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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격리박사 바로 옆 키르기즈 관세국 직원 에밀이 한인들이 격리된 막사를 찾아 과일보따리를 건네고 있다
▲ 한인 격리소를 찾은 키르기즈 관세청 직원 한인 격리박사 바로 옆 키르기즈 관세국 직원 에밀이 한인들이 격리된 막사를 찾아 과일보따리를 건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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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오후(현지시각), 키르기스스탄 마나스 국제공항 이웃 군 막사. 필자가 이곳에 격리수용된 지 일주일째 되던 날이었다. 바로 옆 건물에 있는 한 키르기스스탄 관리인이 과일 보따리를 들고 격리된 한인을 찾는다. 에밀이라는 이 직원은 "집을 떠나 힘들겠다. 과일 먹고 힘내시라"며 보따리를 내민다. 정이 넘치는 배려이자, 흔치 않은 풍경이다.

하루 전인 4일 낮. 검역 상황에서 상상하기 힘든 일은 벌어졌었다. 한인들이 격리수용된 이 막사 앞에 한 승용차가 들어섰다. 격리 한인들을 위한 점심식사를 외부에서 싣고 온 것이다. 앞서 대사관 직원 차량도 음식물을 가져다 날랐다. 한식은 갇혀 지내는 한인들에게 기쁨이었고, 위안이 됐다. 검역 상황에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최근, 중국에서 자가격리를 하고 있는 한인들의 집 대문에 동네 주민들이 대못을 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베트남에서는 한국에서 온 여객기를 돌려보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키르기스스탄은 달랐다. 격리된 한인들은 '특별하고도 당당한 대우'를 받았다. 흔히 키르기스스탄의 사회경제적 조건은 중국이나 베트남보다 낮은 것으로 평가되지만, 이들 보건당국의 조치는 세련됐고, 최대한 예의를 갖춘 채 진행됐다. 뿐만 아니라 수용 한인들은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미완성 막사에서 격리... 불편함보다 불안이 앞섰다

필자가 비쉬켁 공항에 도착한 것은 지난 2월 26일. 한국에서 세미나가 끝나자 코로나19 상황이 급변했다. 일일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서둘러야 한다는 걸 직감했다. 패널티를 물고 항공권을 앞당겨 발권했다. 한국인 입국 제한이 자칫 입국 금지로 이어지지 않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키르기스스탄에서 대학을 운영하는 터라, 운영자의 입국 금지는 큰 어려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보통 국가들의 주권적인 조치가 시작되면 정상화에는 꽤나 시간이 걸린다.  

이날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비쉬켁 공항에 입국했다. 역시나 도착 즉시 출입국 관리 직원들은 필자를 바로 검역원에게 인계했다. 그리고 공항 이웃 군 막사로 옮겨졌다. 정문으로 들어오자 걱정이 앞섰다. 동물축사인지 막사인지 모를 정도로 건물들은 미완성 상태였다.

짓다 만 듯한 건물 사이로 격리된 중국인들이 삼삼오오 서성거리고 있었다. 건물들 사이에는 쓰레기들이 날리고 있었고 격리된 자들이 벗어나지 못하도록 노란 띠의 금지선도 쳐져 있었다.

잠시 후, 필자는 검역 안내원을 따라 한 막사로 인도되었다. 컨테이너를 붙여 만든 건물 같았다. 안내원은 필자보다 앞서 도착한 한국인들이 있다면서 건물 안으로 등을 떠밀었다. 건물 안에 들어서자 중국어로 적한 코로나 예방수칙이 눈에 들어왔다. 어두컴컴한 데다, 소독약 냄새가 역겨웠다.

곧 파키스탄에서 온 한 청년이 쓰는 방에 배치되었다. 맞은편 방에는 한인교포 여덟 명이 필자보다 먼저 도착해 격리돼 있었다. 잠시 복도에서 서성이는 동안 상당수의 중국인들이 이 방 저 방을 드나들고 있기도 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이주간 격리 생활을 해야 한다니 우려가 앞서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파키스탄 청년은 중국에서 2년 이상 일하고 입국하다 격리 조치되었다고 한다. 아픈 사람처럼 보였다. 식사를 했느냐고 물었더니 "이틀 동안 전혀 못 했다"고 말했다. 입에 맞지 않는 식사를 줘서 지금까지 굶었다는 것이다. 물도 없었다. 필자는 먼저 도착해있던 한인들에게서 빵을 구해 파키스탄인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얼른 밖으로 나왔다. 숨쉬기도 불편했다. 아니 불편함을 떠나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필자는 대사관에 바로 이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전화 받은 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흔히 방어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공직자와는 사뭇 달랐다. 친절했고 수용적인 자세여서 다소 안심이 되었다. 더욱이 이곳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주재국과 협상하고 있으니 기다려 달라"며 안심시켜주었다.

