이다. 중국 기술자들이 프랑스풍으로 지은 한옥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1973년 박노수화백이 구입하여 40여 년 거주하며 <고사>, <월하취적>, <달과 소년> 등 수많은 대표작들을 창작한 공간이다.
ⓒ 박태상

관련사진보기

 
원래 박노수가옥은 일제 감점기 친일파 윤덕영이 딸을 위해 건축한 집으로 보화각(지금의 간송미술관)을 설계한 박길룡이 지은 개인 가정주택이다. 중국 기술자들이 프랑스풍으로 지은 한옥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빨간 벽돌로 지은 1층 위에 서까래가 보이는 지붕을 얹은 2층 구조의 서양식 한옥 주택이다.

1973년 박노수 화백이 구입하여 40여 년 거주하며 '고사', '월하취적', '달과 소년' 등 수많은 대표작들을 창작한 공간이라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박화백은 죽기 2년 전인 2011년에 500여 점의 그림과 490여 점의 고미술과 고가구를 종로구청에 기증했다. 특히 각종 조각품과 수석으로 가득 찬 정원 아틀리에가 프랑스의 '로댕 미술관' 정원처럼 아름답다.
 
박노수화백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박화백은 죽기 2년 전인 2011년에 500여 점의 그림과 490여 점의 고미술과 고가구를 종로구청에 기증했다. 특히 각종 조각품과 수석으로 가득 찬 정원 아틀리에가 프랑스의 ‘로댕 미술관’ 정원처럼 아름답다.
▲ 박노수미술관의 정원  박노수화백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박화백은 죽기 2년 전인 2011년에 500여 점의 그림과 490여 점의 고미술과 고가구를 종로구청에 기증했다. 특히 각종 조각품과 수석으로 가득 찬 정원 아틀리에가 프랑스의 ‘로댕 미술관’ 정원처럼 아름답다.
ⓒ 박태상

관련사진보기

 
박노수 가옥에서 걸어 나와서 통인시장으로 접어들어 가로질러 나가면 수많은 공방들 사이 골목에 한국 근현대 미술의 대부 청전 이상범화백(1897~1972)이 수십 년간 살며 대표작인 수묵화 등 한국화를 창작했던 전통한옥 가옥이 나온다. 청전은 모순된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일제에 저항했던 동아일보 미술기자인 동시에 일제 말기에 친일을 했던 화가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손기정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의 주인공이 바로 청전 이상범 화백이다.
 
서촌의 전통적인 한옥구조로 되어 있다. 신발을 벗고 전통한옥집의 문을 열고 올라서면 대청마루가 시원스럽게 자리하고 있고 옛날 텔레비전과 큰 탁자, 그리고 청전 이상범 전시회의 포스터가 눈에 들어온다. 계속 중간문턱을 넘어서면 손님을 맞이했던 행랑채와 청전이 기거했던 방이 나오고 그 방을 넘어서면 ‘청전의 화실’이 나타난다.
▲ 청전 이상범 고택 서촌의 전통적인 한옥구조로 되어 있다. 신발을 벗고 전통한옥집의 문을 열고 올라서면 대청마루가 시원스럽게 자리하고 있고 옛날 텔레비전과 큰 탁자, 그리고 청전 이상범 전시회의 포스터가 눈에 들어온다. 계속 중간문턱을 넘어서면 손님을 맞이했던 행랑채와 청전이 기거했던 방이 나오고 그 방을 넘어서면 ‘청전의 화실’이 나타난다.
ⓒ 박태상

관련사진보기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거는 사진을 맨 처음 받은 동아일보는 손기정선수의 가슴에 붙어있는 일장기를 지워버린 채 보도를 했다. 그 당시 일장기를 삭제해버린 미술 담당 기자가 바로 청전 이상범 화백이다. 그 사건으로 이상범은 40일간 구속되었고 신문사에서도 해직된다.

당시 경찰서에서 고문을 심하게 받았던 상처 때문인지 일제강점기 말기에 그는 친일행각을 보여 해방 후 '민족의 죄인이' 된다. 아쉬운 점이다. 물론 당시 큰 활약을 했던 영남의 대표 인물화가 이당 김은호와 호남을 대표하는 산수화가 의재 허백련도 같은 길을 걸어 해방 후 빈축을 샀다.

이상범 가옥을 들어서면 친필 편액인 '누하동천'이란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신발을 벗고 전통한옥집의 문을 열고 올라서면 대청마루가 시원스럽게 자리하고 있고 옛날 텔레비전과 큰 탁자, 그리고 청전 이상범 전시회의 포스터가 눈에 들어온다. 계속 중간 문턱을 넘어서면 손님을 맞이했던 행랑채와 청전이 기거했던 방이 나오고 그 방을 넘어서면 창작공간인 '청전의 화실'이 나타난다.

화실에는 청전이 한국화를 그릴 때 사용했던 '지필묵연'이 놓여 있어 화가의 예술 향기를 느끼게 된다. 그 옆에는 작은 서가에 '연려실기술', '목민심서' 등 청전이 읽던 고전책 들이 꽂혀 있고, 옆의 유리 장식장에 백자풍의 다기류가 전시되어 있다.

