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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공인 친일파' 1005명을 발표했다. 이중 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김홍준, 백낙준, 신현준, 김석범, 송석하, 백홍석 등 11명은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오마이뉴스는 대한민국 101주년을 맞아 현충원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들의 실상을 소개한다.[편집자말]
현충원 안장자 찾기 프로그램에서 친일파 김홍준을 입력하면 이렇게 뜬다.

'안장일자 2015-09-03'

그러나 안장이란 말과 달리 김홍준의 유해는 현충원에 없다. 위패만 있다. 이 위패도 중간에 다른 위패로 바뀌었다.  

기자가 서울현충원을 관리하는 국방부에 문의하니 담당자는 이렇게 답변했다.

"김홍준은 현역 복무 중 사망했고 이후 1967년 현충원 위패봉안관 건립 시 위패가 봉안됐다. 그러다가 2015년 김홍준의 부인이 사망함에 따라 자녀들이 부부동반 안장 심의를 요청해 부인의 위패가 함께 봉안되었다." 
 
친일파 발표 후 국립묘지 안장된 국가공인 친일파
친일파 김홍준의 위패는 국립서울현충원의 상징인 현충탑 뒤쪽 부부위패묘에 있다. 부부위패묘는 현충원 정문에서 도보로 7분 거리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 묘역 중 정문에서 가장 가깝다.
▲ [현충원 안장 친일파] 김홍준 묘지 친일파 발표 후 국립묘지 안장된 국가공인 친일파 친일파 김홍준의 위패는 국립서울현충원의 상징인 현충탑 뒤쪽 부부위패묘에 있다. 부부위패묘는 현충원 정문에서 도보로 7분 거리로, 국립서울현충원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 묘역 중 정문에서 가장 가깝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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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김홍준을 국가공인 친일파로 결정했다. 국가가 친일파로 인정한 후에도 김홍준의 위패가 현충원에 다시 세워진 것이다.

이에 대해 국방부 담당자는 기자에게 "국립묘지 안장 후 친일행적이 인정되더라도 국립묘지 외부로 이장할 수 있는 근거 조항은 없다"라고 설명했다. 

김홍준은 국립묘지의설치및운영에관한법률 제5조에 명시된 "군인·군무원 또는 경찰관으로 전투나 공무 수행 중 상이(傷痍)를 입고 전역·퇴역 또는 퇴직한 사람으로서 사망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현충원에 잠들었다.

2020년 3월 현재 김홍준과 그의 부인이 함께 새겨진 위패는 국립서울현충원의 상징인 현충탑 바로 뒤쪽 부부위패묘역 정중앙에 있다. 

간도특설대 중대장 김홍준   
2013년 8월 8일 친일반민족행위자 의복·유물 문화재 등록반대 항일독립운동단체 긴급 기자회견이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동상앞에서 열렸다.
▲ "친일반민족행위자 유물 문화재 등록" 중단 촉구 긴급 회견 2013년 8월 8일 친일반민족행위자 의복·유물 문화재 등록반대 항일독립운동단체 긴급 기자회견이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동상앞에서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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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생인 김홍준은 스물하나의 나이에 일제가 세운 만주국 봉천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1937년 9월 5기로 졸업, 3개월간의 견습사관을 거쳐 12월에 보병 소위로 임관한다. 그의 동기 중에는 김백일, 신현준, 김석범, 송석하 등 국가공인 친일파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

김홍준은 김백일, 신현준, 송석하와 마찬가지로 1938년 항일무장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간도특설대 대원으로 복무했다. 

간도특설대는 1938년 12월 만주지역에 산개한 조선인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창설된 만주군 특수부대로 부대장은 일본인 장교였으나 중대장과 소대장 이하 병사들은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김홍준은 간도특설대에서 기관총박격포중대의 연장(중대장)으로 활약하며 일본 정부로부터 2회에 걸쳐 훈장을 받았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당시 김홍준의 활동을 '간도특설부대 조직활동'이라는 부제를 달아 보고서에 남겼다.
 
