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김초희 감독.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김초희 감독. ⓒ 우상희 스튜디오

 
"영화 피디요? 돈도 끌어오고, 사람도 모으고 그런 일 합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속 찬실이(강말금)은 '영화 피디는 뭐하는 사람이냐'는 하숙집 주인 할머니(윤여정) 물음에 그렇게 답했다. 막 촬영을 앞둔 감독의 돌연사로 실직자가 돼버린 마흔 줄의 찬실이는 산골 깊은 집으로 들어가 자신과 주변 사람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시집은 못 가도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평생 할 줄 알았는데"라는 대사는 이 영화로 장편 데뷔를 알린 김초희 감독의 자기 고백이기도 하다. 스물셋에 영화감독을 꿈꾼 이후 프랑스로 유학도 다녀오고 틈틈이 단편도 찍었는데 꽤 오래 그를 따라다닌 수식어는 '홍상수 사단', '홍상수 감독의 피디'였다. 유학생 시절인 2007년 홍 감독의 <밤과 낮> 연출부에 합류한 이후 그는 2015년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마지막으로 영화 프로듀서 일을 그만뒀다.

지난 5일 개봉한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코로나19 바이러스 유행에도 1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영화도 사랑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영화 속 찬실이가 떠오른다. 지난 11일 서울 강남의 모처에서 만난 김초희 감독이 "역시, 제가 이 여건에서 개봉을 하게 되다니. 피하고 싶진 않았다. 정말 찬실이 같지 않냐 아이고 복도 참 많지"라며 기자에게 읊조리듯 말했다.

김초희와 찬실 사이, 그리고 배우 강말금

스물셋으로부터 정확히 23년이 지나 장편 데뷔작을 내놓은 그는 이 모든 걸 계획했던 것일까. 8년여의 프로듀서 생활을 뒤로하고 그 경험을 녹인 영화를 세상에 내놓을 줄 말이다. "데뷔작이 이런 이야기일 줄 전혀 몰랐다"라며 김초희 감독이 말을 이었다. 그는 정말 영화를 내려놓을 생각이었다.

"2015년 7월에 일을 그만두고 캐나다로 가서 1년간 영화를 계속할지 말지 고민했다. 한국에 돌아왔을 땐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었지. 뭘로 먹고 살까 하다가 반찬가게를 낼까 했다. 저 요리 잘한다! 잘하는 건 잘한다고 말할 줄 알아야지(웃음). 근데 그 결심을 하고도 마음이 행복하진 않더라. 반찬을 지인들에게 만들어주며 나름 시범을 보이고 있을 때 윤여정 선배님께 전화가 왔다. <그것만이 내 세상>에 부산 사투리 지도가 필요한데 해보라는 권유였다.

망설이고 있는데 '반찬가게보단 (하던) 일이 낫지 않냐' 하시더라. 두려웠다. 근데 현장에 막상 나가니 감독이 돼야겠더라. 프로듀서는 다신 하기 싫었고. 번아웃을 경험했거든. 원래 감독이 되고 싶었고, 여전히 그 열망으로 차 있다는 걸 느꼈다.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는데 후퇴는 없어야 했다. 나이도 있고. 그때부터 정말 열심히 글을 썼다. 제 열망의 불씨를 지피다 보니 그때 처지와 상태가 들어간 시나리오를 쓸 수밖에 없었다. 초고는 1개월 반 만에 썼지만 제가 만든 인물이 보편성을 가져야 했기에 1년 넘게 고치고 또 고쳤다. 그러다 (영진위 등) 제작 지원을 받게 됐지. 운이 좋았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김초희 감독.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김초희 감독. ⓒ 우상희 스튜디오

 
이 맥락에서 찬실이를 맡을 배우 또한 중요했다. 유명 배우를 쓰냐 마냐의 갈림길에서 감독은 강말금이라는 대중에게 생소한 배우를 택했다. 김도영 감독의 단편 <자유연기>를 보고 그를 마음에 품게 됐다고 한다. 공교롭게 강말금 역시 스물일곱까지 무역회사 직원이었다가 뒤늦게 연기의 길을 택한 경우였다.  

"물론 유명 배우를 쓰면 어찌 됐든 제작비는 조금이라도 마련할 수 있겠지만, 극중 찬실이의 가장 친한 친구가 소피(윤승아)라는 여배우잖나. 근데 찬실이를 알려진 배우로 쓰면 모든 게 설정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여배우 역을 하는 소피가 있기에 찬실이는 알려지지 않은 얼굴이어야 했다. 핵심은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온 진정성이 있는 얼굴이었다. 강말금 배우 얼굴에 그 진정성과 절박함이 있었다. 사실 알려지지 않은 배우는 많잖나. <자유연기>를 본 이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얼굴이면 연락하리라 생각했는데 정말 그랬고, 연락처를 수소문해서 제의하게 됐다."
 
