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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19가 발병했을 때 호주 사람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주 전체 인구의 절반이 전 세계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고, 그 이민자의 절반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인데, 아시아 이민자 가운데 중국 이민자가 가장 많다.

그중 내가 사는 빅토리아주(수도 멜버른이 속한 주)는 호주에서 중국 이민자가 가장 많은 곳으로 유명하니, 이곳에 살고 있는 현지인들에겐 중국의 상황이 '바다 건너 불구경' 하는 심정일 수는 없었다.

호주의 긴 여름방학(12월 중순부터 1월 말)과 음력설을 맞아 중국을 방문했던 수많은 중국인(호주 영주권자, 시민권자, 학생비자 등을 가진 사람들)이 서둘러 귀국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호주 연방 정부도 중국에 갇힌 중국계 호주인들을 비행기에 태워 오기도 했다.

[1월 29일] 아무도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지난 16일 마스크를 쓴 한 여성이 시드니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지난 16일 마스크를 쓴 한 여성이 시드니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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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개학 날이다. 마스크를 쓰고 등교하는 학생이나 학부모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나부터도 쓰지 않았다. 학기 시작을 앞두고 호주에서도 코로나19 확진자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교장은 1월 중순부터 학부모들에게 코로나19 관련 안내 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DET(The Department of Education and Training Victoria, 한국의 교육부)에서 코로나19에 관한 관련 지침과 주의사항 등을 학교에 보내면 교장은 바로 학부모들에게 전했다. 학교의 차분한 대응과 정부에서 전달하는 정보들을 신뢰했으며 덕분에 불안하지 않았다.

[2월 27일] 한국 이민자 커뮤니티가 들썩였다

"호주 전역에 바이러스가 확산되기 시작하면 당장 먹을 게 동날 거예요. 제발 물건 좀 사다 놓으세요."

한국에서 31번 확진자를 기점으로 코로나19 발병 사례가 늘어나자, 이제는 한국인 이민사회가 들썩였다. 2월 말부터 나를 아끼는 주변 지인들은 쌀과 기본 식자재를 쟁여 놓아야 한다고 했다.

한국에서 시시각각 들려오는 코로나19 관련 소식들이 넘쳐난다. 인터넷으로 연결된 지구촌 세상이니 한국의 가족이나 지인의 연락 또는 SNS를 통해 정보가 마구 쏟아진다. 지인 중에는 각종 한국인 커뮤니티에 코로나19 이야기가 넘쳐 오히려 불안이 가중되고 피로하다고 호소하는 사람도 있다.

호주는 2월에 접어들며 코로나19 확산 저지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중국발 외국인 여행객의 입국을 금지하는 '초강수'를 두는가 하면, 확진자가 늘고 있는 대구·청도에 대해서도 여행경보를 4단계 중 3단계까지 높였고, 한국 전역에 대한 경보는 2단계로 상향했다.

일각에서는 아시아인을 향한 인종차별 사건이 일어났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멜버른의 한 병원에서는 아시아계 의료진의 진료를 거부하는 일이 발생했고, 시드니의 한 사립학교에서는 코로나19 감염 가능성을 이유로 한국계 학생을 기숙사에서 퇴거(2주 자가격리)시켰다. 호주 인권위원회(AHRC)는 코로나19의 여파로 중국계 이민자를 향한 인종차별이 벌어지고 있다며 적극적 대처가 필요하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나는 마트에서 식료품을 잔뜩 사는 대신, 단골 카페에 가서 카푸치노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어떻게든 일상을 평온하게 지켜내고 싶다.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3월 4일] 지인에게 쌀 한 팩을 샀다
     
3월 1일(현지시각), 호주에서 첫 코로나19 사망자가 나왔다. 이틀 뒤 크리스천 포터 법무장관은 언론 인터뷰에서 '생물안보 통제 명령권' 확대 방침을 밝혔다고 한다. 원래 생물안보법(Biosecurity Act)은 보건에 위험이 되는 외국인 입국자를 격리할 때의 근거인데, 이를 코로나19 감염 확산에도 적용하겠다는 뜻이다. 그는 학교·백화점·기업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의 출입을 통제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언니, 쌀 구매 안 했죠?"

오전 8시 개장 시간에 맞춰 울워스(Woolworths, 호주의 대형마트 체인)에 쏜살같이 달려가 쌀 몇 팩(1팩 당 5kg 정도)을 사온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4년이 가까이 호주에 살면서 울리(울워스의 별칭)가 8시부터 문을 연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지인은 아무것도 쟁여놓지 않은 내게 쌀 한 팩을 팔았다. 호주의 코로나19 확진자가 서른 명을 넘어섰다.

[3월 17일] 마트 진열대가 텅 비었다
 
 2020년 3월 13일 호주 시드니의 한 슈퍼마켓에서 화장지 선반이 비어 있다.
 2020년 3월 13일 호주 시드니의 한 슈퍼마켓에서 화장지 선반이 비어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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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미국에서 코로나19가 급격히 확산되고 호주에서도 확진자 수가 100명을 넘어가자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한국에 이어 이탈리아 등을 입국 금지 국가에 추가했고, 전날부터 호주에 들어오는 모든 이들에게 14일간 자가격리를 시행하고 있다.