문턱을 넘어서 다시 왔던 대청마루 쪽으로 걸어가면, 그 반대편으로 마루에서 왼쪽으로 들어서서 안방이 나온다. 작은 방, 청전의 아내가 기거하던 방에 고가구와 소담한 장롱이 놓여 있다. 청전은 1962년까지 홍대 미대 교수를 지내면서 후학을 양성했다.
 
손님을 맞이했던 행랑채와 청전이 기거했던 방을 지나면 ‘청전의 화실’이 나타난다. 화실에는 청전이 한국화를 그릴 때 사용했던 지필묵연이 놓여 있어 화가의 예술적 향기를 느끼게 된다. 그 옆에는 작은 서가에 <연려실기술>, <목민심서> 등 청전이 읽던 고전책 들이 꽂혀 있다. 청전의 화맥은 조선 후기의 장승업의 화풍을 이어받은 심전 안중식과 소정 조석진으로부터 사사 받으며 이어졌다. 그리고 청전의 화맥은 다시 박노수 화백에게로 이어졌다.
▲ 고택의 맨 안쪽에 자리잡은 화실 손님을 맞이했던 행랑채와 청전이 기거했던 방을 지나면 ‘청전의 화실’이 나타난다. 화실에는 청전이 한국화를 그릴 때 사용했던 지필묵연이 놓여 있어 화가의 예술적 향기를 느끼게 된다. 그 옆에는 작은 서가에 <연려실기술>, <목민심서> 등 청전이 읽던 고전책 들이 꽂혀 있다. 청전의 화맥은 조선 후기의 장승업의 화풍을 이어받은 심전 안중식과 소정 조석진으로부터 사사 받으며 이어졌다. 그리고 청전의 화맥은 다시 박노수 화백에게로 이어졌다.
ⓒ 박태상

관련사진보기

 
작년 2019년 봄에 경복궁 옆 현대갤러리 창립 50주년 기념 기획전으로 청전 이상범 화백과 소정 변관식 화백의 '한국화의 두 거장 – 청전과 소정'이 열려 80여 점이 선보였다. 청전의 대표작으로는 '강상어락도'(1959), '효천보희도'(1954년), '초동'(1926), '잔추'(1930), 수묵화 '주막' 등이 있다. 청전은 농담을 달리한 짧은 붓질을 수없이 반복하여 고담한 숲을 그리고, 전통 산수화 기법에 원근법적 요소를 수용해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독창적인 산수'를 탄생시켰다. 이러한 전통화법에 서양화법인 원근법을 접목시킨 화풍은 스승 안중식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미술사학자 안휘준(전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은 다음과 같이 한국화의 계보를 설명했다.

장승업의 화풍은 심전 안중식(1861~1919)과 소림 조석진(1853~1920)에게 계승되었고, 이들을 통하여 그들의 제자인 심산 노수현, 청전 이상범, 소정 변관식 등의 현대 화가들에게 이어졌다.

안중식의 '풍림정거도(楓林停車圖)'를 한가지 예로 보면 반복적이고 과장된 산의 모습, 스산한 느낌을 주는 담청의 애용, 문기(文氣)가 없는 분위기 등에서 장승업 화풍의 외형적 계승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안중식은 말년에 '백악춘효도(白岳春曉圖)'에서 보듯이 원근법 등 서구화법을 받아들여 전통화풍과 결합함으로써 어떤 돌파구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안휘준, <한국회화사 연구>, ㈜시공, 2000, 723 ~ 724쪽.)
 
청전 이상범 고택을 빠져나오면, 오른편에 ‘천경자 화백’이 살면서 독특하게 남국의 꽃이 많이 등장하는, 원시적 아프리카풍 서양화 <꽃을 든 여인>, <미인도> 등을 창작했던 한옥집터가 자리하고 있다. 한국의 고갱이라고나 할까. 천경자도 청전과 마찬가지로 홍익대 미대 교수를 지냈다.
▲ ‘청전 이상범 고택’ 앞 골목길 청전 이상범 고택을 빠져나오면, 오른편에 ‘천경자 화백’이 살면서 독특하게 남국의 꽃이 많이 등장하는, 원시적 아프리카풍 서양화 <꽃을 든 여인>, <미인도> 등을 창작했던 한옥집터가 자리하고 있다. 한국의 고갱이라고나 할까. 천경자도 청전과 마찬가지로 홍익대 미대 교수를 지냈다.
ⓒ 박태상

관련사진보기


청전 이상범 고택을 빠져나오면, 오른편에 천경자 화백이 살면서 독특하게 남국의 꽃이 많이 등장하는, 원시적 아프리카풍 서양화 '꽃을 든 여인', '미인도' 등을 창작했던 한옥집터가 자리하고 있다.

골목길을 걸어 나와서 어둑어둑한 서촌의 밤기운을 느끼면서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로 접어들었다. 중간쯤 위치한 곱창구이 집에서 '통마늘 곱창볶음' 안주에 맥주 한잔을 기울이면서 혹한에 고단했던 서촌 문화탐방을 마무리했다. 고전이나 전통은 쉽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골동처럼 녹이 슬 때까지 고통스러운 도전과 응전의 차세대 예술인들의 영혼이 은은하게 스며들어서야만 가능해진다는 것을 체득하게 되었다.

태그:#윤동주, #세종마을 음식거리, #'서촌' 문화탐방, #구립 박노수미술관, #청전 이상범 가옥
댓글8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4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