한편으론, 중국인들과 격리해 수용하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심 걱정도 되었다. 중국의 영향력이 막강한 이 실크로드 지역에 격리된 중국인보다 더 나은 조치가 행해질 수 있을까. 중국은 수천만 달러의 유무상 외자를 키르기스스탄에 제공하는 나라다. 한국인보다 중국인 우선의 법칙이 적용될 수도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몇 시간을 '버티고' 있는데, '굿 뉴스'가 도착했다. 한인들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것이다. 곧이어 한인 격리자들을 실어나를 버스도 도착했다. 안내자에게 물으니 "한인들은 별도로, 특별한 곳에서 격리하도록 정해졌다"고 했다. 갑자기 직원들의 태도도 무척 부드려워졌다고 느꼈다.

깨끗한 건물에 한식까지... '수용소'와는 차원이 달랐다
 
필자가 8일간 머물고 있는 키르기즈 마나스공항 이웃 군 막사 1인실 내부
▲ 격리소 내부. 필자가 8일간 머물고 있는 군막사 1인실 필자가 8일간 머물고 있는 키르기즈 마나스공항 이웃 군 막사 1인실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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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 정도 버스를 타고 옮긴 곳이 새 막사다. 군 막사지만 장교들이 쓰는 비교적 깨끗한 복합 건물이었다. 바로 옆은 관세 경찰들의 근무장소였다. 격리 한인들만 이곳을 따로 쓰도록 배려한 것이다. 좀 전의 '수용소'와는 판이했다. 깨끗한 화장실, 더운물 나오는 샤워시설이 따로 있었다. 건물 안 사감들은 호텔 손님을 받듯 친절했다.

방을 배치받은 뒤 우리는 안전을 느끼며 한숨을 돌렸다. 저녁때가 되었다. 수용 한인들을 위해 한식과 함께 마실 물이 제공되어 놀랐다. 주 키르기스스탄 대사관은 격리 장소만 배려한 게 아니었다. 보건 관계자들이 "한국대사관에서 제공했다"며 전해준 것은 한식 저녁이었다. 섬세한 대사관 측의 배려였다.

한식이 배달될 때까지 대사관은 일을 했을 것이다. 한인들을 배려하기 위해 주재국에 설득했을 것이다. 교포 사회와 지원 문제들을 협의했을 터이고, 음식물 반입에 대해서도 검역 당국이 허가해 줄 것을 설득했을 것이다. 대사관 측은 한 발 더 나아갔다. 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지정격리에서 나아가 자가격리를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고 협의 중"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조화롭고 신속하고 강력하게 움직인 대사관
 
대사관이 주선해 키르기즈 보건당국의 허가로 반입된 한국음식들. 보건당국의 배려로 격리소 한인들이 한식으로 식사를 하고 있다
▲ 격리소에 배달된 한국음식 대사관이 주선해 키르기즈 보건당국의 허가로 반입된 한국음식들. 보건당국의 배려로 격리소 한인들이 한식으로 식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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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리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키르기스스탄 한국대사관은 그렇게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격리 한인들을 위해 카톡 대화방을 열고, 식사 배달 시간과 차량을 점검했다. 주재국 보건당국과는 반입 루트와 방법을 협의해주었다. 한인 단체와 격리자를 위한 지원책을 조정해나갔고 한편으로 다른 한인들의 입국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대사관은 한마디로 주재국 보건당국과 격리 한인들, 한인 커뮤니티 사이의 컨트롤타워였다. 수시로 한국의 급박한 상황을 체크하면서 격리 수용된 한인들의 상태점검을 잊지 않았다. 옮겨진 격리시설에는 난방이 잘 됐고,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공간이 있었다. 보건 관계자는 여성의 날이라며 작은 초콜릿을 건넬 정도로 친절을 베풀었다.

수용 한인들에 대한 '각별한 대우'는 계속되었다. 격리시설에 대한 위생도 철저히 점검해줬다. 격리공간에는 직원도 상주 시켜 청소를 해주는가 하면 소독도 철저히 해주었다. 인터넷 사용에도 어려움이 없었고 바깥 가족과의 소통도 원활했다.

