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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고종 황제의 어진. 통천관에 강사포를 입은 모습이다. 고종황제의 초상화는 12점이 제작되었는데, 6점만 전해지고 있다.
▲ 고종황제 어진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고종 황제의 어진. 통천관에 강사포를 입은 모습이다. 고종황제의 초상화는 12점이 제작되었는데, 6점만 전해지고 있다.
ⓒ 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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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은 좌절되었지만, 조선의 백성과 고종의 정부 그리고 청일전쟁 등 국내외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1894년의 갑오경장도 그 여파의 하나였다. 정부는 동학농민혁명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 12개조'를 상당부분 수용하면서 국정개혁에 나섰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고종 31년(1894년) 11월 21일 칙령 제14호, "법률 칙령은 다 국문으로 본을 삼고 한문 번역을 붙이며, 또는 국한문을 혼용함"이다.

"고종 31년의 칙령은 당시의 시대적 개화분위기와 무관한 것이 아니겠거니와, 여기 표현된 대로 '국문 곧 '나랏글'이라는 이름은 언문ㆍ암클ㆍ반점 따위와는 비길 수 없이 높은 이름이 한글에 붙혀진 사실을 말해주며, 법률과 명령이라는 공문서들에 감히 깨이지 못했던 한글이 섞이는 정도가 아니라 본이 되어 쓰이도록 일시에 공식적으로 격상되었음을 뜻한다." (주석 7)

훈민정음이 창제된 지 450년 만에 한글은 비로소 처음으로 나라의 공식문자로 대접을 받게 되었다. 하나 임금이 어느날 갑자기 칙령을 발표했다고 해서 수백 년 동안 한문자로 길들여진 관리들의 머리가 쉽게 바뀔 리 없었다. 또한 한글에 대한 연구가 체계적으로 갖춰져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주시경은 이진사의 서당에서 한문만을 배우는 것은 시대가 요구하는 학문이 아니요 시간만 낭비할 뿐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다시 한 번 변신을 시도한다.

1894년 3월 이진사의 서당을 나와 고향으로 가서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학습하다가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결심으로 5월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19세 되던 고종 31년 (1894) 9월에 주시경은 머리를 깎고 배재학당에 들어갔다. 한문이 아니면 글이 아니라고 생각하던 그때, "몸과 머리털이나 살은 부모가 나에게 주신 것이므로 이것을 다치어서는 안 된다." 하는 생각을 가졌던 때에 이것은 큰 깨달음이요 용기가 아닐 수 없다. (주석 8)


주시경은 19살 때에 스스로 머리를 깎았다. 1895년 김홍집 내각이 을미사변 이후 내정개혁에 주력하여 개국 504년 11월 17일을 건양(建陽) 원년 1월 1일로 하여 양력을 채용하는 동시에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다. 고종은 솔선수범하여 머리를 깎았으며, 내부대신 유길준은 고시를 내려 관리들로 하여금 칼을 가지고 거리와 4대문 성문에서 강제로 백성들의 머리를 깎도록 하였다.
  
단발령(1895)은 을미사변과 함께 을미의병 창의의 동기가 되었다.
 단발령(1895)은 을미사변과 함께 을미의병 창의의 동기가 되었다.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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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살해사건으로 일본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좋지 않던 시기에 친일내각이라는 소리를 듣던 정부가 전통과 백성들의 윤리감정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듯한 단발령에 유생들은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정부시책에 저항하고 나섰다. 이때 시국에 분개하여 순국한 사람보다 단발령에 반대하여 죽은 사람이 훨씬 많았다.

주시경은 단발령공포 1년 전에 스스로 머리를 자르고 개화의 길에 나섰다. 누구의 지도가 아니라 스스로 택한 길이다. 그리고 개화의 상징처럼 떠오른 배재학당에 들어갔다. 배재학당은 1885년 8월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서울에 세운 한국 최초의 현대식 중고등 교육기관이다. 기독교인과 국가 인재양성을 위해 일반학과를 가르치는 외에, 연설회ㆍ토론회 등을 열어 사상과 체육훈련에 힘을 쏟았다.
  
마량진은 아펜젤러목사의 순교지이기도 하다. 배재학당을 설립한 미국 감리회 해외선교부의 아펜젤러목사는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자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군산앞바다인 마량진에서 그가 탄 배가 일본상선과 충돌하여 익사하였다.
▲ 아펜젤러목사의 동상과 추모비 마량진은 아펜젤러목사의 순교지이기도 하다. 배재학당을 설립한 미국 감리회 해외선교부의 아펜젤러목사는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자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군산앞바다인 마량진에서 그가 탄 배가 일본상선과 충돌하여 익사하였다.
ⓒ 박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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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은 1894년 9월에 서울 정동에 있는 배재학당에 들어가 박세양ㆍ정인덕 강사에게 서양식 교육을 통한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수학ㆍ영어ㆍ시사ㆍ내외지리(內外地理)ㆍ역사 등의 신학문을 배웠다. 그리고 1895년 8월 탁지부에서 인천 관립이운학교의 관비생으로 선발되어 속성과를 마치고 실지견습에 나갈 즈음에 내각이 바뀌면서 학교가 폐교됨으로써 1896년 3월 배재학당에 재입학하였다. 학비가 없어서 배재학당 부설 인쇄소에서 잡역을 하여 학비를 벌면서 공부하였다.
  
정미의병(1907). 을미사변과 단발령 시행에 항거하여 처음으로 일어난 항일 의병인 을미의병(1895)은 을사의병(1905), 정미의병으로 이어졌다.
 정미의병(1907). 을미사변과 단발령 시행에 항거하여 처음으로 일어난 항일 의병인 을미의병(1895)은 을사의병(1905), 정미의병으로 이어졌다.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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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살이 되던 1898년 9월에 만국지지과(萬國地誌科)를 졸업하고 배재보통과에 진학하였다. 이때에 중추원 고문관 겸 『독립신문』 사장 서재필에게 만국지지를 배우면서 그와 인연을 맺었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갈리는 경우가 많다. 주시경은 배재학당 보통과에서 당대의 개화파 거물 서재필과 만나고,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에 참여하면서 한글연구라는 운명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학구열이 남달랐던 주시경은 배재학당 인쇄소에서 잡역을 하면서 여가를 이용하여 남대문로 상동의 작은 초가에서 한글 연구에 열중하였다.

 
배재학당 박물관
▲ 배재학당 배재학당 박물관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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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에게 영어를 배울 때는 그 낱글자의 성질과 말본 설명이 우리말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깨닫고, 한글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며 집중하느라 길을 걷다가 전봇대와 마주치기가 여러 번이었다. 이 당시 선생의 일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7월 7일(주:1893년)부터 옥계(玉溪, 박세양의 호), 회천(晦泉, 정인덕의 호)을 수(隨)하여 수업한 이후로, 각 문명 부강국이 다 자국(自國)의 문(文)을 용(用)하여 막대의 편의를 취한다 함을 듣고, 아국(我國) 언문(言文)을 연구하며 국어 문법 짓기를 시(始)하다." (주석 9)


주석
7> 김정수, 『한글의 역사와 미래』, 35쪽, 열화당, 1990.
8> 김윤경, 「한글 중흥의 스승 주시경」, 『인물한국사(Ⅴ)』, 330쪽, 박우사, 1965.
9> 『나라사랑』, 18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한글운동의 선구자 한힌샘 주시경선생‘]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한힌샘, #한힌샘_주시경, #한글, #배재학당, #서재필_주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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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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