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과 분단의 명암이 뒤엉키면서 모든 분야가 혼란했던 1946년. 대구 시내 유명 극장 만경관에서 5월 16일에 눈길을 끄는 영화 한 편이 개봉했다. 고전소설을 영화화했다는 안종화 감독의 <유충렬전>이었다.

해방 이후 첫 극영화로 거론되고 있는 <똘똘이의 모험>이 1946년 9월에 개봉했던 점을 생각해 보면, 그보다 앞선 영화가 있다는 기록은 당연히 눈길을 끌 수밖에 없다. 더구나 '창극계의 일류 명창 총출연'이라는 문구가 무색하지 않게 이동백, 송만갑, 정정렬, 김창룡 등 전설적인 판소리 명창들이 대거 출연진 명단에 있는 것을 보면, 순간 아찔한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1946년 5월 일간지에 실린 <유충렬전> 광고

1946년 5월 일간지에 실린 <유충렬전> 광고 ⓒ 이준희


하지만, 놀라움에 이어 바로 또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은 의문이다. 이동백은 1946년 당시 생존해 있었으나, 송만갑은 1939년 1월에, 정정렬은 1938년 3월에, 김창룡은 1943년 2월에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고인이 된 명창들을 모아 영화를 찍을 수는 없는 일이므로, <유충렬전>에는 뭔가 사연이 있음이 분명하다. 만경관 상영을 끝낸 영화는 이어 5월 28일 서울 우미관에서도 역시 '돌연' 개봉을 했으므로, 단순한 광고상 착오가 아니라 <유충렬전>이 확실히 실재했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놀라움과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창극 영화 <유충렬전>은 사실 10년 전인 1936년에 이미 제작, 개봉이 되었던 작품이다. 1936년 4월 일간지 기사에서는 이동백 이하 명창들이 소속된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유충렬전>을 촬영하기 위해 감독 이평, 촬영기사 이신웅과 함께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한 달 반쯤 지난 5월 말에는 실제 영화가 완성되었고, 6월 8일에는 부민관, 현재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드디어 <유충렬전>이 개봉을 했다. 나흘 동안 이어진 상영은 조선성악연구회 회원 100여 명이 총출연한 보람이 있었는지, 관객들의 갈채 속에 대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1936년 5월 일간지에 실린 <유충렬전>의 한 장면

1936년 5월 일간지에 실린 <유충렬전>의 한 장면 ⓒ 이준희


그런데, <유충렬전>은 실상 제대로 된(?) 극영화는 아니었다. 촬영한 필름을 상영하기도 했으나, 동시에 무대 장치를 꾸미고 공연도 함께 한, 영화와 창극이 교차하는 이른바 연쇄극이었다. 연쇄극은 주로 1910년대 말부터 1920년대 초까지 제작되어 인기를 끌었던 초창기 영화 형태였고, 영화 산업이 자리를 잡으면서 사실상 사라지기도 했지만, 영화 역사에서 배제되지는 않는다. 한국 영화의 공식 출발점으로 간주되고 있는 1919년 10월 27일도 한국인이 제작한 최초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가 처음 상영된 날이다.

연쇄극 다음 단계인 무성영화 시대도 지나고, 최초의 발성영화인 <춘향전>이 1935년에 개봉까지 한 마당에, 그렇다면 구시대의 유물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는 연쇄극으로 1936년에 <유충렬전>이 제작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겠지만, 역시 창극 <유충렬전>의 핵심 요소인 명창들의 소리를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성영화 제작이 1935년부터 시작되었다고는 하나, 녹음 기술의 한계로 1930년대 후반 발성영화의 소리 문제에 대한 지적은 끊이질 않았다. 따라서 화려한 볼거리는 필름 상영으로, 출연 명창들의 소리는 익숙한 무대 실연으로 처리해 연쇄극을 꾸미기로 한 것이 조선성악연구회의 결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에 쓰인 대표적인 군담소설 <유충렬전>은 20세기에 들어서도 상당한 인기가 있는 작품이었다. 작품 배경은 중국 명나라였지만, 고난을 극복하고 성장해 공을 이루는 영웅의 이야기는 당시 대중에게도 충분히 매력적인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조선성악연구회의 첫 영화가 왜 <춘향전>, <심청전>처럼 좀 더 익숙한 이야기가 아닌 <유충렬전>이었는지,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이국적이고 고전적인 의상이나 소품을 등장시켜 화려한 볼거리를 영상으로 제공하기에 <유충렬전>이 적당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1936년 6월 일간지에 실린 <유충렬전>의 한 장면

