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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한국인들의 자신감은 고양됐다.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처도 많고 실망감도 컸다. 그런 속에서도 스스로를 세계인으로 자리매김하는 분위기가 한국 사회에서 출현했다.

그런 세계주의는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문>에도 반영됐다. "차(此)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여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여 민족자존의 정권(正權)을 영유케 하노라" "인류적 양심의 발로에 기인한 세계 개조의 대기운에 순응병진하기 위하여 차를 제기함이니" "시(是, 이것은) 천(天)의 명명(明命, 명료한 명령)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전 인류의 공존동생(同生)권의 정당한 발동이라" "동양평화로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평화, 인류행복에 필요한 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등이 바로 그것이다.

세계인으로 향하는 정체성

자신의 정체성을 한국인에 국한시키지 않고 세계인으로 확대시키는 인식은 당시의 신문 기사에서도 발견된다. 1920년 8월 5일 치 <동아일보> 사설 '국제상 일본의 지위'도 그중 하나다.

"오인(吾人, 우리)은 조선인이오 동양인이오 세계인이라. 고로 세계가 오인의 무대이오, 동양이 오인의 무대이오, 조선이 오인의 무대이라. 오인의 무대인 조선을 오인이 애(愛)하는 동시에 동양도 애하며 세계도 애하여, 세계인으로 더부러 안락을 공(共)히 하랴 하며 동양인으로 더부러 생활을 공히 하랴 하며 조선인으로 더부러 진퇴와 동작을 공히 하랴 함은 오인의 이상이며 오인의 소원이라."

신흥 강국인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1918년 1월 8일 민족자결주의을 제창한 것도 세계주의 확산에 기여했다. 그가 제창한 14개 조는 약소민족 해방과 국제연맹 창설을 통해 세계평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식민지 한반도에 상륙한 게 있다. 배우기 쉬운 세계공용문자인 '에스페란토'가 그것이다. 1887년에 폴란드 의사인 루드비코 라자로 자멘호프(1859~1917)가 창안한 에스페란토는 a, e, i, o, u의 다섯 모음과 23개의 자음으로 구성된다. '1민족 2언어주의'에 입각해 동족끼리는 모국어를, 타 민족과는 세계공용문자를 사용하자는 취지로 만든 것이다.

'세계공용문자를 쓰자'는 운동
 
 에스페란토로 표기된 책자.
 에스페란토로 표기된 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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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뒤에 에스페란토 보급운동을 시작한 이는 시인 김억이다. 1895년 평북 정주에서 출생한 그는 오산학교를 거쳐 게이오의숙에 진학한 뒤 등단했다. 1916년 학업을 중단하고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한 뒤 <창조> 및 <폐허> 동인으로 활동하다가 1920년 7월 세계어학회를 조직하고 에스페란토 전파에 나섰다.

그는 1937년부터 친일 활동에 가담했으며, 한국전쟁 중에 납북됐다.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고,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됐다.

2013년에 <어문학> 제122집에 실린 임수경 성균관대 초빙교수의 논문 '김억의 에스페란토 인식 연구'는 "(김억은) 문학인으로서 드물게 에스페란토를 10년 넘게 대중에게 보급하는 활동을 한다"며 "오랜 시간 동안 대중에게 보급한 이유는, 에스페란토를 조선인이 보편적 세계인이 되기 위한 원동력으로 여겼기 때문이고, 그 원인은 에스페란토가 문학어로서 적합한 언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한 뒤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에스페란토를 통해 세계인과의 소통의 용이성을 강조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에스페란토 문학을 통해 세계인의 문화·감각을 익히는 데 방점을 두었다. 김억은 문예품을 인류의 공통 감정의 산물이라고 인식했기에, 각 민족어의 공통적인 부분을 정리해서 만든 언어인 에스페란토는 세계의 공통감을 가진 언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식민지 한반도를 대상으로 하는 동일한 운동이 일본 지식인들에 의해서도 활발하게 전개됐다. 김억이 세계어학회를 만든 지 얼마 뒤부터 일본인들도 한반도에서 이 운동을 벌였다.

일본에서 사회주의자였던 이들도 동참했는데

김억보다 2년 뒤인 1922년에 경성에스페란토 연구회를 창립한 오야마 도키오, 1924년에 경성 에스페란토보급회를 창립한 야마모토 사쿠지 등이 그들이다. 1928년 창립된 에스페란토 독서회, 1930년 창립된 신흥ES회 및 제주도에스페란토연구회도 일본인들이 만든 것이다.

