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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 바로 앞에 있는 영은문 주초.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다.  현재는 영은문 전체가 남아 있지 않고 그 일부인 주초만 남아 있다. 사진 왼쪽 하단의 비석에 ‘영은문 주초’라고 쓰여 있다. 영은문은 처음에는 명나라 사신에 대한 환영의 뜻으로 세운 문이다. 나중에 인조정권과 그 후계자들은 청나라 사신에 대한 환영의 뜻으로 이 문을 활용했다.
 독립문 바로 앞에 있는 영은문 주초.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다. 현재는 영은문 전체가 남아 있지 않고 그 일부인 주초만 남아 있다. 사진 왼쪽 하단의 비석에 ‘영은문 주초’라고 쓰여 있다. 영은문은 처음에는 명나라 사신에 대한 환영의 뜻으로 세운 문이다. 나중에 인조정권과 그 후계자들은 청나라 사신에 대한 환영의 뜻으로 이 문을 활용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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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는 자주독립국가의 결의를 다지고 위상을 강화하는 국가적 상징물로서 독립문을 세우기로 하였다. 이는 독립협회의 주요 목적사업이 되었다.

전통적으로 청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이 헐린 장소인 서대문구 현저동에 독립문을 세우기로 하여 고종황제의 동의를 받았다. 1896년 11월 21일 정초식을 거행하여 1년 뒤인 1897년 11월 20일 준공을 보기에 이르렀다.

서재필은 독립문을 건립하게 된 배경을 『독립신문』을 통해 널리 소개하였다. 

오늘 우리는 국왕께서 서대문 밖 문의 옛터에 독립문이라고 명명할 새로운 문을 세우기로  결정한 사실에 기뻐한다. 우리는 그 문에 새겨질 이름이 한국어(언문)로 조각될지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되길 바란다.……이 문은 다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러시아로부터 그리고 모든 유럽 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조선이 전쟁의 폭력에서 열강들에 대항하여 견딜 수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조선의 위치가 극히 중요하여 평화와 휴머니티와 진보를 위해서 조선의 독립이 필요하며, 조선이 동양 열강 사이의 중요한 위치를 향유함으로 보장하도록 위치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것이다. 전쟁이 조선의 주변에서 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 머리 위에서 쏟아질 것이다. 그러나 힘의 균형의 법칙에 의하여 조선은 손상 받지 않고 다시 일어설 것이다.

독립문이 대성공을 거두길, 그리고 후세들이 독립문을 가리키며, 이것을 만든 백성들에게 영국인, 미국인, 프랑스인 같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들 선조들의 영광스러운 성취를 나타낼 때 받는 느낌과 같은 느낌을 느끼기를 바란다. (주석 3)

 
현재의 독립문 모습, 원래 동남쪽으로 조금 아래쪽에 있었다. 고가도로가 생기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앞에는 영은문 주초가 있다.
▲ 현재의 독립문 모습, 원래 동남쪽으로 조금 아래쪽에 있었다. 고가도로가 생기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앞에는 영은문 주초가 있다. 현재의 독립문 모습, 원래 동남쪽으로 조금 아래쪽에 있었다. 고가도로가 생기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앞에는 영은문 주초가 있다.
ⓒ 신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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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은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방하여 독립문을 짓고자 하였으나 예산과 기술이 이에 미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화강석으로 쌓은 구조물은 중앙에 홍예문이 있고 내부 왼쪽에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다.

홍예문의 이맛돌에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이화문장(李花紋章)이 새겨져 있고 그 위의 앞뒤 현판석에는 각각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글씨와 그 좌우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주석 4)

'독립문'이라는 현판 글씨는 그동안 이완용이 썼다는 주장이었으나 근래에는 당대의 명필이었던 김가진의 작품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건립을 주도한 서재필은 독립문이 완공하는 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이달 초 이튿날 새 외부(外部)에 여러분들이 모여 의론하기를 조선이 몇 해를 청국 속국으로 있다가 하나님 덕에 독립이 되어, 조선 대군주 폐하께서 지금은 세계에서 제일 높은 임금들과 동등이 되시고,(건원칭제를 말하는 듯 - 필자) 조선인민이 세계 자유하는 백성들이 되었으니, 이런 경사를 그저 보고 지내는 것이 도리가 아니요,

조선이 독립된 것을 세계에 광고도 하여, 또 조선 후생들에게도 이때에 조선 독립된 것을 전하자는 표적이 있어야 할 터이요, 경치 좋고 정한 데서 운동도 하여야 할지라, 모화관에 새로 독립문을 짓고 그 안을 공원으로 하여 천추만세에 자주독립한 뜻이라.

이것을 하려면 정부 돈만 가지고 하는 것이 마땅치 않은 까닭은, 조선이 자주 독립된 것이 정부에만 경사가 아니라 전국 인민의 경사라, 인민의 돈을 가지고 이것을 꾸며놓는 것이 나라에 더 영광이 될 터이요. (주석 5)

 
영은문 본래 모습. 조선시대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던 모화관 앞에 세웠던 문. 지금은 아래의 돌기둥만 독립문 앞에 놓여 있다.-여성문화유산연구회 자료집에서 켑쳐함.
 영은문 본래 모습. 조선시대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던 모화관 앞에 세웠던 문. 지금은 아래의 돌기둥만 독립문 앞에 놓여 있다.-여성문화유산연구회 자료집에서 켑쳐함.
ⓒ 여성문화유산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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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독립문은 사적 제33호로 지정되고, 박정희 정부가 1979년 7월 성산대로 공사를 하면서 원위치에서 서북쪽으로 70m 떨어진 지점으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 독재정권은 자주독립의 상징물인 독립문의 위치까지 옮기는 만용을 서슴지 않았다.

독립문이 건립되었을 때, 『독립신문』에는 이를 경축하는 '독자투고'가 실렸다. 백성들이 좋아했던 일면을 보여준다. 내용 중에 '연주문'은 영은문의 별칭이다.

양성 김석하 독립문가

 우리 조선신민들은 독립가를 들어보오
 병자지수 설치하고 자주독립 좋을시고
 독립문을 지은 후에 독립가를 불러보세
 우리 조선신민들은 진충보국 하여보세
 우리 성주 유덕하여 자주독립 좋을시고
 연주문을 쇄파하고 독립문이 높아지네
 우리 성주 수만세요 우리 창생 화합이라
 오백년래 좋은 일은 독립문이 좋을시고. (주석 6)


주석
3> 『독립신문』, 1897년 11월 20일치.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7)』, 62쪽.
5> 『독립신문』, 1897년 11월 20일치.
6> 『독립신문』, 1896년 7월 16일치.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한힌샘 , #한힌샘_주시경, #한글, #독립문, #영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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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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