주재국의 이러한 예우는 평소 잘 다져놓은 한국대사관의 외교력의 결과가 아닐까. 긴급시 외교 채널이 잘 가동되고, 위기 대응력도 탁월했던 것 같다. 코로나19로 인해 한인들에 대한 입국 제한이 시작되자, 대사관은 즉각 대응팀을 꾸려 한인 커뮤니티와 소통에 나섰다. 여러 분야 단체장들과의 회의를 소집하며 격리 한인들에 대한 지원책도 논의했다. 격리 한인들이 보다 안전하고 깨끗한 환경으로 옮겨진 것도 대사관의 조직적인 코디 역할이 한몫한 것 같다. 

평상시 잘 다져놓은 주재국과의 다양한 채널은 순탄하게 가동되었다. 의료전문가들의 의견을 청취하며 대응책을 준비했다. 필자는 주재국 보건당국, 한인 커뮤니티 등과 원활한 소통을 할 수 있었던 건 평상시 하태역 대사가 쌓아놓은 공공외교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20년 전에 이곳에 와 사회 활동 중인 한 사업가는 "(하 대사가) 평소 주재국의 다양한 채널, 인맥들과 손발을 맞춰놓았다"고 평가하며 "그렇지 않았다면 갑작스레 격리 수용된 한인들에 대한 대응에 주재국과 온도 차가 많이 느껴졌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대사관, 한인회의 극진한 보살핌에 감동
 
키르기즈 한국대사관의 설득으로 한인들에게 반입이 허락된 한식과 소독제등 필요물품. 한인회 등 한인커뮤니티가 격리된 한국인들을 위해 모아 보낸 음식과 소독제 등 필요물품들이다
▲ 주 키르기즈 대사관의 설득으로 한인들에게 반입되는 한식과 필요물품 키르기즈 한국대사관의 설득으로 한인들에게 반입이 허락된 한식과 소독제등 필요물품. 한인회 등 한인커뮤니티가 격리된 한국인들을 위해 모아 보낸 음식과 소독제 등 필요물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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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리 수용된 한 교민은 "대사관이 격리된 한인들에게서 한시도 눈길을 떼지 않고 오히려 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건강 상태를 묻고 보살펴 주었다"면서 "공공기관으로부터 생애 멋진 보살핌을 받은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대사관과 교민사회, 주재국과의 협력 플레이로 격리된 한인 청소년들도 잘 견뎌주었다.

현재 한국인을 입국 제한하는 국가는 총 103개국이다. 키르기스스탄도 지난 1일부터 한국인을 입국 금지시켰다. 키르기스스탄은 최대 무상원조국인 중국에 대해서도 코로나19 사태 초기에 항공 루트를 닫았고, 오래전 입국 금지를 표명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지난 2월 말이 되어서야 입국 제한을 표명했다.

또, 한국인에 대해 입국 금지를 선언했지만 사업차 키르기스스탄으로 들어오는 길이 막힌 것은 아니다. 키르기스스탄 정부는 입국 금지를 시켰어도 한국인이 '코로나바이러스 5개국'이 아닌 지역에서 2주 이상 머문 경우 입국을 허용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공공외교 영역은 더욱 그 역할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이번의 경우 격리 수용된 한인들을 케어하는 데 공관-주재국-한인 커뮤니티가 주요 외교 축으로 역할을 했다. 외교 관계뿐만 아니라 민간영역의 활동들이 공공영역에 연결되어 있고, 실제 자국민의 보호와 안전에 크게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격리 한인들을 위해 한인 커뮤니티는 주요 롤플레이어로 등장했다. 대사관의 코디 역할이 강조되었다. 주재국의 방침을 따르면서 격리 한인들을 케어하는 식이다.  4일 낮 필요 물품을 조달하는 차량에서 플라스틱 의자들이 실려 들어왔다. 격리된 한인들의 요청이 대사관으로 흘러갔고, 한인회가 움직인 것이다. 회장단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우며 의자까지 구입해 넣어주었다.

격리된 한 한인의 생일 소식을 듣고 한인회에선 케이크도 실려 보냈다. 어린 자녀를 위해 치킨과 햄버거가 공급되어 잠시나마 무료함을 달래기도 했다. 코로나가 만들어준 훈훈한 교민사회 풍경이다. 공공외교의 선봉에 선 주 키르기스스탄 대사관의 컨트롤 타워 역할이 어느 때보다 빛났다고 본다.

태그:#주 키르기스 한국대사관, #코로나바이러스19, #공공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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