일본인이 설립자가 아닌 회원으로 참여하는 단체도 있었다. 1924년에 설립된 조선에스페란토연맹이 그것이다. 1920년대, 1930년대에 일본인들이 식민지 한반도에 에스페란토를 보급시키는 데 열의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운동에 참여한 일본인들은 주로 진보파였다. 위 논문은 "일본에서는 혁명적인 사람들, 극단적으로 성격이 다른 단체들도 각자 목적을 위해 에스페란토의 유용성을 발견하여 에스페란토 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한 뒤, 이들이 운동을 벌인 기본 동기 혹은 표면적인 동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일본의 지식인들은 식민지 조선의 언어평등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일본 에스페란토학회의 기관지였던 <동양평론>에서는 '일본인들에 대한 조선인들의 의심과 적대감'이라는 주제의 기사를 게재하면서 언어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조선인들이여! 만약 당신이 갈망·슬픔·분노와 모든 감정의 느낌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싶다면 에스페란토를 배우시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어느 정도는 한국인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심이 일본인들의 에스페란토 보급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계기로 전 세계는 물론이고 식민지 한반도에서도 세계주의가 확산되는 속에서 일본 진보주의자들이 한국인의 세계화를 돕겠다며 나섰던 것이다.

혁명적 성향을 가진 지식인들이 조선에 들어왔으니, 조선총독부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일본어도 아니고 에스페란토를 보급하려 했으니, 총독부가 주목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도 그들이 비교적 오랫동안 한반도에서 활동했다는 것은 총독부의 묵인이 있었음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총독부가 묵인할 만한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는 그들이 이 운동을 벌인 동기로부터 드러난다. 그들의 기본적 혹은 표면적 동기는 언어제국주의에 맞서 언어의 세계적 보편성을 달성하는 데 있었다. 이에 더해, 그들의 내면을 지배한 또 다른 동기가 있었다. 위에 거명한 오야마 도키오의 활동에서 그 동기가 잘 드러난다.

조선에서 이 운동을 주도한 오야마 도키오는 도시샤대학에서 에스페란토를 공부한 사회주의자다. 1922년부터 경성에스페란토연구회를 운영한 그는 주한 일본인들의 한반도 이해를 도울 목적으로 1926년 6월 <조선시론>이란 잡지를 창간했다.

한국인뿐 아니라 주한 일본인에게도 에스페란토 보급운동을 벌인 그가 정도사(正道社)란 단체를 만들고 이 단체 기관지로 <조선시론>을 만든 것은 주한 일본인들을 '좋은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좋은 일본인이 될 것을 제창"... 에스페란토 운동의 당연한 실패

2018년에 <어문논총> 제78호에 실린 위 임수경의 또 다른 논문 '식민지 조선, 식민본국인에 의한 에스페란토 보급과 그 의미-오야마 도키오를 중심으로'에 따르면, <조선시론> 창간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식민지 한국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놓고 주한 일본인들을 상대로 쓴 글이다.

"생각건대 우리가 의식해서 그들을 차별하고 모욕해 반감을 사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무의식중에 같은 언동이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정도사는 이를 깊게 생각해, 말은 좀 이상하지만, 조선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에게 존경받을 수 있도록 보다 좋은 일본인이 될 것을 여기에 제창하는 바이다. 그래서 조선인이 일본인으로서의 생활을 향유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오야마 도키오의 목적은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고 한국인이 일본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한일 양국민이 일본어가 아닌 에스페란토로 소통하도록 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감을 줄이면서 한국인의 일본화를 가속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위 논문은 "에스페란토는 평등의 언어였지만, 오야마 도키오에게 에스페란토는 식민지 조선인과 식민본국인 일본인 사이의 오해와 반목만을 줄이기 위한 도구로만 인식했던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런 뒤 이렇게 말한다.

"오야마 도키오는 에스페란토라는 평화의 언어를 식민지 조선에 보급하면서 에스페란토를 통해 조선인과 일본인이 갈등 없이 평화롭게 공존하기 바라면서 에스페란토의 이상을 구현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도와는 상관 없이 그가 식민본국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조선에 대한 시선은 '식민지' 조선에 머물러 있었다. 이것은 제국인의 또 다른 자기화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당시 이념적으로 사회주의를 좇으면서도 식민본국인이라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분열적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3.1운동을 계기로 한국인들의 자신감이 고양되고 세계주의가 확산되는 속에서 이 땅에 상륙한 에스페란트 보급운동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이 언어는 해방 이후의 한반도에서 일본어보다도 훨씬 적게 기억되고 있다. 이것이 실패한 것은 에스페란토가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반도에서 이 운동을 벌인 주역들의 정체성과도 무관하지 않다.

한국인 김억은 결국 친일파가 됐다. 일본인 오야마 도키오는 일본인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고 한국인이 일본인처럼 살도록 하기 위해 운동을 벌였다. 오야마 도키오는 일본에서는 사회주의자였지만, 식민지 한국에서는 그냥 일본인이었다. 그는 이 땅을 '한국'으로 바라보지 않고 '식민지'로 바라봤다. 보급운동의 주역들이 갖는 이 같은 정체성이 운동의 한계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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