진정성 외에 찬실이의 또 다른 매력이라면 '귀여움'이었다. "사람에겐 귀염성이 가장 중요하다"며 김초희 감독은 그 단어를 두 번 더 강조했다. 정말 좌절할 상황이지만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뭔가 계속 해보려는 성정. 그게 감독이 그린 찬실, 그리고 본인의 모습이었다. "근데 실제 강말금 배우가 귀여움과는 좀 거리가 있었는지 포털사이트에 '애교'를 찾아보며 연기했다더라"고 김 감독은 살짝 귀띔했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 지이프로덕션 , 윤스코퍼레이션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 지이프로덕션 , 윤스코퍼레이션

 
창작의 욕망, 오리지널리티에 대해

스물셋의 김초희를 물었다. 영화감독이 되기 전 막연하게 그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고등학생 때 겪은 경제적 위기에서 오롯이 자신을 자신답게 만드는 수단이 글쓰기였다고 한다. 나전칠기 장인이었던 아버지, 가구 공장을 운영했던 어머니 밑에서 제법 부유함을 누리기도 했지만 수입 가구가 들어오며 사업이 망했다. 점수에 맞춰 대학에서 불어 전공을 택한 것도, 각종 아르바이트를 섭렵했던 것도, 그러다 문득 학비가 싼 프랑스로 유학을 결심했던 것도 그 직후였다.

"답답했던 그때 자연스럽게 날 표현하는 도구로서 글에 매력을 느꼈지만, 철도 없었고 인생이 농익지도 못했기에 쉽게 포기했던 꿈이었다. 짧게나마 습작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친구들에게 글을 보여주니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반응이 있었다. 그게 엄청 상처였다. 화도 나고 두렵기도 하고, 그래서 비디오를 봤다. 그때 제가 비디오 가게 점원이었거든(웃음). 우연히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집시의 시간>을 보게 되며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오히려 몰랐기에 오래 영화를 붙잡을 수 있었던 것 같다는 게 김초희 감독 스스로에 대한 진단이었다. "영화에 가까이 다가가 보니 내가 좋아하는 게 거기에 다 있더라"고 말하는 김 감독의 표정이 잠시 아득해졌다.

"(연출하다 보니) 나보다 영화를 더 좋아하고 잘하는 스태프가 있다면 그의 능력이 발휘될 수 있게 돕는 것도 영화를 사랑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흥행 여부를 떠나 영화는 같이 만들어 가는 거니까. 영화를 해야겠다는 꿈은 한 번도 흔들려 본 적 없는데, 감독을 한다는 건 좀 다른 영역이잖나. 소설가를 꿈꿨던 때를 돌이키면 계속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에 대한 강박이 생긴 것 같다. 어디서 본 것 같다는 평은 싫더라. 영화를 잘 만든 척 하고 싶지 않았다. 혹평을 받아도 좀 투박해도 내 영화라는 느낌을 주는 그런 작업을 하고 싶었다. 이거 뭔가 김초희 것 같다는 느낌." 

영화 지상주의를 버리다

영화를 위해 살겠다며 다짐했던 때가 있었다. 후회 없이 달렸고, 모든 에너지가 소진됐다. 피디로서의 삶이 김초희 1기였다면, 2기의 김초희는 영화보다 본질적인 행복한 삶을 묻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이 모아 온 비디오를 버리려다 상상 속 장국영(김영민)을 만난 뒤 뭔가를 깨닫는 찬실이처럼 말이다.

"찬실이 대사에 제 마음을 담았다(웃음). 전엔 영화를 하겠다는 생각만 있었지 어떻게 살겠다는 건 없었거든. 영화만 하면 삶은 어찌 됐든 해결될 줄 알았던 거지. 위기를 지나며 느낀 건 제가 삶 자체를 궁금해하지 않고, 그저 뭔가를 하기만 하며 살았다는 사실이었다. 삶이 삶으로서 의미 있어야 하는데 영화만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일까. '어떻게 살 것인가' 그 고민을 내게 던지고 있다. 정답은 없지! 영화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게 중요한 것 같다.

지금은 정말, 성과주의 시대라는 걸 느낀다. 꿈에 대한 존중이 갈수록 없어진다. 그 절박함, 꿈을 향해 고군분투하는 용감한 사람들 중 단지 성과가 없다는 이유로 무시당하는 이들이 많아 보인다. 내가 꿈이 있다는 것조차 말하기 어려워지는 사회 분위기 아닌지. 본인들은 알 것이다. 자신이 뭘 하면 행복하다는 걸. 근데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게 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김초희 감독.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김초희 감독. ⓒ 우상희 스튜디오

 
그래서 김초희 감독은 다시 다짐했다. 주어진 조건에 맞게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자고. 영화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했고, 영화만 하면 된다는 '영화 지상주의자'였던 그는 이젠 행복한 자, 행복을 찾는 자가 되고 싶어졌다. 당장 차기작을 고민하다가도 맛있는 음식과 좋은 사람과의 시간도 누리는 그였다. 억압된 여성이 주인공인 코미디물, 학원 공포물 등 머리에서 굴리고 있는 여러 아이템이 있었다. 다만 그는 조건 하나를 분명하게 달았다.

"초고가 나온 것도 있고, 어서 구상하고 싶은 소재도 있어서 <찬실이...>만 잘 마무리 되면 빨리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 열심히 해볼 생각인데 인생은 또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잖나. 하고 싶은 것에 갇히지 않고, 주변에 있는 좋은 것들도 잊지 않을 것이다. 열심히 하다가도 지치면 굳이 열심히 안 살아도 되지 않을까. 그냥 전 잘 지내고 싶다(웃음)." 
찬실이는 복도 많지 김초희 강말금 윤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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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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