"1944년 간도특설대는 열하성 유수림자 일대에서 항일무장부대에 대한 탄압을 대대적으로 펼친다. 이때 김홍준은 기박련(중기관총 2정, 8cm 박격포 1문이 포함된 부대)의 연장으로서 직접 부대원들을 이끌고 활동에 앞장섰다."

그러면서 위원회는 "(김홍준이) 1944년 음력 2월 15일 밤, 유수림자에서 서쪽으로 50리에 있는 곳을 토벌했다"면서 당시 김홍준이 소속됐던 부대가 행한 잔인한 행적들을 상세히 기록했다. 
 
"마을을 수사하는 중 XX 연장(중대장)과 그의 통신병이 한 팔로군이 뛰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총을 쏘아 죽였다. 연장은 군도로 팔로군의 머리를 벤 후 그 머리를 유수림자에 가지고 가서 철가마에 삶아냈다. 그 연장은 팔로군의 두골(머리뼈)을 기념으로 남겨두었다."

간도특설대는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으로 강제 해산될 때까지 "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라는 내용의 가사를 부대가로 썼다. 아래와 같다.
 
"시대의 자랑, 만주의 번영을 위한 징병제의 선구자, 조선의 건아들아! 선구자의 사명을 안고 우리는 나섰다. 나도 나섰다. 건군은 짧아도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대화혼(大和魂, 일본의 민족정신, 가미카제 특공대가 외치며 자살함 - 기자 주)은 우리를 고무한다. 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한다."

해방 후 신분 변화 꾀했지만...
 
국립서울현충원의 상징인 현충탑 바로 뒤쪽에는 친일파 김홍준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국립서울현충원의 상징인 현충탑 바로 뒤쪽에는 친일파 김홍준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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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김홍준은 다른 친일파들과 마찬가지로 적극적으로 신분 변화를 꾀했다. 당장 미군정이 운영하는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1946년 1월 김홍준은 군사영어학교를 1기로 졸업한 후 육군 소위로 임관할 수 있었다. 이후 김홍준은 국방경비대 4연대 창설 중대장으로,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보급과장으로 임명돼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군으로 신분을 바꾼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김홍준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1946년 9월 26일의 일이다.

해방 후 김홍준이 몸을 맡긴 국방경비대는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으로 1946년 1월 15일에 미군정에 의해 창설됐다. 

국방경비대는 각 도에 연대를 하나씩 늘려가는 방식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만주군 출신 원용덕이 국방경비대의 총사령관을, 일본육사 출신인 채병덕과 이형근이 각각 1연대장과 2연대장을 맡았다. 김홍준의 동기이자 간도특설대 출신인 김백일이 3연대장, 마찬가지로 간도특설대 출신인 정일권과 백선엽이 각각 4연대장, 5연대장을 맡았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과 동시에 국방경비대는 육군으로 개칭됐다.
 
▲ 김홍준 (1915~1946) - 국가공인 친일파 선정 뒤에 현충원에 부부 위패를 세우다 스물한 살에 일제가 세운 만주국 봉천군관학교에 입학, 1938년 항일무장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간도특설대원으로 복무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1944년 유수림자 일대에서 그가 소속됐던 부대가 행한 잔인한 행적들을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마을을 수사하는 중 XX 연장(중대장)과 그의 통신병이 한 팔로군이 뛰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총을 쏘아 죽였다. 연장은 군도로 팔로군의 머리를 벤 후 그 머리를 유수림자에 가지고 가서 철가마에 삶아냈다. 그 연장은 팔로군의 두골(머리뼈)을 기념으로 남겨두었다." 해방 후엔 다른 친일파들과 마찬가지로 신분변화를 위해 노력, 대한민국 국군으로 신분을 바꿨다. 그러나 1년도 되지 않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1967년 유해 없이 위패만 국립서울현충원에 봉안됐다. 2015년 김홍준의 부인이 사망하자 현충원은 부부의 위패를 새로 세웠다. 2009년 '국가공인 친일파' 발표 뒤 현충원에 친일파의 위패가 새로 세워진 것은 김홍준이 유일하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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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묘지 찾기
(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snmb/index.aspx)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이장 촉구' 청와대 국민청원 함께 하기(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7052)

태그:#친일파, #김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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