마트의 진열대는 하루가 다르게 텅텅 비어 가고 있다. 처음엔 화장지, 쌀, 파스타, 밀가루. 다음엔 키친타올, 캔에 든 저장 음식, 토마토 소스... 물건을 찾을 수 없는 품목이 자꾸 늘어난다. 마트 계산대에는 개인 당 구매할 수 있는 품목의 수량을 제한한다는 공지가 붙었고, 점원들은 고객의 구매 목록과 수량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점심시간, 참치가 떨어졌다. 참치 김밥 중독자인 아들을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은 참치 김밥 도시락을 싸는데... 큰일이다. 알디(호주 대형마트)에 갔다. 진열대가 휑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웠다. 마치 메뚜기 떼가 수확철의 논밭을 휩쓴 듯 보였다.

근처의 다른 대형마트인 콜스에 갔더니 다행히 30여 개의 참치 캔이 남아 있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평소 장을 보러 가면 참치 캔을 5개씩 사는데, 이번에는 3개만 집어 들었다. 나처럼 사재기가 아닌 일상적 구매를 하러 온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주고 싶었다.

참치 캔 3개, 당근, 아보카도를 들고 셀프 계산대에 갔더니 한 소비자가 보안요원과 언쟁 중이다. 카트 속 쇼핑백에 물건이 한가득인 걸 보니 정해진 물품 수량을 초과한 모양이다. 보안요원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강조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해줘."
 
 지난 19일 호주 슈퍼마켓 체인인 울워스 앞에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지난 19일 호주 슈퍼마켓 체인인 울워스 앞에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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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재기 열풍'이 가열되자 울워스는 사회적 약자인 노인과 장애인을 위한 쇼핑 시간을 별도로 신설했다. 오전 7시부터 8시.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문을 열고 기준에 해당하는 사람만 입장시킨다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코로나19 발병으로 한국뿐 아니라 각 나라의 취약계층(노인, 장애인 등)이 위험에 노출된 상황이라는 언론 보도를 접하며 마음 아파하던 차였다. 얼마든지 환영할 만한 조치다. 당장 도움이 절실한 사람에게 우선 기회를 주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어떻게든 견뎌볼 수 있다.

오후 늦게 엘레노어와 조이를 만났다. 아이가 다니는 멜버른 초등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이다. 내가 '이제는 정육점 코너마저 텅텅 비었다'라고 말하자, 평소에 유쾌하고 농담을 좋아하는 엘레노어는 재치를 섞어 답했다. "이제부터 우리 채식주의자가 되자." 안 그래도 요새 조금씩 육류를 줄여 나가려고 노력하고 있던 참이긴 했다.

[3월 19일] 다행히 쌀과 식용유를 샀지만...

호주의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500명을 넘었다. 정부는 전날 국민의 출국을 전면 금지했다. 20일 오후 9시(현지시각 기준)부터는 비거주자와 호주 시민이 아닌 자의 여행을 금지한단다. 현지 언론 보도에 의하면 모리슨 총리는 "국내 확진 사례의 압도적인 비율이 외부 유입(the overwhelming proportion of cases in Australia have been imported)"이라고 말했다.

보건당국은 음식과 약품을 필요 이상으로 사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데이비드 리틀프라우드 농무장관은 안전한 음식 공급체계를 갖추고 있어 식량 확보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없다고 강조하며 "숨을 깊게 들이쉬고(take a deep breath)" 침착하게 장을 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가 19일(현지시간) 캔버라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책을 발표하고 있다. 스콧 총리는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20일 오후 9시부터 모든 비거주자와 호주 시민이 아닌 이들에 대한 입국 금지 조치를 시행한다고 밝혔다.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가 19일(현지시간) 캔버라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책을 발표하고 있다. 스콧 총리는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20일 오후 9시부터 모든 비거주자와 호주 시민이 아닌 이들에 대한 입국 금지 조치를 시행한다고 밝혔다.
ⓒ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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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재기 원정'을 하는 사람들이 있나 보다. 주민 수가 적은 외곽의 조그만 동네 슈퍼에 낯선 외지인들이 몰리기 시작한 것. 결국 그 지역에 산다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장을 볼 수 있는 조치가 내려졌다.

아침에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근처 울리로 갔다. 진작에 사재기를 포기한 나는 평소보다 더 발품을 팔아 장을 본다. 다행히 오늘은 기대도 하지 않던 쌀을 발견했다. 식용유도 재고가 있었다.

사재기를 하던 사람들이 쟁여 놓을 만큼 다 구매를 한 것인지, 정부의 여러 시스템들이 작동을 시작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유가 뭐든, 쌀을 샀으니 김밥도 계속 쌀 수 있고, 식용유를 샀으니 지난주에 만들어 놓은 스프링롤을 튀겨 먹을 수 있다. 

그동안 나는 세 식구가 사는 집에서 442L 냉장고의 절반만 채우며 생활해 왔고, 팬트리(음식 저장고)에 식재료가 쌓이면 괜히 불안을 느끼곤 했다. 코로나19로 일상의 많은 부분이 흔들리고 있는 지금, 나의 생활 방식을 지켜낼 수 있을까.

장을 본 후 집에 돌아와 텃밭에 물을 뿌렸다. 집 주인이 만들어 놓은 텃밭에 깻잎, 아욱, 상추, 부추, 호박 등 사시사철 채소를 키워 먹는다. 지금처럼 시장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을 때, 내 입에 들어가는 음식 재료를 내 손으로 키워내는 능력이 중요하게 느껴진다. 앞으로 더 열심히 퇴비를 만들고, 텃밭을 가꾸며 땅에 의존하는 비율을 높여야 할 것만 같다.

'앞집 사는 니콜레타처럼, 닭을 키워 계란도 자급자족 해볼까?'
 
 다행히 최근에는 사재기로 매장에서 구경하기 힘들었던 쌀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최근에는 사재기로 매장에서 구경하기 힘들었던 쌀이 보이기 시작했다.
ⓒ 이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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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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