1936년 6월 일간지에 실린 <유충렬전>의 한 장면 ⓒ 이준희


1946년 만경관 상영 당시 광고에는 감독이 안종화라 되어 있지만, 1936년 개봉 때 기록으로 보면 이는 분명 사실과 다르다. 실제 감독은 당시 기사에서 소개한 대로 이평이었고, 이평은 1920년대부터 다양한 영화 관련 있을 해 온 김상진의 다른 이름이다. 이평, 즉 김상진이 연쇄극 <유충렬전>의 감독을 맡은 데에는 충분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유충렬전> 제작이 한창 논의되고 있던 1936년 4월, 바로 그때 김상진이 감독을 맡은 또 다른 영화, 그것도 한국 최초의 음악 영화로 꼽히는 <노래 조선>이 개봉을 했기 때문이다.

1936년 4월 15일에 첫 선을 보인 <노래 조선>은 고복수, 이난영, 김해송 등 대중가요 가수들이 대거 출연한 작품이었다. 대중가요와 창극이 음악 분야는 다르지만, 어떻든 음악 영화 경험이 있는 감독은 김상진, 즉 이평이 그 무렵 영화계에서는 유일했으므로, 그가 <유충렬전> 감독을 맡은 것은 충분히 자연스러웠다. 또 <노래 조선>에는 대중가요 가수들 외에 판소리 명창 임방울도 출연을 했는데, 이미 김상진과 영화 작업 경험이 있는 그가 조선성악연구회와 김상진 사이에 선을 놓았을 수도 있다.
 
 영화 <노래 조선>에 출연한 임방울

영화 <노래 조선>에 출연한 임방울 ⓒ 이준희


1936년 부민관 개봉 당시 반응이 좋은 편이었다고는 하나, 10년 뒤 다시 상영될 때까지 연쇄극 <유충렬전>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무대 실연과 분리될 수 없는 연쇄극의 특성상 아무래도 동일한 수준의 상연을 이어 가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앞서 본 바와 같이 1938년 이후로는 주요 출연진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도 있었다. 그렇게 묻히고 잊혀 가던 <유충렬전>이 10년 만에 갑자기 세상 빛을 다시 보게 된 이유는 또 그럼 무엇이었을까?

<유충렬전>이 10년 만에 다시 상영된 데에는 악극 <유충렬전>의 영향이 상당히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46년 2월에 서울 동양극장에서 조선악극단이 초연한 악극 <유충렬전>은, 조선성악연구회의 <유충렬전>과 같이 고전소설에서 이야기를 가져오면서도 창극이 아닌 대중음악과 접목해 뮤지컬로 풀어낸 작품이었다. 악극 <유충렬전>이 인기리에 상연되면서 화제가 되자, 그에 편승해 누군가 간직해 오던 1936년 <유충렬전> 필름을 때맞추어 다시 세상에 내놓았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1946년 2월 일간지에 실린 악극 <유충렬전> 광고

1946년 2월 일간지에 실린 악극 <유충렬전> 광고 ⓒ 이준희


성근 자료를 얽어 환상과도 같은 창극 영화 <유충렬전>의 흔적을 더듬어 봤지만, 그에 관해서는 좀 더 밝혀야 할 점도 많고 이제부터라도 해야 할 일 역시 많다. 필름이 무성인지 발성인지부터도 아직 분명치 않고, 1948년 6월 통영에서 상영된 이후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관련 기록도 더 추적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 데이터베이스에도 누락되어 있는 <유충렬전>의 영화사적 위상을 온당하게 잡아 주는 일이 시급하다. 그리고 쉬운 일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사라진 <유충렬전> 필름을 찾는 일도 포기할 수는 없다. 전설적인 명창들의 생생한 공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영상은 <유충렬전>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기 때문이다.
유충렬전 조선성악연구회 연쇄극 조선악극단 악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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